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 롤 로 그 -]
비석이 세워져 있는 한적한 곳.
바람만이 누워 있는 비석의 주인을 위로했다.
비석의 주인이 누운 그곳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비석의 주인은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갑작스럽게 허리케인과 같은 모습의 바람이 몰아쳤다. 떨어지던 잎사귀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회오리를 따라 세차게 나부꼈다.
허리케인과 같은 바람이 사라진 그곳에 보지 못했던 실루엣이 자리잡고 있었다.
환상처럼 잉태된 한 인영.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검은 실루엣으로 가득했지만 유독 얼굴이 있을법한 위치에 보석처럼 반짝이며 어딘가를 향해 빛이 집중됐다.
그곳은 무덤 지기인지 어떤 처녀에게 향해있었다. 그녀는 무덤에 자라 있던 잡풀들을 다듬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녀의 근처로 다가갔다.
인기척에 놀라 돌아본 그녀. 그를 본 뒤로 사시나무 떨듯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는 묵 빛 망토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녀를 지나쳐 무덤 앞 비석에 멈춰서 조용히 문구를 응시하는 그 남자.
[2022년 10월 17일.
아름다운 꽃,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 소현.
그리고.
미처 피우지 못한 꽃, 사랑하는 딸 미현.
이곳에 고요히 잠들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 열리지 않는 입을 애써 움직였다.
“누, 누구신지...”
대꾸가 없기에 그의 시선을 좇으니 그는 비석을 향한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고, 결국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이럴 수가. 너무 닮았어.’
너무도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질문이 쏟아졌다.
“혹시 이분들, 이분들을 아시나요? 가족이신가요?”
그제야 그가 눈을 뜨며 촉촉해진 눈동자를 그녀에게로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 당신은?"
냉정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의문 가득한 눈빛을 한 채 바라보는 남자.
그녀는 그의 말과 표정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하지만 의식하지 못한 듯 말을 잇는데.
“잘 아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제 기억 속에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지울 수 없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릴 것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왔어요.“
곰곰이 생각하는 그 남자.
“..”
그녀는 분명 얼굴이 낯이 익었다.
아니, 그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단지, 요동치는 마음을 들키기 싫기에 담담할 뿐이었다.
이미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도 그리워 찾아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그리운 사랑을 똑 닮았던 그녀를 그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애써 담담한 척 미소 짓고 그녀에게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어떤 기억이기에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나요.”
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눈동자가 요동치며, 물기가 차오르는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는데.
결국 그녀는 그의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에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쏟아 냈다.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는 자가 있다면 혹, 그가 그렇지 않을까.
“난,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그가 나를 바라보고 정말 밝은 미소로 다가왔죠.
너무도 포근한 미소였어요.
나도 모르게 미소 지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표정이었죠.
꼭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
하지만, 내 눈앞까지 온 그는, 흑.
사고가 났어요. 흑, 흑. 그의 마지막 말이 너무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지워지질 않아요. 끅, 흑.”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애처로움으로 가득했고, 그저 그녀를 향해 공허함이 가득한 구슬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 마지막 말이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군요.”
주저앉아 흐느끼며 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으로 따뜻한 기운이 전달되며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주듯 천천히, 그리고 따뜻함이 전달될 수 있도록 부드럽게 움직였다.
“흑, 흑. 너무 힘들어요.”
너무도 구슬프게 울고 있는 그녀를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그의 눈가에도 촉촉한 물기가 자리 잡았다.
마음을 추스르며 한동안 그녀가 진정이 되기를 기다리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젠, 그만 잊어요. 행복해져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때 그 사람과 너무 닮았어요.”
그가 눈을 슬며시 감으며 미소를 짓는다.
‘당신도 너무 닮았어요. 사랑하는 그녀를.’
미소를 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진정 됐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눈을 뜨자 좀 전까지 구슬프게 울었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빤히 바라보는 그녀가 보였다.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말하는 그.
“궁금해서요.”
“친척이신가요? 아니면 가족?”
집요하게 묻는 그녀를 보자, 궁금한지 똘망똘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요, 아무도 아니에요. 단지 그들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얻은 한 사람일 뿐이죠.”
그녀는 그의 말에 예전 도움을 받은 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여는 그.
“아직 젊어 보이는데, 이젠 예전의 아픔은 툭툭 털고 새로운 삶을 살아요.”
