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김민준이 남은 돈을 확인했다.
“보름 동안 세상 경험 한다고 잘 놀았더니 확 줄었네.”
문명세계를 경험하려면 돈이 든다. 이제 남은 돈은 이십만 원밖에 없다.
이 돈으로도 아껴 먹으면 한동안 식비는 된다. 하지만 도시생활을 하려면 먹는 데 말고도 돈 나갈 곳이 많다. 십오일 후에는 방세 이십오 만원도 추가로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전기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슬슬 난방도 생각해야 하는데.”
병을 치료한 후에도 체질의 특이성은 상당부분이 남았다. 덕분에 추위에 강하다.
추위에 강하다고 해서 일부러 춥게 잘 필요는 없다. 잠자리가 편안해야 건강에 좋다.
“이십 만원을 자본금으로 할 수 있는 게...”
돈이 너무 적다. 포장마차를 하려고 해도 이 돈으로는 턱도 없다.
김민준은 최근 보름동안 서울을 밤낮으로 떠돌아다니며 지식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줄여왔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는 몰랐던 삶의 방법들을 보았다.
“있기는 있네.”
* * *
강력1팀장 안상준이 파출소로 강정진을 찾아왔다.
“정진아.”
강정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아. 그게 말이야. 문제가 좀 생겼다.”
“사건이 꼬였습니까?”
“네가 꼬였다.”
“예?”
“너 복귀해야겠다.”
강정진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팀장님. 전 그냥 여기 있겠...”
안상준이 손을 흔들었다.
“내가 한 거 아니야. 난 너 여기 있게 놔두려고 했다.”
“그런데 왜...”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위에는 제가 복귀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 많습니다만?”
“아무리 막고 싶어도, 자기보다 더 위에서 시키면 해야지.”
“얼마나 높은 곳입니까?”
“청장님 특별 지시다. 너도 이 사건에 투입하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강정진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경찰청장이 일개 형사에 대해 알기는 어렵다.
“보고가 어떻게 올라간 겁니까?”
“이번 사건이 연쇄살인범을 잡은 거잖아. 그것도 검찰이 수사지휘 들어오기도 전에 우리 선에서 끝냈지. 윗선에서 이번 일에 관심이 아주 많아졌다. 그래서 내가 너 표창이라도 좀 받으라고 있는 그대로 보고했지.”
“있는 그대로요?”
오동태를 발견한 건 강정진이다. 하지만 오동태를 잡은 건 그가 아니다.
“전 단지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뿐입니다만?”
“그 후에 네가 마약을 발견했잖아. 오동태와 도상태 패거리가 같은 놈에게 당했다는 걸 밝힌 것도 너고. 그걸 다 적었다. 그 보고가 그대로 청장님에게까지 올라갔나보다.”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알겠군요. 그런데 저까지 동원한다는 건, 관계있는 사람은 다 투입한다는 뜻인데...”
이번 일에 손을 댄 곳은 또 있다.
“그럼 마약팀은요?”
“같이 하게 됐다. 일이 점점 커지는데다가, 청장님 관심 사건이니까.”
“정식 복귀입니까?”
“미안하다. 파견이다.”
파견으로 가면 사건이 해결된 후에 이곳으로 복귀할 수 있다.
“다행이네요. 전 이제 여기 적응했으니까요.”
* * *
김민준이 먼저 김밥을 만드는 방법을 궁리했다.
방법 자체는 지식으로 알고 있다. 먹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 만들어보지는 못했다.
“일단 좋은 재료가 필요해.”
음식 맛은 좋은 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 그렇다고 해서 재료가 전부는 아니다.
그가 자신이 먹었던 김밥들을 떠올렸다. 맛있었지만, 똑같이 만들면 경쟁이 되지 않는다.
음식 장사에 대해 지식으로 아는 것이 있다.
“남들과 똑같이 해서 팔면 남들만큼만 팔리겠지.”
그만큼만 팔아서는 생계유지가 안 된다.
“재료를 좋은 걸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개선이 필요해.”
개선할 방법들을 궁리했다.
로키산맥 아래 쓰레기장에서 주웠던 요리책들을 생각해보았다. 책에 나오는 요리 사진을 보며 침만 삼켰었다. 그 중에는 전문가들을 위한 요리 이론서적들도 있었다.
“아니야.”
그는 저렴하고 간단하게 먹을 김밥을 만들려는 거지 레스토랑에 별을 다는 게 목표가 아니다.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지난 보름간 서울에서 먹은 음식들을 떠올렸다.
서울에서는 다양한 요리가 팔린다. 점심으로 광화문에서 전주비빔밥을 먹고 저녁은 신촌에서 일본라면을 먹는 게 가능하다.
