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강력팀장 안상준이 무안해져서 말을 돌렸다.
“맞다. 마약팀이 알기 전에 정보나 좀 확보해야지.”
안상준이 오동태를 치료하는 응급실 당직 의사에게 다가갔다.
“언제 신문할 수 있습니까?”
의사가 질린 얼굴로 반문했다.
“신문이요? 지금 환자 상태를 보고도 신문할 생각이 드십니까?”
“생명에 지장은 없다면서요?”
김민준은 오동태의 생명은 건드리지 않았다.
“생명만 지장이 없지요. 말 그대로 죽이지만 않았단 마립니다. 이 환자 이거 두 팔 다 제대로 못 쓸지도 모르겠네. 하여간 오늘은 신문 못합니다.”
아무리 경찰이라고 해도 의사가 안 된다고 하는 환자를 억지로 신문할 수는 없다. 잘못하면 시말서감이다.
“뭐, 그렇다면야...”
안상준이 수갑을 꺼냈다.
“도망 못 치게 침대에 묶어놔야겠네.”
의사가 손을 내밀어 막았다.
“이 환자가 이런 몸으로 어디를 갈 수 있다고 수갑을 채웁니까? 지금 환자에게 수갑 채우면 경찰청 홈페이지에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안상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그도 사양이다. 하지만 오동태를 그냥 방치하고 싶지도 않다.
‘나 없을 때 마약팀이 와서 다른 병원으로 업어 가면 닭 쫓던 개 되는 건데.’
“거. 참.”
안상준이 난처해하는 걸 보고, 강정진이 끼어들었다. 의사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말했다.
“마약 사건입니다.”
의사가 멈칫했다.
“아무리 마약이라고 해도...”
“저놈이 가지고 있던 히로뽕이 얼만지 아십니까? 최소한 만 명 이상이 투약할 분량입니다. 그걸 저놈 혼자 만들었겠습니까? 재료 공급한 놈, 만드는 장소 제공한 놈, 만든 놈, 파는 놈까지 싹 다 잡아야지요. 그래야 마약이 더 안 퍼지지요. 유일한 단서가 저놈인데, 놓치면 책임질 겁니까?”
책임지기 싫어하는 건 일부 공무원만이 아니다.
의사가 실수를 하면 환자는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남의 생명을 다룬다는 부담은 대단히 크다. 그래서 어떤 의사는 책임을 지라는 말을 대단히 싫어한다.
뒷일이 부담스러워진 의사가 한 발 물러났다.
“그, 그럼 왼쪽 발목에다 하십시오.”
안상준이 끼어들었다.
“왜 하필 왼쪽 발목입니까?”
“보면 모릅니까? 팔다리 중에 안 부러진 데는 거기밖에 없잖습니까?”
* * *
김민준이 뚝배기를 들어 마지막 국물까지 싹 비웠다.
“아. 정말 맛있다.”
탁현경은 뿌듯했다.
“맛있죠? 우리집 순댓국은 특별한 비법이 들어가거든요.”
그 비법 덕분에, 커다란 순댓국 전문점이 길 건너편에 있는데도 장사가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맛있구나.”
김민준은 기억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음식은 이제 겨우 두 번째 먹어본다. 실험실에서 먹던 요상한 것들은 영양은 있지만 맛은 더럽게 없었다.
인체 실험과 수련을 거치면서 예민해진 감각기관들은 그가 먹는 음식의 맛을 종류별로 구분했다.
요리에 대한 지식은 책에서 얻었다. 그런데 경험이 모자라다. 경험과 지식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어떤 재료가 어떻게 바뀌어 이런 맛이 되는지를, 아직은 모른다.
그래도 이 순대국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맛이 나는 걸 먹어본 적이 있다.
김민준이 식탁에 곁들여 나온 새우젓을 가리켰다. 새우젓을 순댓국에 넣어야 한다는 걸 몰라서 다른 반찬처럼 젓가락으로 따로 집어먹었었다.