그의 말을 듣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 듣기에는 좀 거북한 이야기라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거칠게 말을 뱉는 그녀였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당황스러운 그, 부러 소리 내 웃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미안, 아가씨.”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문득 지금 자기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치 친오빠에게 하던 행동처럼, 너무 창피해져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변화를 못 본 체하고 그는 비석으로 향했다.
잠시간의 웃음으로도,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던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는 현실은 변함없었다.
결국, 다시 마음이 아려와 그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는 현실은 그의 딸도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옆에 사랑하는 딸도 함께 누워있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소중하고...
내... 내, 내 사랑스런...
결코 이런 운명이 아니었던...
나의 아기야, 내 새끼... 내 딸 미현아, 미안하구나....'
그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햇빛에 숨기려는 듯 눈을 감은 채 하늘을 올려봤다.
한참을 눈물 흘리던 그. 옆에서 지켜보는 그녀도 분위기에 휩쓸려 고요히 눈물을 머금고 있다.
무한한 능력의 그.
모든 이계의 정의를 실현한 그.
결국, 끝은 자기 삶의 한 부분인 곳에서 맞고 싶어 했다.
그는 다시 한번 추억을 꿈꾸기 원했다.
'나만 홀로 살아 있기에 너무도 외롭고 쓸쓸하오.
사랑하는 하나뿐인 소중한 각시인 그녀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이를 먼저 보내고 힘겹게 살아왔던 삶을 지우고 싶을 뿐.
눈물만 흐르는 공허한 삶의 연속이었지.
너무도 치열한 삶, 분명 그 삶에도 사랑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을 것인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삶이었는지.
소중했던 단 한 사람도 헤아리지 못했던 내 삶을 위한 것인지.
행복을 부르짖으며 노력하는 내 삶이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하지만, 다시 그때의 순간이 찾아와 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해도, 다시 필요로 한다면 난 지금이라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행복했던, 소중한 사람이 있었던, 그 옛날.
그래, 오직 예전의 어렸을 때의 행복과 사랑이 가득했던 삶만을 추억하며 그런 삶을 이루기 위해, 그 삶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그것을 위한 노력이었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이와 사랑을 시작하고, 사랑을 키우며 사랑을 가꿨던 그때의 기억.
그렇다. 그때의 행복을 갈망하며 노력해왔다.
잠시만이라도 그때만 그리워하고 추억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유일했던 나의 행복했던 그 순간들을, 기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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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VERITAS]-A BoXEr SuPerH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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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랑살랑 춤을 추며 화사하게 주변을 밝히듯 피어있는 꽃들이 노래를 부르며 평안을 속삭인다.
푸르른 동산 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서 있고, 풍성하게 자란 가지들이 손 인사하듯 흔들리며 춤을 춘다. 뜨거운 볕을 피해 쉬어 가라며 유혹하듯이.
“으악! 큰일이다!“
“깜짝이야! 뭐야, 뭔데. 또 사고 쳤어?”
“일단, 묻지 말고 나 좀 도와주라. 이번에 아버지한테 걸리면 나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무슨 일인지 말 해봐.”
평온하던 동산에 잠도 못 자게 우왕좌왕하는 신이 있었는데, 형 ‘투 크리우예 수크리스투‘였다.
동생인 나는 ’투 하기우 프뉴마토스‘ 라는 신이다.
그리고 지구를 창조한 ’투 떼우’ 라는 신이 바로 아버지다.
형인 ‘투 크리우예 수크리스투’는 항상 분주하다.
인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들의 불행한 삶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매번 도와주는데, 그것이 문제다.
간접적으로 관여한다면 큰일은 없지만, 직접적으로 조금씩이라도 관여한다면 큰 문제가 된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내가 인간 세상에 내려가 그 인간을 어르고 달래서 제 자리를 찾게 했다.
어쨌든.
이쯤 됐으면 아버지가 오실 때가 됐는데.
“수크리스투!!”
“헉!”
“내가 몇 번 말했느냐! 그렇게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형이 나에게 도와달라는 눈치를 보낸다.
쩝!
“아버지, 수크리스투 형도 이제는 정신 차릴 거예요. 한 번 더 용서를...”
“프뉴마토스, 매번 그렇게 형을 감싸고도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지금까지의 행태를 보고도?
허허, 흠....
