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랜만이라고 하기도 무안할 정도로 오랜만이다.
꼭 해보고 싶었던 말이라 도착 후 첫 마디로 터트렸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은 남은 게 별로 없다.
“아마 이십 년은 넘었을 거야.”
어린 시절의 기억은 실험의 부작용으로 인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나마 떠오르는 기억조차, 너무 어릴 때의 것이라 쓸 만한 게 별로 없다.
심지어, 그가 서울에서 살았는지조차 자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민준은 두 팔을 벌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흐으음. 역시 서울 공기는...”
나라의 수도에 흐르는 기운을 감각으로 느끼고 몸으로 받아들였다.
받아들인 기운을 분석하고, 간단히 평가했다.
“탁하네. 엄청 탁해. 로키산맥하고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탁해. 예상보다 더 탁해.”
대도시의 공기가 탁하다는 건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느낀 건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는 지금이 처음이다. 심지어 미국을 떠날 때에도 서류 확보를 위해 소도시를 들른 게 고작이다. 대도시는 발도 들여 보지 않고 곧바로 국제공항으로 이동했었다.
김민준이 바지 건빵주머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동그랗게 뭉쳐진 선식이 하나 들어 있었다.
여러 가지 나무 잎파리와 약초들, 거기다 로키산맥에서 나는 산삼까지 섞어 만든 선식이다.
“산삼은 국산이 최고인데, 돌아왔으니까 구할 수...는 없겠지. 자료에 의하면 여기서는 엄청 귀하다니까.”
로키산맥에서 자생하는 산삼은 국산에 비해 약효가 떨어진다. 대신에 구하기 쉽다. 꿩 대신 쓸 닭만큼은 된다. 그래서 김민준은 선식을 만들 때 미제 산삼을 아낌없이 썼다.
“마지막 선식은 꼭 여기서 먹고 싶었다고.”
선식은 그가 살아남게 만들어준 것 중 하나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도 안 먹고 꾹 참았다.
김민준이 골프공만한 크기의 선식을 입에 넣었다. 씹었다. 이십 년 동안 선식만 먹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맛이 심각하게 나빴다.
어쩔 수 없다.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다른 건 먹을 수 없었다.
매일 먹으면 쓰고 떫은맛에 익숙해진다. 그래도 그 맛 자체를 못 느끼게 되지는 않는다. 김민준처럼 체질이 특별하게 변한 사람은 그 형편없는 맛을 더 잘 느낀다.
김민준이 서울역 앞에 서서 마지막 선식 한 알을 꾸역꾸역 씹어 먹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 많다. 정말 많다.”
서울에 사람이 많다는 것도 지식으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느끼는 것과 지식으로 아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상상만 하던 것을 현실로 보게 되면, 감동하거나 실망하거나 놀라거나 이해하거나 만족하거나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김민준은 조금 놀랐다. 서울역 앞을 사람들이 폭우가 내린 후의 강물처럼 큰 흐름을 만들며 지나갔다.
김민준만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도 지나가면서 그를 힐끗 보았다.
특히나,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옷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김민준은 귀가 밝다. 일반인보다 훨씬 밝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밝은 귀에 살짝 들렸다.
“자기야. 미친 사람인가 봐. 불쌍해.”
“쯧쯧쯧.”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김민준이 자기 옷을 보았다.
얇은 반팔에 낡은 청바지 한 벌. 청바지는 진짜로 닳아서 찢어져 있다. 양쪽에 달려 있던 건빵주머니도 왼쪽만 남아 있다.
반팔 옷은 때까지 타 있다.
옷이 얇은 건 그가 앓았던 병 때문이다. 몸에서 나오는 열을 발산하기 좋게 옷을 얇게 입어야 했다.
그는 자기 꼴이 어떻게 보일지 이해했다.
일단 새 옷이 필요하다. 옷을 사려면 돈이 든다.
김민준이 말했다.
“아. 나 돈 없지.”
로키산맥에서 살 때는 돈이 필요 없었다.
그는 그동안 필요한 물자를 직접 만들어 썼다.
로키산맥 한귀퉁이에 꽤 큰 규모의 불법 쓰레기장이 있었다. 그는 가끔 가다 한 번씩 그곳을 방문했다. 거기를 뒤지면 쓸 만한 의복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버려지는 책도 많았다. 동화책에서 전문서적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구할 수 있었다.
