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 벅!!”
선배의 얼굴이 살짝 들렸고, 그 순간 놀라는 선배의 눈이 보였다.
그 눈빛을 보고 선배가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할 생각이라는 것을 느끼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늦기 전에 선배의 살짝 올라간 턱을 향해 다시 한 번 원투로 나갔다.
“쉬 쉭!!”
“척 척!”
하지만 아쉽게도 선배가 가드로 막아냈다.
이번 원투가 들어갔다면 쉽게 끝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지만, 확실히 시합 경험은 무시 못 하는 것 같다.
그래도 분명 충격이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연습해온 10단 콤비네이션을 이어갔다.
“쉬 쉭!”
“슥 슥”
처음 원투는 위빙으로 선배님이 쉽게 피했지만, 다음 순간 이어지는 훅은 예상 못 하셨는지 유효했다.
“슉!”
“퉁!”
빠른 속도만 생각해 휘두른 펀치라 힘이 잘 실리진 않았다.
선배는 콤비네이션은 생각지 못했는지 당황했는지 눈동자가 흔들리며 가드를 더 견고히 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기에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고, 이번에는 펀치 하나하나에 바르게 힘을 실어서 뻗었다.
‘엄청나게 연습했다고. 연습한 결과가 여기서 끝나면 안 되지 선배한테 미안하지만 말이야. 후후’
당연히 모든 기술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과감히 더킹 후 보디블로를 했다.
“슥 슉!” “펑!”
안면 쪽으로만 가드를 굳히고 계시던 선배가 당황하며 가드를 내렸지만 이미 늦었다.
생각지도 못한 보디블로가 작렬하는 것을 시작으로 남아있던 콤비네이션이 이어졌고, 방심한 선배는 결국 회심의 일격으로 낭패를 당한 것이리라.
보디블로는 엄청나게 단련한 선수가 아닌 이상 정통으로 맞고는 서 있지 못한다.
심하면 응급실로 달려가 수술 방으로 직행할 정도니.
“읍!”
보디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훅, 스트레이트, 라이트 크로스, 원투, 마지막으로 레프트 훅이 순식간에 이어졌고.
“퍽! 퍽!퍼버버벅!”
“쿵!”
링이 진동하며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선배님은 대자로 쓰러졌다.
대박!
실전에서도 기술이 통했다.
확실히 열심히 한 대가는 너무 달콤했다.
역시, 매력 있는 운동이다.
내가 만든 기술로 실력 좋은 선배를 다운시켰다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너무나 기뻐 방방 뛰고 싶었지만, 기분을 누르고 누르며 코너로 향했다.
카운트해야 하는 관장님이 너무 조용해서 슬쩍 봤는데..
정말, 체육관에 다니는 동안 볼 수 없었던 역대 최고급 표정을 짓고 정신 나간 듯 멍하게 있는 관장님을 보게 된 것이다.
긴장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터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풋!”
얼마나 놀라셨는지 입이 떡 벌어져서 턱이 빠질 정도고, 눈은 왕방울만 하게 커져서 흘러내릴 기세다.
“관장님 카운트해 주셔야죠.”
관장님은 민망하셨는지, 그제 서야 헛기침을 하시며, 서둘러 정신을 차리시고 카운트를 하시기 시작하셨다.
선배님은 결국 카운트가 끝나도록 일어나지 못하셨고, 한참이나 누운 상태로 끙끙대시면서 목덜미와 보디블로를 당한 곳에 얼음찜질하셨다.
선배가 나를 뚫어지게 보신다.
“야, 인마! 준호야, 너 너무한 거 아니냐? 아이고야, 휴”
한탄하시며 말씀하시는 선배를 보며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미안한 듯 표정을 지으며 핑계 아닌 핑계를 댔다.
“죄송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연습 시합이라고는 해도 최선을 다해야죠. 그리고 저도 선배한테 맞기 싫어서 용쓴 건데,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죠.”
게슴츠레 눈을 뜨며 노려보는 선배님.
“맞기 싫어서 용쓴 건 아닌 것 같은데.
아까 그 눈빛, 나도 아직 시합하면서 그런 눈빛 가진 사람 별로 못 봤는데 말이야~?
현 동양 챔피언도 그 정도는 아닐 건데 말이지
보통 놈이 아니야~ 너! 천재냐?”
선배가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지나가듯 말씀하시곤, 일어서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흠, 됐다. 네 말이 맞아, 최선을 다해야지.
