24.
김민준은 이서연과 헤어진 후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었다. 도시의 도서관에는 책이 로키산맥 쓰레기장보다 많다. 분야도 더 다양하다. 잘 정리되어 있어서 원하는 걸 찾기도 쉬웠다.
그곳에서 책을 읽어 요리에 대한 지식을 조금 더 보충한 후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햇빛도 얼마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에 무보증 월세방이지만 그에게는 아늑한 공간이다.
이 방이 있어서 단벌옷의 손빨래가 가능하다. 날씨가 건조해 저녁에 세탁해도 다음날 아침이면 입을 만큼 말랐다.
휴대용 소형 가스레인지로 음식도 조리할 수 있다. 싱크대도 있어 재료를 씻고 다듬기도 편하다.
이 방이 제공하는 건 그 정도지만, 그래도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부족함이 없다.
공짜는 아니다. 도시는 대가를 요구한다. 이 방을 유지하려면 월세를 내야 한다. 월세를 내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내 김밥이 난 맛있는데. 혹시 나만 맛있나?”
도서관에서 요리 이론을 추가로 찾아보고 왔지만,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내 입맛이 워낙 싸구려인 게 문제인가?”
그의 입장에서는 문명세계의 음식은 뭘 먹어도 맛있다. 자기가 만든 김밥은 더 맛있다.
“이 김밥이 내 입맛에만 맞는 건가?”
당장 돈을 벌지 못하면, 벌 때까지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한다.
방구석의 상자를 열어 그가 가진 것을 확인했다.
이서연을 괴롭히던 도상태 일당을 때려잡았을 때, 지갑의 돈을 털었다. 그 돈으로 모자란 감이 있어 다른 돈 될 물건들을 더 챙겼다. 그렇게 확보한 게 휴대폰과 손목시계다.
휴대폰은 네 개나 가져왔다. 모두 전원은 꺼놓았다. 그중 하나는 오동태를 신고할 때 잠깐 켰었다.
“이건 팔 물건이 못 되네.”
휴대폰에는 이름이나 다름없는 일련번호가 있다.
손목시계는 딱 하나 챙겨왔다. 도상태가 차고 있던 것이다.
“이게 돈이 되려나.”
겉만 봐서는 구문이 안 된다. 비싼 시계인지, 비슷하게 복제한 짝퉁인지, 아니면 새것도 만원에 팔리는 싸구려인지 알 수가 없다.
“상태를 보면 짝퉁에 싸구려 같은데.”
제대로 보았다면, 팔수도 없는 물건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서연에게서 받은 휴대폰이 만져졌다.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때깔부터가 도상태 일당의 것과 달랐다. 뭔지 모르게 비싸보였다.
게다가 이건 장물이 아니다. 팔아도 뒷조사가 안 들어온다.
“이런 거 새로 사려면 한 백만 원 하나?”
* * *
이서연은 김민준의 연락처를 모른다.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기로 했다.
‘그 사람. 곧 휴대폰을 개통할 거야. 개통만 하면 주소록을 보고 나에게 전화를 할 거야. 전화가 하기 싫어도, 문자라도 보낼 거야. 친절한 사람이니까.’
그녀는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는 중이다. 여러 검사실을 오갈 때도 휴대폰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간호사가 제지했다.
“MRI실에 휴대폰이라니요. 절대로 안돼요.”
이서연이 휴대폰을 한영숙에게 맡겼다.
“엄마. 전화 오면 꼭 받아야 해요.”
“알았으니까 어서 검사부터 받아.”
그녀는 어쩔 수 없는 때만 제외하고는,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 * *
바지의 건빵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찢어지지 않은 포장지와 작은 상자가 나왔다.
포장지를 잘 접어서 상자와 함께 방 안쪽에 보관했다.
“이걸 팔아먹을 순 없지.”
포장까지 된 정식 선물은 처음 받아보았다. 반쪽짜리 햄버거와 푸짐한 순댓국도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호의를 담고 있었지만, 여기 담긴 마음이 좀 더 깊다.
