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풍물연습
7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연일 뜨거운 날씨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오후에 희연은 유진이의 집에 들렀다. 거실로 들어가니 가정부인 소민 아주머니가 반갑게 희연이를 맞았다.
“오셨어요, 아가씨.”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유진이 안에 있어요?”
희연이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나서 물었다.
“도련님은 잠깐 문구점에 간다고 방금 나갔는데요. 곧 들어올 거에요.”
“저 그럼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희연이는 2층으로 올라갔다. 유진이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은 옷가지들로 어지럽혀 있었고 책상 위는 수백장의 원고지들로 어지럽게 되어 있었다. 희연은 원고지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책상을 정리했다. 원고지의 첫 장에는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희연은 첫 장을 넘겨 읽어보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유진이가 다 완결 하지 못한 글을 누구한테든 보여주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책상정리를 끝내고 나서 희연이는 방을 치웠다. 방을 다 치웠을 무렵 유진이가 수백장의 원고지와 잉크가 담긴 비닐봉투를 손에 들고 문을 열며 들어왔다. 유진이는 방에 희연이가 와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언제 왔어?”
“방금. 그건 뭐야?”
희연이는 유진이가 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투를 보고 물었다.
“원고지하고 잉크 좀 샀어. 근데 또 니가 이 방 치운 거야? 그러지 말라니까.”
“조금 기다리는 김에 치운 거야. 심심하고 해서.”
“내가 쓴 글 봤니?”
유진이는 원고지와 잉크를 책상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니.”
“아직 보면 안 돼. 지금 보면 재미 없다고. 다 쓰고 나면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줄게.”
“약속한 거야?”
희연은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그래. 근데 무슨 일로 온 거야?”
“응? 너하고 같이 유럽여행 갔으면 해서.”
“유럽여행?”
“유럽 여행권 표가 두 장 생겼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언제 떠나는 건데?”
“모레.”
“그럼 안 되겠는데.”
“왜 무슨 일 있어?”
“난 내일부터 풍물 연습 좀 해야 되겠어. 다음 주에 우리 강화 훈련 떠나잖아? 난 오히려 너한테 좀 풍물 좀 배우려고 했는데.”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 뭐.”
희연이의 얼굴에 잠깐 실망의 빛이 스쳐갔지만 유진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일 하루만이라도 좀 가르쳐 줄래? 네 실력은 선배들도 다 감탄하잖아.”
“알았어.”
“음료수라도 마시러 내려가자.”
유진과 희연이는 거실로 내려왔다.
희연이는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 방으로 올라간 희연은 주머니에 곱게 접어 넣었던 유럽 여행권을 꺼내 찢은 후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날, 유진과 희연은 동아리 방을 찾았다. 둘은 아침부터 줄곧 풍물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희연은 며칠 전부터 장구를 배우기 시작한 유진에게 세마치장단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희연이 덩덩덕쿵덕 하고 구음을 내며 장구로 시범을 보여 주었다.
“한 번 해 봐.”
유진이는 희연이의 말대로 양손에 채를 쥐고 장단을 연주해 보았다. 그러나 유진은 덩덩덕 하는 부분에서 틀리고 말았다. 보기에는 쉬워 보였는데 처음 하니 의외로 잘 되지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이렇게 하는 거야.”
희연은 유진이가 틀린 부분을 다시 한 번 연주했다.
“자, 다시 한 번 해 봐.”
유진은 다시 장단을 두드렸다. 몇 번을 더 틀리고 나서야 유진은 장단을 제대로 연주해 냈다.
“이제 제대로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유진은 다시 처음부터 장단을 연주하였다. 이번에는 틀린 부분 없이 무사히 장단 연주를 끝마칠수 있었다.
유진이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몇 시야?”
“1시.”
“벌써 그렇게 됐어? 우리 그만 점심 먹으러 가자. 그러고 보니 배가 슬슬 고파오는 것 같아.”
“그래.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유진과 희연은 동아리 방을 대충 정리하고 나서 나갔다.
유진과 희연이는 중국집으로 들어왔다. 둘은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뭐 먹을 거야?”
희연이가 물었다.
“자장면 먹지. 뭐.”
“그럼 자장면 두 그릇하고 탕수육 중자 하나 시킬게.”
“뭐 하러 탕수육까지 시키려고 해?”
“연습하다 보면 금방 배 꺼진다고. 그러니 든든히 먹어둬야 해.”
희연은 자장면 두 그릇과 탕수육 중자 한 그릇을 시켰다. 둘은 배부르게 먹고 나서 중국집을 나왔다.
거리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희연은 학교 앞 거리에 있는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캔 음료를 두 개 사 가지고 나왔다.
“덥지? 이거 마셔.”
희연이가 캔 음료를 하나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어쩐지 좀 이상한 것 같다.”
유진이가 캔 음료를 받으며 말했다.
