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14.
김민준의 예민한 감각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것만으로도 몸 안의 온도를 짐작해냈다.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남들보다 두툼한 그녀의 옷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상태다.
‘설마...’
김민준이 앓았던 병은 체질이며 동시에 질병이다. 날 때부터 그 체질을 타고 나며, 어느 시점이 되면 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균형이 무너진다. 그것이 발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가 수련했던 고대의 책에는 몇 가지 체질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지독하면서도 치명적인 것이 김민준의 체질이다.
김민준은 자신과는 정 반대의 위치에 있는 다른 체질을 떠올렸다.
‘설마 그 병...’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부정했다.
‘말도 안 돼. 그 병이 아무리 내 경우보다 덜 희귀하다지만, 그건 상대적인 비교야. 우리나라를 다 뒤져도 한 명 있을까말까 할 정도로 희귀해.’
김민준의 경우는 누군가가 전 세계를 다 뒤져서 찾아낸 케이스다.
‘내가 그 병을 가진 사람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어. 차라리 번개를 맞을 확률이 더 높지.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이 동네는 일반적인 장소가 아니다. 특별하다.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이 동네의 기의 밀도가 가장 높다.
‘그 병을 앓는 거라면 기에도 예민하겠지. 이곳에 있을 때는 몸이 조금 편해하게 느껴졌을 거야. 이유는 몰라도 편안한 느낌이 좋아서 자주 들렀겠지.’
이 동네는 그녀 같은 사람을 끌어당긴다. 김민준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는 여기서 사는 게 제일 좋을 거라고 예상하고 이곳을 찾아왔다.
장소의 특수성으로, 서로 만날 확률이 급격히 올라갔다.
아직 부족하다.
세상에 알려진 현대 의학은 이 병을 진단해낼 수 없다. 증상을 완화시키는 게 고작이다.
김민준은 전 세계에서 이 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그도 이 병을 진찰해서 진단할 방법은 없다.
진찰로는 진단할 수 없지만, 진단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녀의 심장 상태가 느껴졌다. 박동의 불규칙성이 한계를 벗어나기 직전이다. 이대로 놔두면 심장에 치명적인 상처가 생긴다.
김민준이 그녀의 등을 손가락으로 꽉 눌렀다. 팔과 어깨도 눌렀다.
마치 지압을 하듯이 눌렀다.
그녀를 살리기 위한 응급조치임과 동시에, 병을 진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 병이라면, 이 방법이 통할 거야. 통한다면, 그 병이야.’
그가 하는 건 단순한 지압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몸을 누르는 동작에 그가 가진 인체에 대한 이해, 현대 의학, 고대의 지식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강한 자극이 신경의 신호전달기능을 막았다. 신경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지는 잘못된 신호들을 차단했다.
김민준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급소를 잘못 찌르면 심장이 더 빨리 멎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어차피 그녀는 죽는다.
김민준이 그녀의 목을 손가락으로 사정없이 눌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몸을 때리고 목을 조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동작이 거칠었다.
이서연은 정신을 반쯤 잃었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깨어났다.
‘아. 나 안 죽었나?’
심장의 고통은 어느새 가라앉았다.
대신에 상반신이 다 아팠다.
겨우 눈을 뜨고 보니, 김민준이 자신의 몸을 주무르고 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김민준은 그녀의 몸을 더 이상 손가락으로 찌르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심장은 안정되었다. 심장만 안정된 게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낮았던 체온도 조금 회복했다.
그 말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그 병이 맞구나. 내 경우와는 정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그 병이 이 아가씨를 죽이고 있었어. 운명 따위는 믿지 않지만, 신기하기는 하네.’
지금은 그녀의 신경을 차단한 충격을 풀어주기 위해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중이다.
‘이 아가씨는 운이 참 좋구나. 나를 만났으니까.’
이서연은 당황했다.
‘이 사람. 왜 이러지?’
김민준이 나타나서 양아치들을 물리치고 그녀를 구해주었다. 고마웠다.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 큰 발작이 찾아왔다. 정신을 반쯤 잃었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렸더니, 김민준이 자신의 몸을 주무르고 있다.
무슨 일인지 파악이 덜 됐지만, 김민준은 양아치들로부터 그녀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건 똑똑히 기억한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
김민준이 그녀를 마사지하다가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매일 아침마다, 한겨울 눈밭에서 잠을 깨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겠네.’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김민준의 경우는 불구덩이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괴로웠었다. 그녀가 겪은 고통을 직접 느끼지는 못하지만, 어떤 것인지 짐작은 갔다.
