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회복하는 유진
혜진은 대출했던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을 나오다가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과친구인 수정과 승준을 만났다.
“혜진아, 너 오늘 수업 언제 끝나?”
수정이 물었다.
“오늘은 3시까지 밖에 수업 없는데.”
“우리도 그 때 쯤이면 오늘 수업 다 끝나니까 같이 유진이 병문안 가자.”
“응.”
혜진도 유진이 크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유진이 걱정되었다.
몸이 많이 좋아진 유진은 아버지인 박 회장의 배려로 특실로 병실을 옮겼다. 침대에 누워서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승준, 수정, 혜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진은 혜진을 보자 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과친구인 승준과 수정이 언제 한 번 병문안을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혜진이까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거.”
수정이 셋이서 사 가지고 온 과일이 든 바구니를 유진의 머리맡에 놓았다.
“몸은 좀 어때?”
혜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괜찮아.”
“그나저나 역시 재벌은 다르군. 이건 병실이라기 보단 완전 호텔이잖아?”
승준이 말했다.
세 친구는 병실에서 한 시간 동안 유진과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을 나갔다. 하지만 유진은 주로 승준과 수정이하고만 이야기 했을 뿐 혜진이한테는 또 한 마디 말도 붙이지 못했다. 혜진이 그렇게 떠난 후 유진은 세상에 자기 같은 바보는 없을 거라며 자신을 책망했다.
저녁 시간이 됐을 때 희연이 유진이를 찾아왔다.
“또 온 거야?”
유진이가 놀라 물었다.
“왜? 내가 오는 게 싫어?”
희연은 유진이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난 니가 힘들 거 같으니까 그렇지.”
“힘들긴? 나 하나도 안 힘들어. 근데 오늘 누구 왔었어?”
매일 저녁 시간에 유진을 찾아왔던 희연은 못 보던 과일 바구니가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과친구들이 낮에 왔다 갔었어.”
“그래. 나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시간 되면 소개시켜 줄게.”
“응.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이것 좀 먹어.”
희연이는 싸 가지고 온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아직 뜨뜻한 밥과 소고기볶음과 잘 익은 김치가 도시락 통안에 놓여 있었다.
“뭐하러 매일 이런 걸 싸와? 병원 음식도 먹을 만한데.”
“병원 음식을 어떻게 믿어?”
“여긴 니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이야. 근데도 못 믿는다는 거야?”
“큰아버지가 식당일까지 관여하진 않을 거 아냐.”
유진은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기 시작했고 희연은 그런 유진이를 더없이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진은 밥과 반찬을 아주 깨끗이 비웠다.
“하여튼 네 음식솜씨는 알아줘야겠다. 정말 맛있는데.”
“더 싸 올 걸 그랬나?”
“아냐. 많이 먹었어.”
유진은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한 시간 동안 유진이랑 얘기를 하던 희연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시락통을 챙겼다.
“내일도 올 거니?”
“왜? 내가 오는 게 싫어?”
“그게 아니라 내일도 올 거면 부탁하나만 하게.”
“무슨?”
“우리 집에 가서 내가 글 쓰고 있던 원고지랑 펜이랑 잉크 좀 갖다 줘.”
“글 쓰려고? 아직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희연은 놀란 얼굴을 했다.
“이제 다 나았어. 병원에 하루 종일 있으니까 하도 심심해서 말야.”
“알았어. 내일 가지고 올게. 그 대신 절대로 무리하면 안 돼.”
“그래.”
“그럼 내일 올게.”
희연은 병실을 나갔다.
희연이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연이가 손에 여러 종류의 과일 쥬스가 담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너, 들어오면서 희연이 못 봤니?”
유진이가 물었다.
“언니요?”
나연이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래, 방금 나갔는데.”
“언니가 여기 또 왔었어요?”
“그래. 매일 저녁 싸 가지고 와서 1시간동안 있다 가는 걸.”
“하여튼 언니 열성도 알아 줘야 한다니까. 오빠, 이 다음에 우리 언니한테 잘해야 되요.”
“그래야지.”
“하나 마셔요.”
나연은 상자에서 오렌지쥬스 한 캔을 꺼내 유진이에게 건네주었다.
“너도 하나 마시지 그러냐?”
유진은 캔을 따며 말했다.
“안 그래도 마실라고 했어요.”
나연이는 쥬스 한 캔을 더 꺼내 캔을 땄다.
“우리 건배해요.”
“쥬스로?”
“뭐 어때요?”
나연이는 미소를 띠며 유진이가 손에 들고 있는 캔에 자신이 들고 있는 캔을 부딪혔다.
나연은 30분 동안 유진이와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너도 이제 그만 가 봐야 하지 않냐?”
“그러지 않아도 그만 일어날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나연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시간 나면 또 올게요.”
“응. 조심해서 가.”
나연이는 유진이의 작별인사를 뒤로 하며 병실을 나왔다.
다음 날 희연은 유진이가 부탁한 원고지와 펜, 잉크를 가지고 유진이의 병실에 들렸다. 유진은 침대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어제 부탁한 거.”
희연은 가지고 온 물건들을 유진이한테 주었다.
“설마 오면서 내 소설 읽은 건 아니지?”
“안 읽었어. 니가 뭘 제일 싫어하는지 다 아니까. 하지만 다 쓰고 나면 나한테 제일 먼저 보여줘야 돼. 저번에 약속한 것처럼.”
“알았어.”
“그리고 또 하나 너무 무리하면 안 돼. 너 아직 다 완쾌된 거 아니니까. 안 그러면 도로 빼앗아서 가져가 버릴 거야.”
“또 누나처럼 군다.”
“누나같이 좀 굴어야겠어. 고등학교 때는 교통사고 당하고 이번에도 크게 다치고.”
“앞으로는 정말 조심 또 조심 할 테니까 마음 놓으세요, 누나.”
유진은 장난기 썩인 투로 농담을 했다.
“어때, 누나라고 하니까 듣기 좋아?”
“맨날 내 앞에서만 장난치지. 다른 여자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그건 그만큼 니가 편하고 좋아서 그런 거야.”
“정말 내가 좋아?”
희연은 유진이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슬쩍 떠 보았다.
“무슨 말이 그래?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하니? 넌 어렸을 때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인데.”
‘친구?’
희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유진은 자기를 여전히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유진이 좋아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저 번에 눈치 챈 일이 생각났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희연은 불안했다. 어쩜 유진은 그 여자한테 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희연은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 유진이 반드시 자신을 여자로지도 주는 날이 올 거라고.
“난 그만 갈게. 어머님이 하시는 레스토랑에 피아노 치러 가야 해서.”
“그래.”
희연은 병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