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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옆집에 그가 산다
작가 : 유월
작품등록일 : 2019.9.2

뜨거운 사랑도 해 봤다, 가슴 아픈 이별도 해봤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사랑이 두려운 지은아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난다. 뭔가 모르게 자꾸만 끌리는 이도운이라는 남자.
하지만 은아에게는 그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 할 아픈 기억이 있고,
그로 인해 치유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운명이 맺어준 듯이 두 사람의 인연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인연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003. 비가 오는 날
작성일 : 19-09-04 21:17     조회 : 200     추천 : 0     분량 : 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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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

 

 

  “은아 씨는 무슨 일 하세요?”

 

  “윤지랑 같은 곳에서 일해요. 영어 교재 만드는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을 하고 있어요. 영훈 씨는요?”

 

 테이블 양쪽을 오가는 형식적이고 지루한 대화. 은아는 최대한 소개팅남에게 집중하려 애썼다. 애를 써야만 하는 그런 만남은 늘 지친다. 결국, 윤지에게 밀려 나오게 된 소개팅이었지만, 시간 낭비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은아가 접시의 음식을 비우고 포크를 내려놓는 순간 후두둑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한 벽면을 차지하는 창밖엔 이른 봄비가 시원하게 퍼붓는 장면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은아는 끝없이 수다를 떠는 소개팅남에게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비가 쏟아지네요.” 은아가 나긋하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아 뭐라고 하셨죠?” 영훈이 수다를 멈춰가며 물었다.

 

  “아니에요.”

 

 영훈은 무표정한 은아를 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가에 퍼진 미소에 은아는 당황했다. 영훈은 곧 입을 열었다.

 

  “은아 씨도 빗소리 좋아하세요?”

 

  “네, 듣고 있으면 뭔가 좋더라고요.”

 

  “왜 사람들이 빗소리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글쎄요….”

 

 은아는 영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빗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를 들을 때, 부교감신경계의 반응이 증가하는데, 그게 사람의 몸을 치유해주고 진정시켜준대요.”

 

  “그렇구나…. 어쩐지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근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인터넷이죠.” 영훈이 살짝 웃었다. “저도 빗소리를 좋아하거든요. 예전에는 녹음해서 틀어놓기도 했는데, 요즘엔 그런 소리가 몇 시간씩 이어지는 영상도 많더라고요.”

 

 은아는 영훈에게 왠지 친근감을 느꼈다.

 

  “비 오는 날이면 은아 씨가 뭘 하고 있을지 이제 알겠네요.”

 

  “제가 뭘 하고 있는데요?” 은아가 되물었다.

 

  “빗소리를 듣고 계실 것 같나요. 맞죠?”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도운은 썩 내키지 않는 듯한 모습으로 카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별이 몸을 일으켰다. 몸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화려한 다이아몬드 모양의 귀걸이도 흔들렸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와 붉은 입술이 반짝이는 별은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조금도 변해있지 않았다. 도운은 그녀의 앞에 털썩 앉았다.

 

  “오빠, 이게 얼마 만이지?” 별이 붉은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도운은 별 감흥 없는 듯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별은 6개월 동안 매일같이 꿈꿨던 그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봤다.

 

  “오빠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6개월 동안 오빠 생각 많이 났는데…. 시베리아 열차로 횡단하면서, 시드니 야경 보면서, 신주쿠 거리 걸으면서….”

 

  “많이도 돌아다녔네.”

 

  “응. 다니고 싶은 만큼 실컷 다녔어.” 별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래서 그 긴 여행 끝에 내린 결론은 뭔데.”

 

  “내 결론은…….” 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빠랑 결혼하는 거.”

 

 도운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

 

  “엄마 아빠한테 징징대가면서 얻어낸 1년 동안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정말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 내가 정말 좋아하는게 뭘까 고민도 해보고. 근데 사람이란 게 그렇더라고. 새로운 곳에 가면 갈수록 내가 두고 온 것들,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들을 더 떠올리고 그리워하게 되고….”

 

 별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도운을 지그시 쳐다봤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거야.”

 

  “너랑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야.” 도운이 딱 잘라 말했다.

 

  “이미 아버님이랑 우리 부모님이랑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결정 내신 거 알잖아…. 그 암묵적으로 계획된 일을 우리는 실행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버지는 내가 회사 안 들어간다고 한 후부터 나 아들로 생각 안 하셔.”

 

  “그러니까 결혼히 더 절실한 거지. 오빠와 아버님의 관계 회복을 위해.”

 

 도운은 자신감에 넘치는 별을 어이가 없다는 듯 봤다.

 

 별은 평생을 알고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저귀를 차고 있던 모습까지 기억이 날 정도니까. 어렸을 때는 그냥 항상 곁에 있어서 챙겨주고 보살펴줘야 하는 꼬마였다. 초등학교 때는 남자애들한테 괴롭힘도 많이 당해서, 등굣길에 항상 손을 꼭 붙잡고 데리고 다녔다. 언젠 가부터였을까, 그 징징거리던 꼬마가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자기 생각을 또렷하게 표현하게 된 것이. 고등학교 입학 무렵 바로 이 카페에서 별이 좋아한다며, 오랫동안 좋아했다며 자신을 여자로 봐 달라고 그렇게 말했고 둘의 관계는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적어도 도운은 별을 예전처럼 마냥 받아줄 수 없게 되었다.