김민준이 한숨을 내쉴 때 입의 위치가 하필 그녀의 귀 근처였다. 지식만 있지 경험이 없는 데서 온 실수였다.
김민준의 입김이 그녀의 예민한 귀에 닿았다.
이서연의 몸이 움찔 떨렸다.
‘설마... 변태?’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녀가 김민준을 살짝 밀었다.
“저기...”
김민준은 밀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팔을 주무르며 생각했다.
‘이 아가씨는 어느 정도 상태일까?’
이런 종류의 병은 깊을수록 빨리 죽는다. 얕을수록 죽을 날이 늦게 찾아온다.
김민준의 태양절맥은 대단히 심각한 정도였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현대 과학과 고대 신비를 모두 받아들여 스스로 완치했다.
‘이 아가씨가 이 나이까지 살아 있는 걸로 봐서는, 내 경우보다는 덜 심하다는 소리인데...’
그보다 덜 심했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다. 발병 시기가 문제이지, 일단 시작되면 치명적이다. 적절한 조치가 없으면 삼 년을 넘기기 어렵다.
‘병 자체는 덜 깊은 상태로 태어났겠지. 하지만 발작이 심각하게 일어났어. 아마 몸 상태는 거의 한계겠지.’
김민준이 그녀의 팔을 좀 더 열심히 주물렀다.
‘이러면 조금은 편해지겠지.’
이서연은 김민준이가 자신의 팔을 꽉 눌러 더듬자 깜짝 놀랐다.
힘껏 팔을 당겼다. 빠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더 참지 못하고 경고했다.
“이 손을 놓지 않으면 제가 무례를...”
김민준이 그때서야 이서연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고, 자기의 행동이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때서야 팔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나며 경계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손을 그냥 놔주네?’
변태라면 더 끌어당겨야 하는데, 잘 주무르다가 놓으라고 하니까 깔끔하게 손을 뗐다.
자신의 두 팔로 가슴을 감싸며 물었다.
“저기. 왜 저를 주, 주...”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발작을 일으킨 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 역시 난...”
급히 가방을 열었다. 아트로핀 주사 대신에 알약을 꺼내 입안에 넣고 삼켰다. 심장발작이 일어났을 때 먹는 약이다. 이 약 역시 효과가 있을지 자신하지 못하지만, 예방조치삼아 먹었다.
약을 먹고 나서야 자기 몸 상태를 깨달았다.
“그런데 왜 몸이...”
아프지 않았다. 맥박도 정상이다.
‘생각보다 발작이 안심했었나? 그냥 심하다고 착각한 건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여전히 김민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김민준은 사실대로 말해줄 수는 없다. 그는 아직 누가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 실험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병은 자신과는 반대 위치에 있지만, 체질과 신경계통의 문제인 건 같다.
‘그들이 이 아가씨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있을지 모르니 미리 조심하자.’
적당히 둘러댔다.
“제가 지압을 좀 합니다.”
지압은 지압이다. 일반적인 지압과는 차원이 다르다. 급소를 찌르면 신경의 신호전달을 차단해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거나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지압이다.
“지, 지압요?”
“지압을 해드렸더니 좀 나아지시더군요.”
“하지만 저를 주물...”
더 말을 못하고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제 지압이 좀 거칩니다. 그냥 놔두면 멍이 듭니다. 멍들지 말라고 주물렀습니다.”
“아!”
그녀가 자기 팔을 보았다. 동그란 멍자국들이 여러 개 나 있다. 김민준은 열심히 주무르던 곳은 자국이 옅었다.
그녀는 자기가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했다. 배꼽인사를 했다.
“죄송해요.”
김민준은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죄송하죠?”
그녀는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변태로 오해했다는 말을...’
그녀의 눈에 쓰러진 양아치들이 보였다.
“싸, 싸우시게 해서...”
거짓말을 하려고 하니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김민준이 자기가 사냥해놓은 네 놈을 보았다.
“제가 원해서 한 겁니다.”
돈을 벌려고 한 거다.
그녀 입장에서는 그렇게 안 들린다.
‘요즘 세상에 남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분은 많지 않다던데...’
법의 한계다. 법이 무서워서 힘을 가지고도 돕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법적으로 김민준은 가해자다.
김민준이 쓰러진 양아치들의 뒷주머니를 힐끗 보았다. 두툼해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에 어서 전리품을 회수해야 하는데, 그녀가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한다.