“여기 이 맛하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맛이 났는데, 그게 맛을 아주 확 살려주네요. 비법에 새우를 쓰나 보죠?”
탁현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떻게 알았지?’
새우가 이 집 맛의 핵심이다. 큰 새우를 사다가, 몇 가지 다른 재료와 함께 할아버지 때부터 쓴 방법으로 발효시킨다. 그 양념에서는 새우 맛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순댓국의 감칠맛을 확실히 살려준다.
‘길 건너 집에서 보낸 스파이?’
그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털어버렸다.
‘스파이라면 이런 말을 해줄 이유가 없잖아.’
다른 이유를 찾았다.
‘우리 집 양념 비법이 반쪽짜리라서 그런가? 아빠에게 남들이 눈치 못 채게 신경 좀 더 써서 만드시라고 해야겠다.’
“새우 안 들어가요.”
놀라기는 했지만, 맞장구를 쳐줄 수는 없다. 양념의 핵심이 큰 새우라는 건 비밀이다.
부정해봤지만, 이미 표정에 다 드러났다.
어차피 김민준은 남의 가게 요리 비법에는 관심이 없다.
김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현경이 김민준을 빨리 내보내려고 얼른 계산대로 달려갔다.
김민준이 돈을 내며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탁현경이 예민해졌다. 김민준이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제 이름은 왜요?”
김민준이 빙긋 웃었다.
“신세를 졌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갚으려고요.”
“네? 무슨 신세...”
“서비스 공깃밥.”
숲에서는 누구도 그에게 그런 것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 공깃밤에 담긴 마음이 고마웠다.
그가 받은 두 번째 순수한 호의다.
“아. 그거요?”
탁현경은 납득하지 못했다.
‘이 사람 혹시 나한테 관심이 있나? 하여간 엄마는 왜 날 이렇게 예쁘게 낳아주셔서... 근데 참 변명이 궁색하네. 아무리 핑계가 없어도, 어떻게 공깃밥 하나를 가지고 신세를 갚는다고 해?’
한 번 튕겨보았다.
“제 이름은요. 그냥은 안 가르쳐줄 거예요.”
“아. 네.”
김민준이 식당을 나가려고 했다.
이번에는 탁현경이 당황했다.
“자, 잠시만요!”
이름을 가르쳐 주려나 하고 돌아보았다.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쪽으로 뛰어가서 낡은 점퍼를 하나 가져왔다.
“저. 이거... 준다고 했으니까 주는 거예요.”
낡았지만 따뜻한 점퍼를 입고 가게를 나왔다. 이미 밤이 깊어 사람들의 통행이 많지 않았다.
“배부르니 좋네. 이제 잠잘 곳을 골라야 하는데...”
십만 원 중에 순댓국 값으로 오천 원을 썼다.
“남은 돈은 구만오천 원. 돈이 생겼으니까 잠은 제대로 된 곳에서 자자.”
지식을 떠올렸다.
“호텔. 모텔. 여관. 여인숙. 찜질방...”
가격이 얼마나 할지는 모른다. 그가 가진 지식은 시간이 제법 지난 것이다.
“삼겹살 가격 오른 걸로 추정하면, 다른 것도 다 올랐겠지. 그럼 찜질방이라는 데로...”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김민준소리 나는 방향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혹시 그 퍽치기를 때려잡은 걸 들켰나? 지문까지 다 지웠는데 어디서 실수를 했지? 가만? 내 지문이 경찰 정보망에 등록돼 있기는 한가?’
사이렌을 울리는 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자 저 멀리서 경찰차 한대가 나타났다.
김민준이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경찰차는 속도도 줄이지 않고 그의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내가 목표가 아니네.”
그의 시선이 달리는 경찰차를 따라가다가, 중간에 멈추었다.
길 건너편 골목 안쪽 어두운 곳에서 남자 두 명이 보였다.
보통사람에게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두운 골목이다. 하지만 김민준의 눈에는 두 남자가 움찔하다가 안심하는 몸짓과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왜 경찰차를 보고 긴장할까? 죄를 졌나? 아니면... 죄를 지을 계획인가?”