그가 사용하던 컴퓨터도 쓰레기장에서 구한 것이다. 버려진 컴퓨터 몇 대에서 멀쩡한 부품들을 모아 재조립했다. 산맥 한복판이라 인터넷은 안 되지만, 버려지는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나 CD 등에서 좋은 자료가 잔뜩 나왔다. 나중에는 DVD나 메모리카드에서 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얻었다.
컴퓨터 구동을 위한 전기는 떠난 사람들이 버리고 간 발전기에서 만들어냈다. 발전기를 구동할 연료로는 짐승의 지방이나 식물을 발효시켜 만든 바이오연료를 사용했다.
마지막 선식을 완전히 삼켰다.
감개가 무량했다.
“이제 정말 끝. 지긋지긋한 병도 끝.”
그는 선천성 질병을 가지고 있었다. 병의 증상으로 신경세포의 온도가 올라간다. 동시에 신경의 반응이 점점 느려지면서 신호 전달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병이 진행되면 심장 발작으로 죽게 된다.
현대 의학계에는 알려진 적이 없는 병이었다. 당연히 치료법도 없었다.
이 지구상에 그 병을 김민준 혼자만 걸린 건 아니다.
그와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큰 부자였던 그 사람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여러 가지 치료법이 제안되었지만, 그의 몸에 실험하는 건 위험했다.
그 부자는 지구 전체를 뒤져 자신과 같은 질병을 앓는 사람을 찾았다. 마침내 어린 김민준을 발견했다.
김민준의 병은 그 부자보다 훨씬 심했다.
그가 부리는 사람들이 돈을 써서 김민준을 미국으로 데려갔다.
김민준이 혼잣말을 했다.
“누가 나를 거기로 데려간 걸까? 나는 누구일까?”
그걸 알고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국적의 의사와 연구원들이 김민준에게 여러 가지 약을 시험했다.
각종 약물 치료와 함께, 신경의 강화가 시도되었다. 온갖 실험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성과가 조금은 있었다. 신경의 강화와 병의 진행이 일부 상쇄되었다. 마치 병의 진행 속도가 느려진 것처럼 보였다.
그 대가로, 수많이 부작용이 발생해 그의 생명을 위협했다.
“그땐 정말 죽을 뻔 했었네. 하루에도 몇 십 번씩 주사를 맞았었는데. 방사선 치료도 많이 받고.”
신경계통에 대한 실험은 뇌에도 영향을 끼쳤다. 부수적인 효과가 몇 가지 생겼지만, 아무도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효과가 있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약물 중독으로 너무 약해진데다가 몸이 병에 잠식된 상태라 그 효과들이 제대로 표가 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건 언어능력이었다. 김민준은 그와 접촉하는 연구원들의 언어를 빠르게 익혀냈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등등을 꽤 유창하게 발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 아이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관심사는 김민준의 재능이 아니라 치료가 가능하냐였다.
그들은 김민준을 연구대상물로 대했다. 오직 그의 신경다발의 온도를 낮추고 병을 치료하는 데만 관심을 집중했다.
수많은 실험을 했지만, 병의 속도를 늦추는 게 한계였다. 그의 몸은 천천히 쇠약해졌다. 계속된 실험이 어린 아이의 몸에 무리를 주었다.
마침내 김민준이 약물 중독으로 죽을 위험에 처했다. 실험을 계속하면 사망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김민준은 그 병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실험체’다. 그런데 그 실험체로 실험을 할 수 없게 됐다.
현대 의학으로 치료 방법이 없을 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분야가 신비주의다. 그 부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다 동원하기를 원했다.
연구원들은 어쩔 수 없이 고대의 신비에 손을 댔다.
동양의 고대 유적지에서 도굴꾼이 훔쳐낸 책 한 권이 연구시설에 있었다.
책의 내용은 연구원들이 보기에는 모조리 헛소리였다. 아무도 그 책의 내용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의 도입부가 문제였다. 거기에 ‘태양절맥’이라는 체질을 구분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책에서 말하는 ‘태양절맥’과 김민준의 증상이 비슷했다. 그래서 그 책이 연구시설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그 책이 나온 유적지가 어디인지 알아내면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데.”
아무도 책의 내용을 믿지 않았지만, 더 이상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연구를 중단하는 건 불가능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믿지 않으면서도, 책에 적힌 방법대로 해 보기로 했다.
