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여기서 꼼짝없이 죽게 생겼네!”
정방형의 지하감옥 안.
창이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좁은 공간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걸을 때마다 쇠사슬이 돌바닥에 부딪쳐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창의 오른쪽 발목을 옭아맨 굵은 사슬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넓은 공간에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인분과 오줌, 그리고 땀냄새와 뒤섞인 피냄새까지...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가만히 좀 있어봐. 무슨 소리 안 들려?”
“흥! 우릴 마중하러 오는 사신의 발자국소리겠지요."
클로이의 타박에 창이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사신은 발이 없어."
딱 잘라 클로이가 말하자 창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더니 이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원망이 서린 눈으로 클로이를 쳐다보았다.
"어이구, 사신도 보신겁니까! 흥, 처음부터 이곳에 와선 안되는 거였는데! 어쩌자고 여기까지 와서는 으!”
그러더니 갑자기 발을 뻗대며 대성통곡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클로이의 얼굴엔 한심한 표정이 역력했다.
창이 항상 불리하거나 힘들때마다 나오는 레파토리였으므로.
무거운 쇳소리가 차랑차랑, 방정맞게 울렸다.
“어머니이!! 아부우지이~~~”
“우는 척은. 잠이나 자둬.”
클로이가 찬바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우는 소리가 뚝 그쳤다.
이내 코를 훌쩍 거리는 소리가 난다.
클로이는 딱딱한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차가운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클로이의 오른쪽 발목에도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미 쿼버(quiver)와 배낭 모두 빼앗겼다.
이내 혀 차는 소리가 나더니 창이 조그만 목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꼭 들으라는 듯이.
“지금 이 상황에 잠이 오겠어? 잠이? 까닥하단 영원히 잠들게 생겼는데... 누님이야 워낙 고래 쇠심줄처럼 무딘 사람이니 모르겠지만 나는 아기토끼보다 예민합니다!”
다시 창의 일장연설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클로이가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죽긴 누가 죽는다니. 내가 죽어도 넌, 오래 살 팔자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수 있죠! 누님이야말로 너무 낙천적이십니다!”
부르르, 성을 내던 창이 뭔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오래 살 팔자면 좋은 거 아닌가?"
“그래그래~ 덕담에 열을 내고 그러니. 한숨 좀 자자.”
클로이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
클로이와 창은 멕시코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 만사니요(Manzanillo)에 도착했다.
모처럼 활짝 갠 하늘에선 따뜻한 볕이 내리쬐고 파도가 잔잔한데다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여유와 풍요로움이 도시 전체에 감돌았다.
하늘 위로 새하얀 갈매기 수십 마리가 비행을 한다.
“거, 희한하네.”
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클로이와 함께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거리는 무척 깨끗했다.
함지박 위로 소금에 절인 각종 해산물과 생선을 가득 쌓아 놓은 작은 어시장을 지나 도시의 중심가로 들어서자 물을 뿜는 화려한 분수대와 색색의 천막을 친 노천카페들이 거리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이어졌다.
다들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와 야외 테라스나 천막아래에서 주스나 포도주 따위를 홀짝이며 잡담을 나누었는데 어느 누구 하나의 얼굴에서도 그늘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리 곳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우체국 앞을 지나치자 골목에서 어린아이들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클로이와 창의 눈길이 마주쳤다.
“별일이네.”
클로이가 이마를 긁적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주위를 둘러볼수록 알 수 없는 이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둘은 광장에서 들어서 제일 가까운 파란색 파라솔 아래로 자리를 잡았다.
맛있는 냄새를 맡자 허기가 졌던 것이다.
때마침 한가한 시간이었다.
얼마 안가 호리호리한 웨이터가 상냥한 미소를 띠우며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해서 다행이네요. 여기 메뉴판입니다.”
“크림맥주 두잔하고 타바스 주세요.“
탁!
창이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주문을 하자 웨이터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얏! 말로 하라구요, 말로!”
“크림맥주랑 레모네이드 한 잔이요.”
클로이가 메뉴판으로 창의 머리를 때리곤 주문을 정정한다.
웨이터는 곧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치이, 나도 한모금만 마셔보고 싶다아-”
“안돼.”
한 치의 고민도 없는 즉답에 창은 마구 볼을 부풀리며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그나저나 여긴 딴 세상같네.”
클로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영감쟁이가 그랬잖아요. 축복받은 곳이라구.”
창은 잔뜩 불만섞인 목소리로 퉁퉁거렸다.
맥주를 못 마시게 해서 골이 난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이는 천천히 주변을 감상했다.
마치 과거를 재연한 영화세트장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인간만이 서로의 적이었던 시대.
세상은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세상의 주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이다.
“누님,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 거 같지 않습니까?”
잠시 엎어져있던 창이 갑자기 가재눈을 뜨고 말했다.
“수상쩍기야 하지. 그런데 그게 뭔지 감이 잘 오질 않는단 말야.”
그때 갑자기 무언가가 클로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냄새.”
“내 몸에서 냄새 난다구요?! 분명 열흘 전에 꼼꼼히 씻었는걸요!”
창이 팔을 들어 제 겨드랑이를 킁킁대더니 곧 볼멘소리를 했다.
“그거 말고. 이 곳 말야. 그 냄새가 안 나.”
클로이는 조금 놀라서 말했다.
말하면서도 지금에야 눈치를 챈 자신의 부주의함에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물러터져선 안된다.
“에이~ 그게 말이 돼요~ 누님!”
창은 무슨 웃긴 농담이라도 되는지 코웃음을 친다.