 

 

 *

 

 

 은아는 하이힐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소개팅이라 예의상 신어 준 높은 하이힐과 원피스가 막상 소개팅이 끝나고 집에 가려니 여간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었다. 특히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그야말로 지옥의 코스였다. 은아는 하이힐 안에 팅팅 부었을 발이 슬슬 걱정되었다.

 

  ‘아무도 없는데 그냥 벗어 버릴까…. 딱 오르막길 오를 때까지만.’

 

 은아는 잠시 망설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골목이다. 천천히 하이힐을 벗어 집어 든 은아는 아스팔트 길을 맨발로 걸었다. 마치 하늘을 날 듯 몸이 가벼워졌다. 비가 내린 후라 땅을 젖어서 흙탕물인 곳도 많았다. 하지만 은아는 발이 더러워지는 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

 

 그때, 막 오르막길에 다다른 도운이 멀리서 은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지저분하게 젖은 땅을 맨발로 걷는 은아. 게다가 안 어울리게 정장 원피스 차림.

 

  ‘저 여잔 볼 때마다 충격이네.’ 그는 생각했다.

 

  “아!!!”

 

 그때, 은아가 바닥으로 풀썩 넘어졌다. 바닥에 있던 뭔가를 밟은 모양이었다. 도운은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갔다.

 

  “괜찮아요??”

 

 은아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나 맨정신이었다. 도운은 그녀의 곁으로 와서 몸을 숙였다. 은아의 발바닥에서는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뭔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모양이었다. 도운은 그 모습이 안쓰럽다 못해 바보 같아 보였다.

 

  “맨발로 걸으니까 당연히 다치죠!” 도운이 약간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황한 은아가 고개를 치켜들어 도운을 쏘아봤다.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데 민망하면서도 그의 말에 화가 난 것이었다.

 

  “제 마음이죠! 제가 신발을 벗고 돌아다니던 홀딱 다 벗고 다니던 무슨 상관이세요? 그냥 가던 길 가지 그래요!?”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질렀다. 술 마시고 민폐 끼쳐서 미안하다고 하던 게 불쑥 떠올랐다. 나 어떤 여자로 보이려나.

 

 몸을 일으킨 도운은 그제야 은아의 손에 들린 하이힐 구두를 발견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불편한 구두를 신어서 그 고생을 해요.”

 

  “소개팅 있었단 말이에요.” 은아는 툴툴거렸다.

 

  “업혀요.” 도운이 등을 보였다.

 

 도운의 넓은 등에 은아는 살짝 놀랐다.

 

  “빨리 업히죠, 누가 보기 전에.”

 

 은아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기대었다.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마워요.” 은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소개팅은 잘 됐어요?” 그가 물었다.

 

  “...별로요. 별로였어요.”

 

 은아는 더 편안히 도운의 등에 기대었다. 그의 등은 따뜻했다.

 

  “도운씨는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친절한 분이네요.”

 

 그녀의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은아씨는 볼 때마다 참 스펙타클합니다.”

 

 그가 말했다.

 은아는 자꾸만 날뛰는 심장이 그에게 들킬까 봐 조금 몸을 뗐다.

 

  “그러다 뒤로 넘어져요.”

 

  “넵...”

 

 다시 몸을 바짝 붙인 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비누처럼 깨끗한 냄새였다.

 

  “여기 잠깐 내릴게요.”

 

 도운은 은아를 오피스텔 옆 벤치에 앉히고는 어디론가 재빨리 갔다. 영문도 모른 채 벤치에 남겨진 은아는 한참을 기다렸다. 잠시 뒤, 도운이 뭔가를 손에 들고 급히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있었다.

 

  “그게 뭐에요? 떡볶이?”

 

  “네?” 도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은아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도운은 은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봉지에 있는 물티슈며 소독약, 밴드를 하나하나 다 꺼냈다.

 

  “제가 약 발라드리는 것 괜찮으세요?” 그가 물었다.

 

  “...네.”

 

 

 은아는 도운에게 발을 내밀었다. 잘 모르는 남자에게 발바닥을 보여주는 일은 상당히 쑥스러운 일이었다. 밑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속눈썹은 정말 길고 예뻤다. 그는 정말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바닥을 소독해주고 밴드를 붙여줬다. 은아는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 자신의 발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만져준 일이 있었던가.

 

 

  “다시 업혀요.”

 

 

 다시 그의 등에 업혀 집으로 올라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다 멈춰서 바라봤다. 아까 버럭 화를 낸 것이 미안하고, 발바닥을 보여준 게 쑥스러웠다.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푹 쉬세요.”

 

 마음이 편해지는 인사말이었다. 은아는 어느덧 긴장이 풀려서 웃었다.

 

  “네, 도운 씨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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