선물은 잘 받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이거 개통하면 돈 들잖아.”
외국인 신분이라도 선불 요금제로 개통할 수 있다. 대신에 여권을 제시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로키산맥에 버린 자가 1984의 빅브라더 같은 정보력을 가졌을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게 두려웠다면, 비행기를 타는 건 고사하고 여권 갱신조차 하지 않았어야 했다.
이서연의 경우는 병 자체가 특별해서 조심했지만, 휴대폰은 다르다. 꼭 필요하다면 약간의 위험을 감수할 수는 있다.
그런데 휴대폰이 필요가 없다.
게다가 돈 문제도 걸린다. 선불 요금제는 먼저 돈을 적당히 충전해야 한다.
“지금 여기 쓸 돈이 어디 있냐.”
가진 돈은 김밥을 만드느라 꽤 많이 써버렸다. 이제 남은 돈이 별로 없다.
돈 대신에 김밥이 많이 남았다.
오늘 팔지 못한 김밥은 내일 다시 팔 수 없다. 그게 김민준이 아는 지식이다.
“내일까지 김밥만 먹겠네.”
돈을 아끼려면 그래야 한다.
“그래도 배는 부르겠다.”
김민준이 이서연에게서 받은 스마트폰의 전원을 켰다. 개통이 되지 않아도 통화를 제외한 기능들은 쓸 수 있는 제품이다.
김민준이 주소록 같은 통화관련 기능은 건드려보지도 않고 속 편하게 생각했다.
“전화 할 데도 없는데 개통은 무슨 개통. 개통 안 하고 나머지 기능만 써도 아주 유용하겠다.”
* * *
이서연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 전화가 늦네.’
* * *
이튿날, 김민준이 김밥 오십 줄이 든 스티로폼 박스를 들고 전철역으로 향했다.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김밥의 맛을 향상시키는 건 아직 궁리중이다. 답이 나오지 않아서, 양은 어제의 절반인 오십 줄만 만들었다.
“오늘도 안 팔리면 정말 재료비를 올려서라도 맛을 더...”
전철역 앞에서 서성거리던 남자가 그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제 하루 팔고 끝인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하하하.”
김민준은 이 남자를 안다. 어제 제일 처음 김밥을 사간 손님이다. 그의 장사 인생의 첫 손님이다.
남자가 김민준에게 만 원짜리를 내밀었다.
“세 줄 주십시오.”
김민준의 얼굴이 확 펴졌다. 어제 아침 내내 판 게 다 해서 겨우 열 줄이다. 그런데 오늘은 나오자마자 벌써 세 줄을 달라고 한다.
“여기 있습니다.”
김밥을 주고 사천 원을 거슬러주었다.
남자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가격이 그대로군요?”
“깎아드릴 순 없습니다만?”
“아하하하. 아닙니다. 혹시 어제만 특판가였나 해서 물어본 겁니다.”
조금 지나자 어제 두 번째로 사갔던 아가씨가 나타났다.
“다섯 줄 주세요.”
“예?”
김민준은 자신의 좋은 귀를 의심했다.
아가씨가 걱정했다.
“호, 혹시 다 팔린 거예요?”
“아닙니다. 다섯 줄.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많이 파세요.”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던 아가씨가 급히 올라왔다.
“내일도 파시는 거죠?”
“아. 예. 별 일 없으면...”
“꼭 파셔야 해요.”
그 아가씨의 행동을 보고, 지하철역에 들어가려던 행인이 다가왔다.
“맛있어서 그러나? 나도 한 줄만 주십시오.”
전날 김밥을 샀던 사람들은 오늘 그를 보면 예외 없이 다시 샀다. 재구매시 제일 적게 사간 사람이 두 줄이다. 제일 많이 사간 사람은 혼자서 열 줄을 샀다.
“어제 우리 팀원들이 한 개씩 먹고 아주 뒤집어졌습니다. 하하하.”
