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럼…….”
여옥은 방문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차마 이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마마…….’
그가 차분히 미소지어주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문을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방문을 나선 여옥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
우려했던 상황이긴 하나,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일단은 세자마마를 믿는 수밖에 없다.
‘한가로이 걱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생각을 정리한 여옥이 빠르게 안채를 뛰쳐나왔다. 이어 그녀가 향한 곳은 행랑채 뒤쪽 마당에 있는 ‘여옥’의 후문이었다.
“어, 어디 가세요? 방주님!”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금방 올 테니 객들이 오면 알아서들 뫼시고 있거라!”
“바, 방주님!?”
“안채에는 누구도 일절 접근하지 말라 전하고!”
“어디 가시냐고요!”
그러나 이미 문밖을 벗어난 듯,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방주님!”
대상을 소실한 외침이 저 홀로 외로이 허공을 부유했다.
***
“허허, 언제까지 거기 계속 앉아있을 셈이더냐?”
모른 척 가만 앉아 있으려 했으나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던 모양이다.
이안은 재빨리 당황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죄송해요. 아직 익숙지 않아 그만…….”
“허허, 아직 미화가 아니더냐. 모를 수 있지. 하나, 하나 배워 가면 그만이다. 어서 이쪽으로 오도록 하거라.”
이안의 말에 이상환이 헤벌쭉 웃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여옥이 있을 때완 비교가 될 정도로 말이 많은 모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은 살짝 당황했다. 마땅히 앉을 자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상한데?’
홍월에게 배운 대로라면 자신은 이상환의 좌측에 앉아야 했다. 그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데다, 자신의 상급자인 여옥이 이미 방을 나간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누군가가 들어올 거라곤 들었으나 그게 누군지는 확실치 않았기에, 당장은 그의 옆에 앉는 게 맞았다.
다만 문제는,
‘왜, 왜…… 안 움직이지?’
그제까지 이상환의 좌측에 앉아있던 중년인이(이안에게 앉을 자리를 내어줄) 딱 버티고 앉은 채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안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대로라면(홍월의 말에 따르면) 옆으로 비키든, 왼쪽으로 더 당겨 앉든 그는 이미 이안이 앉을 공간을 마련해뒀어야 했다. 그것이 통상적인 관례였기 때문이다.
‘뭐야…… 그럼 저 이상환이란 자가 우두머리 격이 아니라는 건가?’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엔 상황이 꽤나 미묘했다. 분명 그즈음 이상환은 명백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이안만큼이나 좌측 중년인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던 것이리라.
‘그럼 다른 사람들은?’
이안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읽어낸 것은 그야말로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서, 설마…… 아무도 나를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고?’
어느 누구하나 이안을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들 미동조차 않은 채 이안의 움직임만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 눈동자 속엔 기묘한 기대심리마저 들어있었다. 그래, 마치 자신을 선택해주었으면 하는. ‘양보’라는 표현은 순화된 것에 가깝다. 실은 모두가 그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기 위해 ‘탐내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리라.
또한,
“어서 오지 않고 뭣하고 있느냐?”
“그래, 그래. 이리로 오거라.”
심지어는,
“이쪽에 한 번 앉아보겠느냐?”
직접적으로 권유까지 해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나더러 선택을 하라는 거야?’
이는 아마 저들이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심지어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는)미화라 생각했기에 나올 수 있는 태도였겠지만, 그럼에도 이상환을 그리 의식하지 않는 듯한 행동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저들 중 오직 이상환만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적잖이 당혹스러워 하는 듯했다.
“아니, 자네들 지금 이게 뭣 하는……! 허허 이것 참…….”
더욱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진 그가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음에도,
“왜, 어떤가? 저 아이더러 앉을 자리를 선택해보라고 하는 것이?”
“그럼, 그게 맞지. 가장 마음에 드는 이 옆에 앉도록 하는 걸세.”
“너는 어떻겠느냐? 청화야, 이 중에서 누가 가장 너의 마음에 드느냐?”
아예 작정들 한 듯, 한 술 더 뜨는 것이었다.
이안은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을 두고 이 늙은 사내들이 ‘경합’을 벌이는 것에 새삼 흥미로움을 느꼈다.
‘일단은…… 조금 헤매는 듯한 모습을 보여 볼까?’
이안은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이 교묘히 결합된 표정을 지어보인 채, 당황한 척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런 그의 모습에 다들 귀여워 죽겠다는 듯,
“허허, 이리 오라해도?”
“껄껄, 뭘 그리 두리번거리고만 있는 게야?”
“얘, 이리로 오려무나. 안 잡아먹는다니까?”
껌벅껌벅 넘어가는 게 아닌가.
‘나름…… 재미있는데?’
내친김에 약을 좀 올려볼 요량으로 최대한 공들여 표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만하지, 다들.”
순간 오한이 일 정도로 차가운 음성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이상환이었다.
“이 아이가 겁을 먹으려 하질 않는가.”
분위기는 자기가 잡고 있는 주제에 그러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그리고 이보게들…… 저 아이를 이곳에 부를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이었는지를 잠시 잊은 듯싶은데…….”
무리의 서열을 재확인시키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의 음성은 낮고 조용했으나 그 눈빛만은 꽤나 거칠어서, 마치 ‘건방지게 어딜 넘보느냐’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자신들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는 걸 깨달은 나머지들이,
“허허, 그건 그렇지. 이 서리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저 아이를 볼 수 있었겠나.”
“장난 좀 치려다 괜히 아이에게 부담만 심어준 꼴이 되었군 그래, 허참.”
“청화야, 너는 여기 중앙에 계신 나리의 왼편에 앉으면 된단다.”
깨갱하며 머리를 숙였다.
“……예.”
이안이 이상환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상황은 진정이 되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는 쉬이 살아나질 못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염려한 탓에 기생의 앉는 자리가 관례처럼 정해졌던 것이 아닐까. 심지어 그 잠시 동안의 분위기가 어찌나 갑갑했던지 견디다 못한 이안이 먼저,
‘분위기라도 띄워야 하나…… 그래도 방주님이 무조건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그랬는데…… 어쩌지?’
하고 고민했을 정도였다.
때마침 모두의 시선을 의식한 이상환이 그즈음부터 슬그머니 자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한 잔 따라보겠느냐?”
“……예.”
“순배를 돌릴 터이니 자네들도 한 잔씩 채워놓게.”
너흰 알아서들 따르라는 말이었다.
곧이어 모두의 잔에 술이 채워진 걸 확인한 이상환이 이안의 앞으로 술잔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너도…… 한 잔 하겠느냐?”
이안은 드디어 ‘본편’이 시작되었다는 걸 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