옆 테이블로 젊은 부부가 다가왔다.
부부는 자리에 앉으며 클로이와 창을 슬쩍 바라보았다.
사실 클로이와 창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방인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해괴한 복장과 눈에 띄는 외모의 클로이나 자기 몸만한 배낭을 둘러맨 꾀죄죄한 행색의 어린 창은 무척 이상해보인다.
한마디로 이들은 어디에서나 눈길을 끄는 이방인인 것이다.
클로이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턱을 괴고 붉은 머리칼을 흔들었다.
세상은 프랑켄버그가 나타나면서 혼란과 불안의 시대를 맞이했다.
프랑켄버그는 처음엔 단순히 유전자변형을 시킨 유익한 곤충(GE)에 불과했다.
전염병과 해충박멸, 무분별한 농약살포 방지를 위한 해결책으로 내놓아진 녀석들은 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더니 마치 페스트처럼 빠르게 퍼져나갔고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을때는 이미 녀석들에게 점령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진정한 프랑켄버그가 된 것이었다.
프랑켄버그가 잠식한 세계는 불안과 공포로 히스테릭한 상태에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클로이는 이곳 사람들의 얼굴에서 일말의 불안함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적잖은 놀라움이 들었다. 또 그만큼 거북함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기분이 오싹할 정도로 평화로움이 감돈다.
더군다나 프랑켄버그의 습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라에서는 의무적으로 각 구역마다 놈들의 분비물과 비슷한 화학 자동분사장치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프랑켄버그의 공격으로부터 피해가는 것이다.
클로이의 감각은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요컨대 사람들이 맡지 못하는 냄새도 맡을 수 있다.
“냄새가 나지 않다니...그럴 수가 있을까.”
“주문하신 크림맥주, 레몬에이드와 타바스 세트나왔습니다.”
클로이가 혼잣말을 내뱉는데 웨이터가 마지막으로 발사믹식초와 올리브오일 곁들인 샐러드를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보는 싱싱한 야채였다.
대부분의 항구도시에서 야채나 채소와 같은 농작물은 구하기 어려울뿐만 아니라 대개 시들어지기 일보직전인데 접시에 소복히 쌓인 샐러드는 한눈에 봐도 무척 싱싱한 상태였다.
“주문한게 아닌데요.”
클로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웨이터가 웃으며 대답했다.
“여행자시죠? 처음 보는 얼굴들이라... 여행자가 저희 도시에 오신 건 무척 오랜만이라 사실 모두 은근히 들떠있거든요. 이건 저희 아름다운 도시에 온 걸 환영하는 의미로 제가 드리는 겁니다.”
“우와! 여기 점점 맘에 든다!”
창은 얼른 포크를 들어 샐러드부터 먹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여긴 참 평화로운 곳이네요.”
클로이가 맥주잔을 집어 들며 즐거운 듯이 말하자 웨이터는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럼요, 요즘 같은 때에 저희 마을같이 살기 좋은 곳도 없을 겁니다! 하하! 마음 놓고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고 이렇게 해산물이며 곡식이며 생필품까지 풍부하니~”
“어머나~ 그것 참 대단해요!”
클로이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두 손을 꼭 잡고 귀엽게 웃자 웨이터는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흠흠, 어여쁜 아가씨는 험난한 시류에 어쩌다 돌아다니게 된 건가요?”
“...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 신전같은.”
클로이가 환한 얼굴로 말하자 잘생긴 웨이터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훑고 지나갔다.
찰나였지만 클로이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클로이와 창이 만사니요에 발을 디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새로운 일감을 받지 못해 작은 시골을 돌아다니던 중, 거리에서 구두를 닦아주는 노파에게서 기묘한 이야기를 들은 게 발단이었다.
*
“여행자라면 만사니요를 한번 가 보시게.”
“만사니요라면 무역으로 유명했던 도시? 화산폭발 후에 사람들이 살기 각박해지지 않았나요?”
창이 얼른 코 밑을 문지르며 아는 체를 했다.
“지금은 아니네. 만사니요는 그들이 모시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네."
클로이는 흥미가 느끼며 쳐다보자 노파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믿어온 그들의 신이 축복을 베풀어 그곳만 불행한 사고를 비켜가게 해줬다고들 하지.”
“어떤 신이길래 그렇게 대단하답니까?”
“아니소지코프테라(Anisozygoptera)”
노파는 말하기 두려운 듯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만사니요는 천국이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얼굴은 행복한 천국을 상상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뭔가 감춘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누님 아니소지코? 암튼 그게 뭔지 알아요?”
구두닦이 노파에게서 멀어지자 창이 얼른 물어왔다. 노인이 언뜻 기념품샵에서 나오는 커플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소지코프테라.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훨씬 전 태초부터 존재했다던 거대잠자리야."
"거대잠자리라니! 근데 누님이 어떻게 알아요?"
"예전에 교양수업에서 각 국의 토속신앙을 배운 적이 있거든. 그냥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화석도 존재한다더군.”
“우와! 그게 언젠적인데! 우리 누님, 대빵 똑똑하다. 근데 왜 하필 벌레야. 징그럽게."
“곤충토템숭배가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잖아, 고대 이집트의 풍뎅이라든지 아마존의 말벌이라든지 곤충토템흔적은 이미 발견됐으니깐.”
"잠자리를 신으로 모신단 말이에요? 그 잠자리 팔자 한번 좋네!”
“잠자리가 축복을 내린단 말이지.”
클로이가 조금 찝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