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저녁 시간 동안, 민은 스스로 최대한 사람들 시선 안에 두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자꾸만 어린 아이의 순수한 감정이 치고 올라와 참기가 힘들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민은 지정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고, 목 밑까지 밀어 넣은 어린 아이의 감정은 결국 터지고 만다.
한참 엉엉 울다가 그대로 엎드려 흐느낀다.
방 안에 함께 있던 다른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살핀다.
그 때 누군가 민 옆으로 다가온다.
“얘, 너 괜찮아?”
민은 눈물이 범벅 된 얼굴로 돌아본다.
눈이 길게 찢어지고, 얼굴이 긴 어린 향이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욱이다.
너무나 그리웠던 욱은 기억 속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속눈썹이 길고, 피부가 갈색인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 순간도 잊어버리지 않았던 욱의 눈동자.
누구보다도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에 빨려 들어갈 거 같다.
민은 벌떡 일어나 욱을 힘껏 끌어안는다.
당황한 욱은 가만히 있다 손으로 민의 등을 두드려 준다.
마음이 따뜻해지며 이내 눈물을 그친다.
“어머, 애 좀 봐.
넌 말을 먼저 건 나를 안아 야지, 왜 처음 보는 남자애를 끌어 안니?”
민이 머쓱하게 안았던 팔을 푼다.
“안녕. 나는 향이라고 해.
여기는 욱이야. 괜찮아?
아까 좀 원장한테 심하게 맞은 거 같아서, 약 좀 가지고 왔어.”
향은 야무진 표정으로 말한다.
민은 얼굴에 묻은 눈물을 쓱 닦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향이 민의 옆으로 와 몸을 살펴본다.
“민이라고 했지?
괜찮아?
여기 밥이 좀 고약해.
누구라도 처음 먹으면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지.”
욱은 향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 거린다.
향은 연고약 뚜껑을 열어, 민의 무릎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
“너 몇 살이야?”
“10살. 3학년이야.”
“으응, 우리도 3학년이야.
우리도 여기 보육원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됐어.
난 좀 똑똑하고, 욱이는 착한데 말을 못해.”
“응.”
“여긴 초등학교 건물에 붙어 있지만, 사설 보육원이고, 시골이라 아이들이 적어서 같은 반에 들어갈 거야.
뭐, 수업은 그럭저럭 이야.
선생들도 그냥 그럭저럭 이고.
그런데, 학교에는 컴퓨터실이 있지.
여기 보육원은 컴퓨터나 핸드폰 이런 게 없어서, 따분하지 뭐야.
그러니 지금 아이들도 저기 1층 로비에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어.
뭐 보는 줄 알아?“
향은 역겹다는 듯 말한다.
“보*하니!
유치해 죽겠어.
사실 난 할머니 밑에서 자라서 연속극 뭐 그런 거 좋아하는데, 알잖아.
아이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예능이나 보지 그런 거 잘 안 보는 거.
취향이 안 맞아서야, 원.”
향은 야무지게 입을 움직이면서, 속사포같이 말을 한다.
“응? 컴퓨터실이 있어?”
“애는, 요즘 컴퓨터실이 없는 학교가 어디 있어?”
“으응.”
‘아, 2019년이구나.’
갑자기 민은 뉴스에서 언급한 날짜가 떠오른다.
“다행히 무릎은 조금 까진 거 같아.
이런 건 우리 할머니 빨간약 있으면 직방인데,
아쉬우니 이거라도 바르자.
그리고 나 좀 봐봐.
머리가 이게 뭐야.
잠시만, 내가 묶어줄께.”
욱은 노란색 고무줄을 찾아오고, 향은 민이 머리를 두 손의 손가락을 이용해 빗질하고 가지런히 하나로 묶어준다.
머리를 빗어주면서 향이는 민에게 이야기한다.
“이건 우리끼리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그 원장과 김과장이라는 남자를 조심해.
낮에는 수업을 들어 괜찮지만, 방과 후에는 두 사람이 널 괴롭힐 수 있어.
특히 저녁 식사 시간 전후로.