의심이 들었다.
김민준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돈이 잡혔다.
함부로 쓰기에는 모자란 액수다.
“돈만 넉넉하면, 모텔이라는 데서 잘 수 있어. 거긴 텔레비전도 있고, 인터넷이란 것도 되고...”
돈이 더 필요하다.
“퍽치기 강도 한 놈이 십 만원. 저놈들은 둘. 따블. 무슨 짓을 할 건지 좀 지켜보자.”
두 남자에게서, 어쩐지 돈 냄새가 나는 기분이다.
* * *
쌍칼 조덕구는 단검을 잘 다룬다. 두 자루 단검을 자신의 손처럼 다룬다.
조덕구의 칼솜씨는 실전에서 단련되었다. 그는 칼로 사람을 찔러본 경험이 많다. 사람을 찌를 때 망설이지 않는다. 첫 살인도 망설임 없이 해냈다.
적을 진심으로 죽이려는 사람과 적당히 제압하려는 사람이 싸우면, 서로의 실력이 비슷할 때는 당연히 전자가 승산이 높다.
그는 자신의 칼솜씨와 잔인한 성격을 바탕으로 삼고, 거기에 행운과 모략을 더해 쌍칼파의 두목이 되었다.
조덕구가 쇼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양 옆에 있던 아가씨들에게 손짓을 했다.
“니들 나가 있어.”
룸살롱의 아가씨들이 안 좋은 분위기를 눈치 채고 조용히 문 밖으로 사라졌다.
여자들이 나가자마자 조덕구가 탁자에 놓인 유릴 재떨이를 잡더니 부두목 이성진에게 집어던졌다.
“이 새끼야! 뭘 잘했다고 뻣뻣하게 서 있어!”
“컥!”
부두목 이성진의 머리가 뒤로 휙 젖혀졌다. 충격을 못 이기고 뒤로 넘어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성진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성진이 그 상태로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날라버린 배달부가 누구라고?”
“오동태라는 새끼입니다. 형님.”
“오동태 쓰자고 한 새끼 누구냐?”
한쪽에 있던 중간간부 박태수가 움찔하더니 허리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
“그 새끼한테 배달시킨 약이 우리가 가진 거 전부인 거 너도 알지?”
“아, 압니다. 형님.”
“그런 중요한 일을 왜 그 새끼에게 시켰어?”
“사실 동태 그 새끼는 눈치가 둔합니다. 그래서 배달부로 쓰기 좋겠다 싶어서 추천한 건데...”
“눈치가 둔해? 눈치가 둔한 새끼가 자기한테 입혀준 옷에 약이 든 걸 알아내? 그게 둔한 거야?”
“그게 저도 잘 이해가...”
박태수가 허리를 더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조덕구가 손짓을 했다.
“됐다. 고개 들어.”
그 말에 박태수는 마음을 조금 놓으며 허리를 폈다.
“아. 예. 감사...”
쌍칼 조덕구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대로 탁자 위를 달려 막 몸을 일으키는 박태수의 팔에 단검을 푹 꽂았다.
“고개를 들어야 칼침 놓기 좋잖아. 이 개새끼야!”
“으아악!”
비명을 지르는 박태수를 발로 걷어찼다. 박태수가 피를 뿌리며 바닥에 나자빠졌다.
조덕구가 피묻은 단검을 칼집에 넣고 씩씩댔다.
“오동태라는 새끼 당장 잡아와! 잡아서 내 약부터 찾아내!”
조덕구가 룸을 나가자, 다른 조폭이 술병을 싸던 수건으로 부두목 이성진의 피가 흐르는 이마를 눌렀다.
“병원부터 가셔야겠습니다. 형님.”
“쪽팔리게 조금 째진 걸로 병원은. 약이랑 붕대나 가져와.”
이성진이 구석에 처박힌 박태수에게 말했다.
“태수야. 넌 응급실 있는 큰 병원으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