내 너의 그 마음을 보면
매번 화가 가라앉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느니라.”
“....”
형이 고개를 숙이며,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고는 입만 뻐끔 거리며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허나, 이번은 안 되겠다!”
“흡!”
형이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져 눈동자를 굴리며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수크리스투는 듣거라! 부족하지만 형인 너를 생각하는, 네 동생의 마음을 알기에. 큰 벌을 내리려 했으나 능력을 제한하는 것으로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다.
앞으로, 직접적인 방법으로 관여하지 못하고 간접적인 방법도 제약을 걸어 놓을 것이야!
또, 물질적으로 또한 절대 관여하지 못할 것이다.”
“네....”
아버지는 하실 말씀만 하신 뒤 형을 냉정한 눈빛으로 쏘아 보시더니, 바람같이 사라지셨다.
“그래도 형, 다른 벌을 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그치?”
“....”
시무룩해 있는 형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그래도~ 형이 사랑하는 인간들을 아주 못 도와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거라도 할 수 있는 걸 위안 삼아. 그럼 난, 뒤처리하러 갔다 올게.”
내 말을 들은 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번뜩이더니, 입가가 올라가며 싱글싱글 웃기 시작했다.
의미 모를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간 형의 성격을 생각하니 기분이 풀린 것이라 속단하고 떠났다.
. .
뒤처리를 마치고 돌아와 형을 찾으니
아름드리나무 뒤편에 홀로 불쑥 올라 있는 바위 위에
어깨를 들썩이면서 처량함을 뿜어내는 몸짓을 하고 앉아 있었다.
“흑흑. 훌쩍!”
철딱서니 없이 저래 울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왜 그런가 해서 봤더니, 기도 편지를 읽고는 울고 있는 것이다.
기도 편지를 읽고 그 사람들에게 합당할 만큼 조금씩, 조금씩 도움을 주고,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능력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차원으로 보내 새로운 삶을 주기도 한다.
물론 그런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뭐, 영웅이라면 그렇게 해 주기도 한다.
한데 형이 말하기를 호기심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기도 편지를 보게 됐고, 그 편지를 보낸 이는 준호라는 아이가 태어나고 난 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으며 기도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한 장 한 장 읽던 중 감정이 격해졌단다.
꿈틀대는 호기심에 슬쩍 읽어 봤는데, 정말 저 편지들은 준호라는 인간 아이의 이름으로 도배 되어 있는 편지들이었다.
이제 태어난 준호의 건강을 위해.
이제 50일이 된 준호의 건강과 바른 인격을... 이제 100일 이 된 준호가 건강하고 순수하게 올바른 믿음을... 이제 150일 된 준호가 건강하고 순수하고 올바른 믿음과 지혜를... 이제 200일 된 준호가 건강하고 순수하고 올바른 믿음과 지혜와 사랑이 가득하길... 준호가 이제 중학교 올라가는데, 중학생이 돼서도 소심함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게.., 연약함을 주셨어도 마음만은 건강하고 순수하게.., 올바른 믿음과 지혜와 사랑과 바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게만 해 주세요....
정말 애절한 편지다.
인간만이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랑이다.
뭐, 듣기로는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모티브로 창조하셨다고 하신다.
형이 가관이긴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뭐, 사실 나도 뒤돌아 눈물을 훔칠 정도로 정성과 눈물이 가득 담긴 기도 편지였다.
“동생아, 이 형은 이제 깨달았단다. 내 무능함이 이토록 원망스럽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구나.”
“괜찮아, 이제부턴 바르게 잘하면 되지 뭐. 그나저나, 이제 준호 엄마에게 어떻게 할 거야?”
“준호네 엄마가 원하는 데로 준호를 도와줘야겠지. 앞으로 준호를 항상 지켜볼 거야! 그 아이가 자신의 삶을 앞으로 어떻게 그려나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간접적으로라도 조금씩 도와줘야지. 하하하”
그렇게 준호 엄마에게 감동한 형은 준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기로 맘먹었단다.
난 형이 사고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대환영이다.
“그럼, 한번 시작해 볼까?”
“그래, 나도 도울 수 있음 도울게.”
“정말?! 그 말 기억하고 있겠다! 동생아 고맙다! 하하하하”
난 피식 웃으며 형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거기 있었구나! 이제야 찾았다! 그래, 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