문명세계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먹었던 햄버거를 떠올렸다. 꼬마 이미나가 먹다 남긴 것을 나눠주었었다.
“충격적인 맛이었지.”
오랫동안 쓰고 떫은 선식만 먹다가 맛본 햄버거는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햄버거도 김밥처럼 속에 몇 가지 재료를 넣어 만드는 음식이다.
그 다음으로 먹었던 건 탁현경네 가게의 순댓국이다.
“감칠맛이 일품이었지.”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먹으면서 느꼈던 것들을 기억해냈다.
김밥을 만드는 방법이 조금씩 완성되었다.
김민준이 먼저 대형 마트에 들렀다. 김밥에 쓰이는 재료들의 상태를 직접 확인했다. 뭔가 좀 모자랐다.
시장으로 이동했다.
김밥에는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그 중 시금치 하나만 해도 품질이 다양하다. 어떤 시금치는 질이 좋은 대신에 값이 비쌌다. 값이 싼 건 질이 나빴다.
김민준은 감이 좋다. 오감이 모두 대단히 좋으며, 육감도 발달했다. 산에 살면서 다양한 식물을 경험했다. 당시에는 먹어보지만 못했었다.
그가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하며 좋은 시금치를 찾아다녔다. 눈으로 확인하고 냄새를 맡고 가능하면 맛도 보았다.
옆 동네 시장까지 가서야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았다.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품질이 좋은 시금치가 있었다.
다른 재료들도 필요하다. 시장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좋은 식재료를 확보했다. 심지어는 근처 산에도 올라가봤다.
식재료만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아직 프라이팬 하나도 없다.
* * *
방정익은 직장이 종로에 있다. 하지만 그가 사는 곳은 강북 지역의 원룸이다.
그의 월급으로는 종로에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임대료가 덜 비싸고 종로로 들어가는 교통이 그리 나쁘지 않은 이곳에 방을 얻었다.
아침에 빠른 걸음으로 전철역을 향해 걷다가, 입구에서 평소에 못 보던 사람을 발견했다.
김민준이 보온이 되는 스티로폼 박스에 김밥을 여러 줄 담아놓고 팔고 있었다.
방정익은 이 전철역에서 김밥을 파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김밥을 여기서도 파네?’
직장 근처 전철역을 나오면,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김밥을 파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의 고객은 보통 아침 식사를 차려먹을 시간이 없는 출근길 직장인들이다. 출근길이 대상이므로 장사 시간은 보통 출근시간 전까지다.
아침식사 대용 김밥이 필요한 사람은 대부분 직장 근처에서 산다. 하지만 이 동네는 사무실이 많지 않다. 그래서 여기는 그동안 아침 김밥 장사가 없었다.
‘이 동네에서는 장사 안 될 텐데...’
그의 눈에 스티로폼 박스가 들어왔다.
보통은 아이스박스를 사용하지만, 김민준은 주워다 쓰는데 익숙하다.
김민준의 허름한 옷도 보았다. 빨래는 했지만 그런다고 헌 옷이 새 옷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이렇게라도 살아보려고 애쓰는구나. 안됐네.’
부유함과 가난함은 절대적인 기준으로만 분류되는 게 아니다. 일정조건을 충족한 다음부터는 상대적인 기준도 중요한 비교 요건이다.
방정익은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에 다니다는 것이 새삼 행복하게 느껴졌다.
“얼마입니까?”
“이천 원입니다.”
방정익의 예상보다 비쌌다.
김민준은 가격이 비싸지 않고 품질이 좋은 재료들을 써서 김밥을 만들었다. 그래도 그가 기준을 워낙 높게 잡은 덕분에, 전체 재료비는 제법 많이 들었다. 남들과 같은 값에 팔면 남는 게 없다.
방정익이 가격을 듣고 생각했다.
‘이 사람. 망하겠네. 여기서 장사하는 것도 잘못 생각한 건데 가격도 이천 원이나 받다니.’
그래도 방정익은 군소리 없이 이천 원을 꺼냈다.
여기서부터 사가지고 회사까지 가는 건 조금 불편하지만, 곧 망할 장사라고 생각하자 안쓰러워서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
* * *
오전 늦은 시간에, 김민준이 스티로폼박스를 들고 공원에 나타났다.
이서연이 먼저 와서 그를 기다렸다.
“오셨어요?”
그녀는 지난 보름동안 이곳에서 김민준을 만났다. 오전에 여기서 그와 만나는 게 그녀의 새로운 일과다. 매일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녀가 김민준이 가져온 스티로폼박스를 보며 물었다.
“그건 뭐예요?”
“김밥입니다.”
“예? 한 상자나요?”
“지하철 역 앞에서 출근시간에 장사를 좀 해보려고 김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시구나. 많이 파셨나요?”