그렇다고 그녀를 그냥 버려두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
그녀의 병은, 오직 그만이 고칠 수 있다.
그녀가 머뭇거렸다. 아까 하려다 다 하지 못한 말을 조금 바꿔서 다시 했다.
“사, 사례를 하고 싶은데요.”
사례는 감사의 표시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김민준의 순수한 호의를 모욕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그래서 말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김민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사례? 돈이라도 주나?’
잠깐 혹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불쌍한 아가씨에게 내가 무슨...’
자신도 정 반대되는 병으로 죽을 고생을 했고, 실제로 죽을 뻔 한 위기를 여러 번 겪었다. 비슷한 종류의 병을 앓는 그녀를 보자 불쌍해졌다. 불쌍한 사람에게 돈까지 받고 싶지는 않았다.
돈은 받고 싶지 않지만,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한다. 그가 개입하지 않으면 그녀는 죽는다.
김민준이 그녀에게 제안했다.
“지금은 좀 그러니까, 우리 내일 다시 만나죠.”
그녀의 몸 상태는 아까보다 나아졌다. 이제 며칠 정도는 발작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내일요?”
“이 공원에서 또 만나는 건 그렇고.”
여기는 이제 사건 현장이다.
“제가 이 동네 지리를 잘 모릅니다. 이 공원 같은 분위기의 장소가 좋겠습니다.”
그는 그녀가 기감에 예민해서 여기를 골랐다고 판단했다. 그런 그녀가 이 공원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 필요하다.
“아. 그러면, 저쪽 산 올라가는 길에 사람들이 운동하는 데가 있어요.”
그 산은 안 된다. 아까 퍽치기 오동태를 때려잡은 곳이 그 산으로 가는 중간이다.
“산은 좀 그렇군요.”
“그럼 저쪽으로 가면 조그만 공원이 하나 있는데 거기라도... 거기 공기가 여기보다 더 상쾌하거든요.”
김민준은 만족했다.
‘여기보다 명당이 있군.’
“거기가 좋겠습니다.”
약속까지 잡았으니 이제 그녀를 보내야 한다.
“그럼 내일 정오에 거기서 보기로 하지요. 가세요.”
이서연이 머뭇거렸다.
김민준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왜 안 가는 거야? 또 뭘 어쩌자고?’
그녀가 겨우 용기를 내서 물었다.
“저기... 전화번호라도...”
전화가 있을 리가 없다.
김민준이 망설이는 그녀를 등을 떠밀었다.
“내일 시간 맞춰 나오십쇼.”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 김민준이 손을 비볐다.
“어디. 이 사냥감들이 돈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볼까?”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특별히 신경 쓰며 뒷주머니의 지갑을 꺼냈다.
“호오. 오만삼천 원. 괜찮군. 이놈은... 삼만칠천 원. 조금 적은데? 이놈은... 개털이네.”
개털은 발로 한 번 더 걷어찼다.
마지막 양아치인 도상태의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열자 파란 돈이 보였다.
“만 원, 이만 원, 삼만 원, 하얀 가루. 응? 하얀 가루?”
하얀 가루가 든 얇은 비닐 봉투가 나왔다.
“비닐봉지에 감기약을 넣어 다니는 건 아니겠지. 이놈들 하는 꼬라지를 보면, 마약인가?”
김민준은 지식으로는 마약에 대해 안다. 만드는 방법도 대충은 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김민준이 비닐봉투를 살짝 열어 내용물의 냄새를 맡았다.
김민준은 햄버거 반 조각의 빵에서만 일곱 가지의 맛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다.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혀만이 아니라 코의 감각도 탁월해야 한다.
김민준의 감각은 신경강화실험과 고대서적 수련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평소에도 냄새를 맡는 능력이 일반인보다 월등하다.
본격적으로 감각을 활성화시키면 측정 범위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김민준 후각을 활성화했다. 그의 후각세포가 냄새 분자들을 본격적으로 잡아냈다.
마약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다. 그 불순물들이 독특한 냄새를 만들었다.
“이게 마약 냄새군.”
냄새만으로 충분하다. 혀를 대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혀가 닿으면 마약이 몸에 흡수된다.
마약에 대해 경험을 추가하고 싶어서 냄새를 맡았을 뿐, 직접 먹는 건 사양이다.
“이놈들을 그냥 놔주기 서운했는데 잘 됐다.”
도상태의 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이 나왔다.