호들갑까지 떨면서 많이 사가는 걸 본 다른 행인들도 한 줄씩 사고는 했다. 남들이 사니까 그냥 한 줄씩 사가는 손님도 있었다.
방정익은 전철역 입구로 걸어가면서 김밥장수부터 찾았다.
저 멀리 김민준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에게 김밥을 파는 게 보였다.
방정익이 발걸음을 빨리 했다. 앞사람이 김밥을 받아가자마자, 신이 나서 말했다.
“김밥 주세요. 두 줄 주세요.”
어제 동료 직원의 것까지 사가기로 약속했다.
김민준이 방정익을 돌아보았다.
방정익은 김민준의 스티로폼 박스를 보자 벌써부터 입맛이 돌았다.
“아니지. 다섯 줄 주세요.”
‘점심도 이걸로 먹자.’
한 줄은 동료에게 주고, 자신은 아침과 점심에 두 줄씩 먹을 계획을 세웠다.
‘뜨끈한 컵라면까지 더하면 오늘 아주 뿌듯한 식사가 되겠...’
김민준이 말했다.
“없습니다.”
“예?”
“다 팔렸어요.”
김민준은 어제 장사를 망쳤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의 반밖에 안 되는 분량을 만들어왔다.
예상과 달리 오늘은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 어제 사갔던 사람들이 와서 한 번에 몇 줄씩 구입했다. 김밥 오십 줄쯤은 순식간에 다 팔렸다.
방정익이 왔을 때 산 사람도, 다섯 줄을 달라고 했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두 줄만 받아갔다.
방정익은 당황했다.
‘맛있는 김밥이 다 팔려?’
화를 버럭 냈다.
“아니. 김밥이 다 팔리면 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넉넉히 만들어왔어야지요!”
김민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야 내 사정이고.”
“아니. 그래도 손님이 왕인데!”
“내일부터는 다른 동네 가서 팔까보다.”
방적익이 움찔했다.
어제 한 개만 더 달라는 동료의 부탁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혼자 다 먹었다. 삐지려는 동료를 오늘 한 줄 사다주겠다는 말로 달랬다.
이젠 김밥 따위 없다고 말하면, 정말 대놓고 삐질지도 모른다. 그 동료는 삐지면 오래 간다.
게다가 방정익 자신도, 이 김밥을 어제 한 번 먹고 끝내고 싶지 않다.
소리치던 방정익이 당장 꼬리를 말았다.
“농담입니다. 농담. 하하. 내일은 꼭 파세요.”
김민준이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쉬운 건 방정익이다. 이 김밥이 먹고 싶어서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나왔다. 그런데도 다 팔렸다. 어제 잠자리에 누워서도 기대한 걸 못 먹게 되자 더 먹고 싶었다.
게다가 동료 직원을 달래려면 내일은 두 줄은 사다줘야 한다.
방정익이 머리에 다른 방법이 떠올랐다.
“예약하겠습니다. 예약.”
방정익이 만원을 꺼냈다.
“다섯 줄 예약하겠습니다. 선불 드릴 테니까, 내일 아침에 꼭 여기서 파십시오.”
“봐서요.”
* * *
김민준이 자기 방에 가서 돈을 셌다.
“오십 줄에 십만 원. 재료비가 오만 원이 들었으니까 오만 원 수익. 아침 잠깐 장사로는 대박이네.”
삼십 분 동안 재료 준비와 이동 등에 쓰고, 삼십 분 동안 만들고, 한 시간 남짓 김밥을 팔았다. 재료 구입에 든 시간이나 밥솥과 프라이팬 등의 초기 투자 비용을 감안하지 않고 계산하면, 그 장사로 오만 원을 남겼다.
“재구매율이 백 프로를 넘어서 삼백 프로쯤 되네.”