김민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장사라는 게 쉽지 않네요. 나름대로 연구 많이 해서 맛을 낸 건데.”
이서연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았다.
포장지로 싼 김밥이 잔뜩 들어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장사를 망쳤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녀가 제안했다.
“제가 살게요.”
한 박스 다 해봐야 큰돈은 아니다. 자기가 모두 사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
김민준이 거절했다.
“안됩니다.”
“왜요?”
“선식 만들어온 거 먹어야죠.”
그녀는 김민준이 자기 건강에 신경 쓴다는 걸 안다. 매일 어깨와 등을 주물러주는데 모를 리가 없다. 그가 등을 자극해주면 몸이 따뜻해졌고, 그가 주는 선식은 맛이 좋았다.
효과도 느끼고 있다. 김민준을 만난 후로 지난 보름 동안은 진통제 약발이 참 잘 듣는다고 생각했다.
김민준이 스티로폼 박스에서 선식을 담아온 통을 꺼냈다.
“드세요.”
“네.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
같이 제대로 된 식당에 가고 싶기는 하다. 몇 번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김민준이 거절했다. 매번 자기가 먹을 것까지 가져왔다.
사실, 그녀도 이렇게 그가 직접 만들어온 걸 공원에서 같이 먹는 게 더 좋다.
장소도 마음에 들고, 음식 맛도 좋다. 김민준이 먹었던 쓴 맛과 떫은맛만 나던 선식과는 반대로, 그녀의 병치료를 위한 선식은 달작지근하면서도 새콤했다.
김민준이 거의 팔리지 않은 김밥을 하나 꺼냈다. 포장지를 벗겨 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맛있는데 이상하네.”
이서연이 김민준이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선식 맛있게 만드는 솜씨를 생각해보면, 김밥 맛도 이상하지는 않을 텐데...”
“남들 입에는 안 맞았나봅니다. 나야 뭐 입맛이 싸서 다 맛있으니까.”
“그래도...”
“아니면 역시 가격이 문제일지도...”
“얼마 받으시는데요?”
“이천원입니다.”
“전철 앞에서 파는 것 치고는 조금 비싼 거 아닌가요?”
“재료비가 제법 드니까, 천 원만 받아서는 재료비도 안 나옵니다.”
“원가가 문제면 재료를 좀 싼 걸 쓰면...”
“음식을 파는 건 단순한 장사가 아닙니다. 선의를 가지고 만들어야 하고, 내가 만든 음식을 남이 먹는다는 걸 잊지 않아야 하죠. 남에게 음식을 팔려면, 지킬 건 지켜야 합니다.”
이서연은 더 이상 싼 걸 권하지 못했다.
“네. 맞아요. 정말 잘 됐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녀가 아쉬워하며 선식이 튼 통을 열었다. 한약재 특유의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차라리 선식 장사를 하시지.’
그런 생각을 잠깐 떠올렸다.
* * *
방정익은 출근하자마자 바쁜 일이 터져 정신없이 일했다. 바쁘게 두 시간쯤 일하고 나자 겨우 상황이 수습되었다.
“휴우. 배고프다.”
평소에는 아침에 김밥 한 줄씩 먹어 요기를 했지만, 오늘은 너무 바빠서 손도 대지 못했다. 이제야 시장기가 돌았다.
방정익이 가방에서 김밥을 꺼내 사무실 옆의 휴게실로 갔다.
동료 직원이 휴게실에서 커피를 뽑으며 물었다.
“방 대리. 한 시간만 있으면 점심인데 지금 그걸 먹게?”
“배고파 뒤지겠다.”
방정익이 김밥을 싼 포장지를 벗겼다.
“초보자 같더니 모양은 그럴싸하네.”
피식 웃으며 김밥 한 개를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방정익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어? 어?”
그의 입에서 밥알이 몇 개 흘러 떨어졌다.
동료가 자판기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상했어? 길에서 파는 김밥은 상했는지 잘 봐야지.”
방정익이 대답이 없었다. 동료가 김밥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냄새는 좋은데?”
입에 넣고 살짝 씹었다.
깜짝 놀랐다.
“어?”
밥알의 입에 감기는 달짝지근한 맛과 속재료의 신선하고도 다양한 맛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김에 바른 기름의 고소함이 김밥의 맛을 더 북돋워주었다.
씹고 삼키자 마지막에는 감칠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우와아. 이거 장난이 아닌데? 김밥에 마약이라도 넣었나? 어디서 산거야?”
김밥을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방정익이 갑자기 그 손을 탁 쳐냈다.
“내 거야!”
동료가 잠시 멈칫하다가 지갑을 꺼내 탁자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얼마면 되겠어? 전부 나한테 팔아!”
“닥쳐!”
방정익이 김밥을 두 손으로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