스마트폰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품 사용법이 적힌 종이나 책을 버린다. 그런 것이 로키산맥의 쓰레기장까지 흘러들어온다.
이 스마트폰은 그가 사용법을 읽어본 것보다 신형이다. 그래도 전화를 거는 법은 비슷하다.
김민준이 112를 눌렀다. 동시에 스피커폰을 켰다.
* * *
파출소는 소규모 인원으로 돌아간다.
규모가 작은 곳에서 한 명이 오래 자리를 비우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업무량이 늘어난다.
강정진은 붙잡는 강력1팀 형사들을 뿌리치고 파출소로 복귀했다. 파출소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나오는 신참 순경 고지산과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현장은?”
“인계 확실하게 하고 왔습니다.”
“그래? 오늘 험한 꼴 봤는데 조금 쉬어라.”
“아닙니다. 공원 쪽에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가봐야 합니다.”
“그럼 타라. 운전은 내가 할 테니까.”
강정진이 공원에서 발견한 건 여기저기가 부러져 있는 양아치들이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119에도 신고 들어갔는지 확인해.”
신참 순경 고지산은 오늘 벌써 두 번째로 이런 모습을 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가 강정진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조금 차렸다. 급히 무전기를 눌렀다.
“예, 옛!”
“의식불명의 피해자가 넷이다. 구급차 숫자 맞춰서 보내라고 해.”
“옛!”
고지산이 무전을 하는 동안 강정진은 주변을 살폈다.
“여기도 CCTV가 없군.”
오동태를 발견한 곳도 CCTV가 없었다.
강정진이 양아치들에게 랜턴을 비추었다.
“일단 겉보기에는 중상은... 넷 전부 다군. 응?”
양아치 도상태의 몸 위에서 아주 작은 하얀 비닐봉투를 발견했다. 강정진이 자세를 낮추고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보기만 해도 정체가 짐작이 갔다.
“뽕이군.”
대한민국은 마약이 그나마 덜 퍼진 나라다. 마약이 나오는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적어도 같은 날 밤에 같은 동네에서 마약 사건이 두 번이나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강정진이 턱이 부러진 양아치의 팔을 살짝 걷어보았다. 랜턴을 비추자 투약 흔적이 여러 개 보였다.
“이놈들이 다 약쟁이라는 이야긴데...”
이 정도 근거만으로도 긴급체포 요건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강정진은 주변을 더 살폈다.
굴러다니는 지갑 네 개가 눈에 들어왔다. 렌턴으로 지갑의 옆을 비추었다.
돈이 보이지 않았다.
“지갑은 비어 있고. 이놈들은 뼈가 부러져 있고. 마약도 나오고.”
팔다리가 다 부러진 오동태가 떠올랐다. 오동태의 지갑도 비어 있었다. 점퍼에서는 대량의 마약이 나왔다.
“우연일 리가 없겠지.”
순경이 무전을 끝내고 숨을 몰아쉬며 보고했다.
“허억. 헉. 119에는 신고가 안 들어갔나 봅니다.”
강정진이 자기 휴대폰을 꺼냈다.
순경이 말렸다.
“제가 무전으로 상황 설명 다 했습니다.”
“다른 데 거는 거야.”
강정진이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에서 강력1팀장 안상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정진아. 여기 상황이 궁금하냐? 하하하. 네 덕에 우리 다 지금 엄청 바쁘게...
“팀장님. 아직 덜 바쁘신 겁니다.”
- 응?
“한 번 더 오셔야겠습니다.”
* * *
김민준은 양아치 넷을 털어 이십만 원쯤을 확보했다. 거기다 오동태를 턴 돈 중에 순댓국을 먹고 남은 구만오천 원을 더했다.
“돈이 삼십만 원이나 되니까, 부귀영화 좀 누려보자.”
김민준은 망설이지도 않고 눈앞에서 휘황찬란한 조명을 자랑하는 모텔로 들어갔다.
곧바로 나왔다.
“어떻게 오 만원씩이나 하냐.”
조금 걸어가서 좀 작고 덜 화려한 모텔에 들어갔다. 거기는 삼만 원이었다.
여전히 비쌌지만, 눈 딱 감고 지불했다.
김민준이 모텔 방문을 열었다.
한 평도 채 되지 않을 공간과 화장실, 그리고 안쪽 문이 보였다.
“설마 저 안도 요만한 건 아니겠지?”
쓰레기장에서 얻은 지식 덕분에 열쇠를 벽에 꽂아야 전기가 들어온다는 건 안다. 불을 켜고 안쪽 문을 열었다.