“뭐가?”
“배우는 입장인 내가 너한테 사 줘야 하는 건데 계속 얻어먹기만 하니 말야.”
유진이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 사인데 아무려면 어때? 점심도 먹고 그랬는데 좀 쉬다 할까?”
“그래.”
둘은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희연은 오전에 유진이한테 가르쳐 준 세마치 장단에 맞춰 도라지 타령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유진은 멍하니 희연이만을 바라보았다. 정말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실력이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뭐, 해 봐야지. 대신 못한다고 흉보기 없기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유진은 방금 전 희연이가 한 것처럼 도라지 타령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세마치 장단을 연주했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얼마 못 가 박자를 틀리고 말았다.
“그 정도면 처음치고 정말 잘 한 거야. 다시 한 번 해 봐.”
“또 거짓말 한다.”
“응?”
“우리 풍물패 회원 중에서 내가 제일 서툰 건 나도 다 아는 사실이라고.”
“누가 그런 얘기해?”
“누가 한 얘기가 아니라 다 아는 거 아냐? 연습할 때 실력 차이 다 드러나니까.”
“그거야 넌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시작했으니까 별 수 없잖아? 하지만 지금처럼 연습하면 나 같은 건 금새 따라잡을 거라고.”
“내가 널? 그런 건 꿈도 안 꿔. 난 니 반만이라도 쫓아갈 수 있다면 대만족이라고. 그래서 연습하는 거고.”
유진은 다시 도라지 타령을 부르며 세마치 장단을 연주했다. 하지만 중간 부분에서 또 박자를 틀리고 말았다.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무렵 학교 교정의 가로등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연습을 한 둘은 연습을 끝마치고 동아리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왔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교정을 나서면서 유진이가 말했다.
“친구 사이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면서. 저 번에 니가 그랬잖아?”
“내가? 내가 그랬던가?”
“응, 광주 내려갔을 때 그랬잖아?”
“그랬나?”
유진은 기억이 안 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 몇 시에 떠나?”
유진이가 물었다.
“응?”
“유럽여행 가기로 했다며?”
“아, 그거. 가지 않기로 했어.”
“가지 않기로 했다고?”
유진은 꽤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생각을 해 봤는데 나도 너처럼 풍물 연습을 해야 될 거 같아. 다음주가 강화 훈련기간인데 외국에서 놀다 온다는 게 좀 그래서 말야? 나 내일도 너 가르쳐 줄게. 그래도 되지?”
“나야 그럼 좋지만 그 여행권은 어떻게 했어? 누구 다른 사람 줬어?”
“아니, 그냥 버렸어.”
“버렸다고? 그럼 그 많은 돈을 그냥 날려 버린 거야?”
“많긴? 그깟 돈이야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걸. 그리고 내가 산 것도 아니고 선물로 받은 건데.”
“누구한테?”
“아버님.”
“아버님이라면 우리 아버지?”
“응. 사실 아버님이 너랑 같이 유럽 여행 가라고 선물로 주신 거야. 근데 니가 안 가겠다니까 별 수 없잖아? 버리는 수 밖에.”
“내가 안 가도 나연이랑 같이 가면 되잖아?”
“그 사고뭉치를 데려가서 뭐 하게? 그리고 사실 유럽여행도 많이 가 봤으니까.”
“그나저나 우리 아버지가 너 정말 좋아하긴 하나 봐.”
“그걸 이제 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교문을 나오자 유진이 말했다.
“응? 어디 가?”
희연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재수랑 만나기로 했어. 재수가 술 사 준다고 해서.”
희연은 그 말을 듣더니 지갑에서 5만원을 꺼내서 유진이한테 건네 주었다.
“이게 뭐야?”
유진이 의아한 반응을 보이며 물었다.
“그래도 금하그룹 외동아들인데 너무 얻어 먹지만 말고 니가 좀 사 주고 그래.”
“또 누나같이 군다.”
“난 계속 누나같이 굴 거야. 니 어머님도 내가 니 누나라고 인정했으니까.”
“세상에 늦게 태어난 누나가 어딨어?”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너 혼자 나하고 아버님하고 어머님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1대 3이라고. 그러니 대세를 따라.”
희연은 유진이의 손에 돈을 쥐어 주고는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어쩔 수 없이 돈에 손을 쥐게 된 유진은 계단을 내려가는 희연이를 멍하니 내려보다가 재수랑 만나기로 한 이모집으로 걸어갔다.
이모집엔 재수가 먼저 와 있었다. 유진은 재수가 앉아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늘은 내가 살게.”
“니가? 돈 없다고 하지 않았냐? 갑자기 돈이 어디서 생겼어? 또 글이라도 당선된 거야?”
“아니야. 그건.”
“그럼?”
“주문이나 하자.”
유진은 희연이가 돈을 빌려줬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 말을 돌렸다. 왠지 남자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