그리고 5, 6학년 언니들이 그 김과장을 많이 무서워 해.
자세하게 말을 안 하는데 뭔가 있나봐.”
민은 이미 다 겪어 아는 이야기이지만, 향의 말에 동조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민은 큰 향이가 자신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아직 아이인 작은 향이가 반갑다.
아니, 많이 그리웠다.
“여기서는 우습게 보이면 우스워져, 강해져야 해.”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향이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말이 민의 입에서 나온다.
“응? 뭐라고?”
“아냐, 어디에서나 똑같구나 라고 말하는데, 헛나왔어.”
“아, 그래?
맞아.”
향은 어깨를 으쓱인다.
욱이는 옆에서 노란색 고무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는 장난을 한다.
“머리 묶어줘서 고마워.”
“그런데 너 아직도 머리 못 묶어?”
“응, 어렸을 때 엄마가 항상 묶어줬어.”
“흠, 아이 버리는 엄마들은 머리 잘 안 묶어주는데.”
“우리 엄마 버리고 떠나간 거 아니야.
사라진 거야.”
민의 말에 향과 욱은 서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나눈다.
“그래, 실종됐다고 해.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산을 다 뒤졌는데, 아무것도 안 나왔데.”
“아니야, 아니야. 우리 엄마, 진짜로 살아 있어.
그리고 우리 아빠도.
의식은 없지만…”
“알겠어. 꼭 엄마 찾을 수 있을 거야.”
향과 욱은 안쓰러운 마음에 민을 꼭 안아준다.
그 후 민은 어린 민의 모습으로 일상생활을 이어간다.
가끔 이건 꿈이니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고, 원장과 상급생이 가하는 폭력은 기억보다 더 아프고 끔찍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민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학교 구석 또는 보육원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어느 날, 민은 향과 욱을 체육 용구 보관 창고로 데려가고, 향과 욱은 민의 비밀 장소를 보고는 놀란다.
“와, 여긴 어떻게 알게 된 곳이야?”
“체육 시간에 고양이가 이리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
“와, 여기 좋다. 이제부터 우리 아지트야!”
“응.”
민은 고개를 끄덕한다.
“민아, 괜찮아?”
“사실 힘들어.
맞은 자리는 아프고, 보육원이 무서워.”
민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다.
얼굴과 다리, 팔은 멍투성이다.
향은 민이 안쓰러워 민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이리와봐, 머리 묶어줄께.”
민은 향에게 머리를 맡기고, 향은 서투르게 머리를 묶는다.
“그런데 상급생들이 왜 너희는 안 괴롭혀?”
민이 어렸을 때부터 간직했던 질문인데, 다시 어린 시간으로 돌아간 지금 물어본다.
민의 질문에 향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한다.
“난 우리 엄마가 직접 내 손을 잡고 여기 보육원 넣었는데, 원장이 우리 엄마랑 이야기할 때 뭔가 느낀 거 같아.
사실 우리 엄마, 돈을 밝히는 마녀거든.
마녀끼리 알아본 거지.
우리 엄마가 원장한테 말했어.
만약 나한테 손가락 하나 잘못 까딱하면, 내가 남편 시켜서 다 털어낼 거라고.
사실 새아빠가 조폭이야
고등학교 때 날 낳고, 술집 다니면서, 유부남 만나 이혼시키고 자기가 결혼했지.
외할머니가 날 키웠어.”
“그럼 할머니는 어디 계셔?”
갑자기 향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여기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요양 병원에 계셔.
치매야.”
“아 그래. 응, 우리 다음에 할머니 뵈러 가자.”
“그래, 꼭이야.”
이렇게 밝게 웃는 향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럼 욱이는 또 왜 괴롭힘을 안 당해?”
옆에서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욱은 살짝 웃으며 수줍게 땅에 끄적끄적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향은 옆에서 욱을 대변하듯 야무지게 이야기 한다.
“욱이도 처음 왔을 때에는 괴롭힘을 많이 당했어.
그냥 맞고만 있었지.
그런데, 일주일 지났을까?