그 책에서 요구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지형이 로키산맥 한복판에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김민준은 로키산맥으로 보내졌다.
다양한 국적의 연구원들이 따라와 책에 나온 방법대로 김민준에게 수련을 시켰다. 김민준이 병을 나으면, 이 일을 주도한 부자도 같은 방법을 쓰기로 하고 시작한 일이다.
몇 년이 지나도 성과는 없었다. 그 방법은 결국 효과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자 측에서는 실패로 결론이 나자마자 그동안 추가로 연구된 몇 가지 약물을 그의 몸에 실험했다. 효과는 고사하고 신경세포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 생명이 경각에 달했다.
그들은 그걸 보고 김민준을 포기했다.
김민준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생존 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극심한 고열에 시달리는 걸 보고서, 말 그대로 완벽하게 손을 뗐다.
김민준은 혼자 로키 산맥에 남겨졌다.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던 고열은 며칠 후에 내렸지만,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포기했지만, 그는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가 겨우 열 살쯤 됐을 때였다.
신경계통의 실험의 부수적인 효과로 뇌의 여러 가지 능력이 향상되었다.
실험자들은 관심이 없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부분이지만, 어린 김민준이 숲에서 혼자 살아갈 때 그 능력들을 유용하게 사용했다.
특히, 감이 좋아진 것이 생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고립된 후부터 필요한 식량은 스스로 구했다. 어차피 병을 치료하는 동안은 선식만 먹어야 했다.
책에서는 태양절맥의 경우 완전히 나을 때까지 선식만 먹으라고 요구했었다. 만드는 방법도 상세히 나왔다. 연구원들은 선식을 만드는 재료 전부를 원산지에서 씨앗을 구해다가 거처 근처에 심어 키웠다. 기후와 토양이 달라 원산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자랐지만, 그럭저럭 선식의 재료로 쓸 만 했다.
사람들은 떠났어도 그 밭은 그대로 남았다.
로키산맥 아래의 불법 쓰레기장에는 의외로 의학이나 과학에 관련된 책이나 자료들도 많았다. 병원이나 연구소에서 버린 물건들에 섞여 있었다.
그는 쓰레기장에서 얻은 자료들을 공부하고, 고대 서적을 매일 연구했다.
그동안 받았던 신경 강화 실험이 도움이 되었다. 뇌가 지식들을 빠르게 빨아들였다.
그는 자기 몸을 실험체삼아 매일매일 연구하고 궁리했다.
김민준의 병은 그를 여기 데려온 부자보다 훨씬 심했다. 신경다발의 온도 상승이 더 빨랐다. 그건 그만큼 심장 발작이 오는 날이 빨라진다는 의미다.
김민준에게는 죽을 각오가 아니라, 실패하면 진짜로 죽는 일이다.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지식이 늘고 연구가 거듭되면서, 김민준의 기와 혈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김민준은 고대 유적지에서 나온 책을 연구원들이 처음부터 잘못 이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책의 비밀을 이해한 후, 기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되었다. 자기 몸을 관조하는 방법도 깨달았다.
그리고, 책에 숨겨진 비밀을 수련했다.
그 비밀은 난해하고 위험했다. 일반인이 손댄다면 피를 토하고 죽을 확률이 높았다.
김민준의 몸은 일반인과 달랐다. 각종 인체 실험을 거치면서 강화된 그의 신경다발 덕분에 죽을 위험에서 목숨을 건졌다.
포기하지 않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후에야, 고대 서적에 적힌 비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김민준이 그때 생각을 하며 몸을 떨었다.
“으. 정말 죽을 뻔 했었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추우면 옷을 입던가.”
고대의 신비와 현대 과학의 정수가 융합되자, 그의 병이 조금씩 치료되었다.
그의 신경은 강화되었지만, 그동안은 병에 억눌려 있었다.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병이 치료되는 만큼, 그의 신경망은 본래의 능력을 드러냈다.
반응속도와 신체 움직임의 정밀도 등이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미각, 후각, 촉각, 청각, 시각도 일반인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리고 감이 더 좋아졌다.
한국을 떠나고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후에, 김민준은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치료했다.
병을 치료했으니 그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문명생활이 싫어서 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문명생활을 멀리 했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쓰레기를 뒤지다 귀금속이 나오면 따로 모아두었었다. 산맥 아래 마을에 가서 그걸 팔았다. 그렇게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표, 공항철도 요금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 땡전 한 푼 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