암튼 너 대단하다, 언제 이렇게 늘었데?
관장님 너무 하십니다~ 준호만 예뻐하시고 말이에요.”
그러자 뒤돌아 계시던 관장님의 볼이 떨리며 우리를 바라보셨다.
“흠! 흠! 야, 이놈아, 네가 부족한 걸 누구한테 화풀이냐! 더 정진하거라. 큼! 흠! 흐”
나는 봤다.
지금 관장님이 정색하시기 전까지 뒤돌아서 싱글벙글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볼이 경련하는 것을 말이다.
관장님이 이번 스파링에서 나에 대한 기대치가 엄청나게 올라갔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부담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기대에 어느 정도 보답해 드렸다는 마음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선배는 나와의 스파링으로, 해이해진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더 진지한 마음으로 복싱에 임해야겠다고 한다.
그렇게, 기분 좋은 결과를 얻으며, 운동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나의 기술이 실전에서 통한다는 확신도 섰고.
기분 좋게 샤워실에 들어가 운동복을 벗고 가져온 가방에 차곡차곡 잘 접어 넣은 뒤 샤워기 물을 틀었다.
눈을 감고 뜨거운 물을 맞으니 몸이 나른해진다.
그러길 몇 분. 요즘 보이지 않는 상수 형이 문득 생각났다.
무슨 일이 있는지.
매일같이 와서 운동하던 상수 형을 며칠 동안 보지 못했다.
항상 보던 사람이 없으니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샤워를 끝내고 나와 관장님께 여쭈어보았다.
“관장님 요즘 상수 형이 좀 뜸한 것 같은데,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손사래를 치며 인상을 쓰시는데.
“그놈아 이야기 꺼내지도 마라!”
관장님이 서운하신 지, 애들처럼 저러신다.
관장님에게서 고개를 돌린 후 키득거리며 웃었다.
재밌는 모습에 미소 띤 채로 말했다.
“뭐 일 들어왔데요? 잘 됐으면 좋겠네~”
“왜, 뭐! 콩 꼬물 떨어질까 봐? 아서라 아서~ 넌 운동이나 해 이놈아!”
정색하시며 다그치시는 관장님께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니, 뭘 얻어먹어야 그런 생각 하나요. 그냥 궁금해서~ 후후후”
“몰라! 요즘, 어떤 놈이 준비하는 패션쇼 오디션 합격해서, 연습하고, 준비하고, 뭐! 바쁜가 봐! 코빼기도 안 비춰 그놈~!”
역시 다 알고 계시면서 괜히 그러시는 게, 많이 서운하신가 보다.
투덜대시는 거 보면 관장님이 잔정이 많으셔서 그러시는..
아니 이제 나이가 있으셔서 외로움을 타시는 건가 보다.
아무튼 상수 형이 잘 돼서 나도 덕 좀 보고 싶다.
“관장님 저 가요, 내일 뵙겠습니다.”
관장님은 말도 하기 싫으신지 손짓만 하시고는 고개를 돌리셨다.
어쩐지 저런 모습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관장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제 버스 타고 1시간 동안 가는 것도 익숙해져서 버스에서 음악도 듣고, 책도 읽는다.
이 1시간이 나에게 유일한 휴식 시간인 것 같다.
항상 학교 끝나면 체육관 오기 바쁘고 올 때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진다.
뭐 갈 때도 피곤한 건 매한가지지만 운동을 한 뒤라 그런지 정신은 개운하다.
집 앞에 있는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린 후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고, 스파링을 통해 큰 성과가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눈앞에 보이는 상가 건물에서 3층은 우리가 살고 있다.
2층은 세를 놓았고 1층에서 어머니가 미용실을 하신다.
지하는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다.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가니, 부모님이 식사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다녀왔습니다!~”
“준호 왔니? 와서 밥 먹어 너 좋아하는 LA갈비 해 놨다~”
“아들! 얼른 와라!!”
LA갈비라는 말에 내 행동은 2배는 빨라졌다.
“네, 옷만 갈아입고 후딱 갈게요~”
웬일이신지 오늘 온 가족이 모두 모였다.
오래간만이라 기쁜 마음에 콧노래가 나왔다.
우리 집 취침 시간은 이른 편이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일찍 못 오시면 온 가족이 같이 밥 먹기가 힘든데, 오늘은 아버지가 일찍 오셔서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샤워는 운동하고 했으니 잠자기 전에 양치만 하면 될 것이고.