갓 태어난 새끼 쥐를 상급생 아이들이 밟아 죽이려는 모습을 보고 미친 듯이 상급생 아이들에게 달려 들었어.
물론 엄청나게 터져 맞았지만 정신을 잃을 때까지 상급생한테 덤볐지.”
이 이야기를 들은 욱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아마 결국은 밟혀 죽은 새끼 쥐가 생각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욱이의 똘끼와 반항기를 충분히 보여주고 나니, 이제 상급생들은 욱이를 안 괴롭혀.
사실 원장과 남자도 본격적으로 욱이를 괴롭히려는 시점에, 네가 들어왔으니…”
향이는 말을 얼버무린다. 그리고는 찢어진 눈을 좀 더 크게 뜨고는 민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한다.
“사실 폭력을 행사하기에 제일 만만한 것은 아무 저항 없이 그 폭력을 맞고 있는 사람이야.
바로 너 같은 아이이지.”
그 말에 민이는 당황한다.
내가 자초한 것이라니,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다.
“난 향이 너희 엄마처럼 원장과 단판을 지어줄 사람도 없고, 욱이 너처럼 덤빌 용기도 없고, 힘도 없으니 조용히 눈에 안 띄도록 피해 다니다가 어쩔 수 없을 때 맞고 있는 거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냐.
둘 중에 하나지.
너 보다 더 약한 존재가 고아원에 들어오든지, 아니면 네가 그 사람들을 이겨야 하는 것.”
향의 똑 부러지는 말에 민은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향과 욱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한다.
“대신, 고아원을 떠나는 건 어때?”
“떠나서 어디로 가?”
“그거 알아?
며칠만 있으면 여름 방학이야.
그러면 하루 내내 원장과 남자, 그리고 상급생들한테 하루 종일 시달리게 될 거야.”
민의 말에 향과 욱은 어두워진다.
“난 떠날 거야.
아니 꼭 떠나야 해.
사실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민은 단호하게 말한다.
“해야 할 일?
그게 뭐야?”
“무지개 조개를 찾아야 해.
그리고 무지개 조개를 찾으면 엄마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무지개 조개?
그거 이미 다 사라진 거 아니야?
그리고 엄마는 왜?”
“엄마는 무의식 상태인 아빠를 위해 무지개 조개를 찾으러 산으로 들어갔다가 사라지셨어.
아빠를 살리고 엄마를 찾기 위해 무지개 조개가 있는 곳으로 꼭 다시 가야 해.”
향은 ‘앗’ 하며 뭔가 기억난 듯이 말한다.
“나도 인터넷에서 무지개 조개에 대한 글을 본 적 있는 게 기억나.
만병통치약으로 사람들이 캐다 먹었다던데.
생으로도 씹어 먹기도 하고.
만약 할머니한테 무지개 조개를 드리면 치매를 나으실 수도 있겠지?
그럼 더 이상 여기에 있지 않고 예전처럼 할머니와 살 수 있을 거야.”
욱도 옆에서 ‘윽윽’ 거리며 자신의 목을 어루만진다.
“그래, 너도 다시 말할 수 있을 거야.”
민은 욱을 보며 확신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다.
“산은 엄청 높고, 하루가 아니라 이틀을 올라가야 할 수도 있어.
그리고 사나운 들개들도 있어.”
공포가 가득한 표정으로 향과 욱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뭐, 그럼 미리 준비 해야겠네.”
향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쿨 하게 대답한다.
욱도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멍멍’ 소리를 내듯 입 모양을 낸다.
향과 욱이 민과 함께 하기로 하자, 민은 다시 보육원을 탈주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다시 욱을 잃고, 향은 타락해 버릴 것이고, 민은 다시 모든 것을 상실한 채 현재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운동장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탈주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아니 무지개 조개를 쫓아,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산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운다.
아이들은 재잘대며 즐겁게 수다를 떨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음악 소리와도 같이 달콤해서 민은 뱃속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때 민은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고,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오는 어둠, 그리고 정적.
또 다시 민은 잠에서 깨어나며, 현실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