방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우와아! 침대다!”
연구소에서 인체 실험을 당할 때는 병원용 침대를 이용했었다. 그러다가 로키 산맥으로 이동한 후로는 침대는 꿈도 꾸지 못했다.
김민준이 침대 위에 몸을 날렸다.
“으하아. 침대라는 건 상상한 그대로 쿠션이 참 좋구나.”
신이 나서 침대를 구르던 김민준의 눈에,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들어왔다.
“혹시 인터넷이 될까?”
단 한 번도 인터넷을 해 본 적이 없다. 로키 산맥에는 인터넷 선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게 정보의 바다라는데...”
김민준이 침대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은 한 적이 없지만, 컴퓨터는 쓸 줄 안다. 그가 쓰던 컴퓨터는 로키산맥의 쓰레기장에 버려진 장비들에서 멀쩡한 부품들을 뽑아 만들었다.
“여기 뭐가 들어 있는지 한번 볼까?”
* * *
강력팀장 안상준은 세 번째 앰뷸런스가 양아치를 싣고 있을 때 공원에 도착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양아치들을 보며 강정진에게 물었다.
“네 말은, 이 사건의 범인이 병원에 있는 그놈 때하고 같다는 거지?”
“골절, 마약. 빈 지갑. 이 상황을 보고도 우연이라고 그냥 넘기면 경찰 하지 말아야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마약을 노린 놈이 지갑까지 털어 갔단 말이야. 단순 강도로 위장하고 싶었나?”
“우리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역시 그렇지? 피해자의 지갑이 비면 단순 강도 쪽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하니까. 그만큼 우리 수사력을 분산시키겠다는 거군. 나 이거 참.”
안상준이 피식거렸다.
“범인이 경찰을 너무 우습게 봤어. 초짜 아냐?”
“아닙니다.”
“응? 아니야? 어떻게 확신해?”
“아까는 대량의 마약을 가진 놈을 치고, 지금은 그 마약을 소비하는 놈들을 쳤습니다. 초짜가 어디서 고급 정보를 얻었겠습니까? 게다가 이놈들은 넷인데도 당했습니다.”
“하긴. 초짜가 아니라 거물이겠군. 게다가 넷이나 당했으니 범인은 한 놈이 아니겠지?”
“한 놈입니다.”
“뭐?”
“병원의 그놈이나 이놈들 다 비슷한 종류의 부상을 당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한 놈이 한 짓 같습니다.”
* * *
김민준이 바탕화면에 있는 동영상 파일에 먼저 마우스 포인터를 올렸다.
“이건 뭐지? 다큐멘터리인가?”
로키산맥 쓰레기장에서 주운 우주 다큐멘터리 DVD를 떠올렸다. 그런 걸 기대하며 클릭했다.
곧바로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이 실행되며 화면을 살색으로 가득 채웠다. 여자의 야릇한 신음소리가 스피커로 나왔다.
김민준은 그 화면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어? 어? 어?”
그가 로키산맥의 쓰레기장에서 구한 데이터 중에 야한 책과 사진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야한 동영상은 없었다.
그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동영상을 본 적이 없다.
화면에서 눈이 떼어지지가 않았다.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어, 어, 어...”
말을 잇지 못했다. 삼십 분 동안 숨을 죽은 채 야한 동영상에 집중했다.
마침내 야동이 끝나자, 김민준이 그때서야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와아. 이게 바로 그... 야구동영상이구나.”
* * *
강력팀장 안상준이 한손으로 턱을 만지며 말했다.
“이게 다 한 놈이 한 짓이라면, 범인은 보통 놈이 아니라는 말인데... 내 느낌으로는 살인청부업자인 것 같다. 네 생각은 어때?”
“청부업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강정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놈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다음 목표물을 찾고 있을 겁니다.”
* * *
“다음 야구동영상이 어딘가에...”
김민준의 손이 마우스와 키보드 위를 날았다.
독학으로 쌓은 컴퓨터 기술을 동원할 것도 없었다. 검색 한 번에 컴퓨터 안에 들어 있는 동영상 파일의 목록이 주르륵 올라왔다.
“이, 이렇게나 많이...”
오늘은 그에게 신세계가 자주 열렸다.
김민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돈을 많이 주고 모텔에 온 보람이 있구나.”
곧바로 다음 동영상 파일을 클릭했다. 숨이 턱 막혔다.
“헉!”
이번 건 살색이 더 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