옷을 갈아입고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아들과 같이 저녁을 먹는 것이 기분이 좋으신지, 베란다로 가셔서 약주를 한잔 따라오셨다.
예전에 아버지가 산에서 따온 영지로 담그신 약주다.
반주를 한 모금 드시고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시며 바라보시고.
“준호야 요즘 복싱은 할 만하냐?”
“네, 재밌어요.
관장님이 알려주시는 기술도 이제 숙련 단계에 있고요.
오늘 연습시합 했는데 이겼어요.”
눈이 휘둥그레지시며 놀라신다.
“그래? 이야~ 이제 준호 실력 좋아졌네~”
칭찬에 기분이 좋아 입이 찢어졌는데, 엄마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으신지 표정이 어두워지셨다.
“준호야, 엄마는 별로 기쁘지 않네. 적당히 하면 안 돼?”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버지에게 눈치로 지원 요청을 보내니, 아버지도 엄마 마음을 알기에 조심스러우신지 어색하게 웃으시며 엄마에게 말씀하셨다.
“여보, 아들이 가는 길을 응원 해 주자고.”
엄마는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한숨을 쉬신다.
“그래야죠.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어떻게요.”
결국 아버지와 나는 웃음으로 때웠다.
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잽싸게 아버지께 물었는데.
사실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요즘 일하시기 어떠세요? 이제 날이 엄청 더워지는데.”
다시 약주를 한 모금 드시는 아버지.
“흠~ 뭐,
아빠야 하던 일이니 이제는 익숙하지.
더군다나, 꿈꿔오던 정비 공장을 차리니까 일하는 게 즐거워서 그런지, 요즘은 오히려 더 젊어진 기분이야.
준호 너도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거라 분명 생각하고 원했던 그 순간이 올 거야.
그게 복싱이건, 다른 일이건 아빠는 항상 우리 아들을 응원하마.”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입가에 미소가 번지신다.
가족과 화목하고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웃음 짓는 행복한 시간인 것 같다.
종종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통해 느끼셨던 점을 말씀하시곤 하셨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다.
'항상 네가 즐겁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순 없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 중에 정말 최고로 하고 싶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찾아보아라.
그것을 찾은 후에, 그것에 열중한다면.
분명,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는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산다면, 어떤 고난이 와도 금방 괜찮아질 것이고 행복해질 테니 말이다.'
이 말씀이 정말, 정답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은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순 없다.
지금 하기 싫어도,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라.'
정말 그런 것일까? 종종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른분들이 계시는데 난 그 이야기에 의문이 들어 마음속으로 되묻고는 했다.
'그럼 우리가 꿈꾸던 모든 것들은 아무 쓸모없어지지 않을까?’
항상 되묻고는 한다.
물론 정답은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아버지 말씀이 더 좋은 삶의 지침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바로 지금 그렇게 살고 계시는 산증인이시니까.
그래서, 난 아버지를 존경할 수밖에 없다.
나도 분명 나의 신념을 지키며 살 것이다.
아버지와 대화를 하다가 슬쩍 어머니를 바라봤는데 다행히 옆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부자를 바라보시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화목하고 행복한 모습이 너무 좋으신 가 보다.
하지만, 그러길 잠시 어머니가 뭔가 생각이 떠오르셨는지 불안한 기색이 완연하셨다.
내 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리시더니, 하실 말씀이 있는 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셨다.
“준호야 엄마는, 그 복싱 말이다.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만, 너무 빠지지 않고 적당히 했으면 해.
그리고, 시합에는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고.
엄마는, 걱정돼서 항상 마음이 불안해.
내 새끼, 어떻게 될까 봐.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하니~?”
“엄마도 참,
이제는 그런 일 일어나기 힘들어요.
예전에는 선수를 보호보다는 즐기는 사람들 위주로 진행했는데.
지금은, 이미 위험한 상황이 많이 발생해서 선수 보호 차원으로 여러 가지 규정도 만들어지고 상당히 안전하게 변했어요.
이제는 위험하다 싶으면 시합 정지시키고 그래요~ 이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까도 말씀하셨으면서 또 말씀하신다.
아들이 혹여 다칠까 걱정되셔서 매번 잔소리처럼 말씀하신다.
어머니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지만,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가 보다.
그래도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시고, 품어 주시고, 믿어주시고.
좋은 정서를 가르쳐 주시는 부모님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복이라 생각한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마음이 느껴져 내 마음도 사랑으로 가득해지는 시간이다.
이런 것이 행복이 아닐까 어렴풋이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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