어떤 상품이든 재구매율이 팔구십 프로만 되도 대박이다. 김민준도 지식으로 안다. 게다가 이 상품은, 그가 확인한 다른 지하철역 김밥보다 비싼 가격에 판다. 그만큼 남는 것도 많다.
“내일은 몇 줄이나 만들까?”
김밥은 혼자서 수작업으로 만든다. 만드는 시간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지하철역 입구 한 곳에서 아침 출근 시간대의 짧은 시간만 장사를 한다.
고객 규모의 확장에 한계가 있다.
“내일은 다시 백 줄.”
백 줄을 팔면 아침 잠깐 장사의 이익이 십만 원으로 늘어난다. 주말은 빼고 팔아도 한 달에 이백만 원 이상이다. 더 많이 만들면 더 큰 돈을 번다.
“백 줄 이상은 어려워.”
첫 날 돈 벌 꿈에 부풀어서 만든 게 백 줄이다. 한 줄 한 줄 정성을 다 해 만들었다. 김밥 맛이 좋은 건 그가 고른 좋은 재료와 각 식당의 맛 비결이 전부가 아니다. 그의 꼼꼼한 손맛도 한 몫 했다.
손이 워낙 빨라, 정성을 다해 꼼꼼하게 해도 한 시간에 백 개나 만들기는 했다.
내일부터는 김밥을 파는 시간이 더 짧아지겠지만, 만드는 시간이 한 시간으로 늘어나야 한다. 결국 아침에 만들고 파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두 시간이다.
그렇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일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잠은 푹 잔다. 잠을 잘 자야 낮에 더 맑은 정신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다.
전날 만들어두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그는 자기 김밥이 왜 재구매율 삼백 퍼센트를 만들었는지 안다.
“맛이 핵심인데, 미리 만들어두면 맛이 덜하지.”
고민을 했더니 출출해졌다.
“밥이나 먹자.”
김민준이 어제 만들었다가 남은 김밥을 집었다. 꽤 많이 남았던 김밥이 이제 별로 없다.
김민준의 식사량은 일반인의 상식을 훌쩍 넘어선다.
먹으면서 생각했다.
“생활비는 김밥으로 충당되겠네.”
이 정도 수입으로는 먹고 싶은 걸 실컷 먹을 수 없다.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도 없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러 다닐 수도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대비도 할 수 없다.
지하철역 앞에서 김밥만 팔아도 워낙 인기가 좋아 생계는 해결된다.
생계만 해결된다.
“부족해.”
* * *
쌍칼파 조폭 세 명이 사무실 탁자에 둘러앉아 짜장면을 먹었다.
셋 중 하나가 마지막 남은 단무지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중간 간부 박선원이 입에 짜장면을 문 채 단무지를 집었다. 이미 그의 짜장면 그릇에는 한 입 배어먹은 단무지 네 개가 얹어져 있었다.
부하 조폭이 군소리 없이 젓가락을 양파 쪽으로 옮겼다.
박선원이 짜장면을 먹으면서 불평했다.
“이거 어디서 시킨 건데 다꽝이 이거밖에 없어?”
“다음부터는 많이 달라고 하겠습니다. 형님.”
“다음?”
“당장 가져오라고 전화하겠습니다. 형님.”
“만두 서비스도 가져오라 그래.”
“예. 형님.”
부하 조폭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쌍칼 조덕구가 들어왔다.
조폭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형님. 오셨습니까?”
조덕구가 박선원에게 물었다.
“찾으라는 건 찾았냐?”
셋 중에 가장 서열이 높은 박선원이 허리를 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옆 동네 룸살롱까지 뒤지면서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찾고 있어?”
조덕구가 탁자를 붙잡고 확 뒤집었다. 반쯤 먹은 짜장면 그릇들이 사무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새끼들아! 찾지도 못했으면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다, 당장 찾으러 가겠습니다!”
셋이 튀어나가려고 했다. 조덕구가 박선원의 발을 탁 걸었다. 박선원이 짜장면 위로 엎어졌다.
“처먹은 건 치우고 가.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