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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오솔길
작가 : 엔보이
작품등록일 : 2019.9.2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이 걸어온 길.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갈등과 폭력의 역사.
태초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러한 갈등과 폭력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단원 4. 복수.(4)
작성일 : 19-10-04 23:10     조회 : 264     추천 : 0     분량 : 4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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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시작이군.”

 

  누군가의 푸념 섞인 목소리였다. 분대장은 나를 생활관 밖으로 불러내었다.

 

  “자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겠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우리들은 검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야. 우리도 사실 자네와 다름없는 억울한 피해자들이란 말이네.”

  “.......”

  “내가 왜 오늘 처음 보는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방금 전 우솔 씨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네. 나나 우리 분대원들 모두가 한 섬에 같이 살던 마을 주민이었으니까.......”

  “!?”

  “우리는 그래. 그 끔찍했던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가고 있다네.”

 

  그의 입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고향은 이름도 생소한 남쪽 끝 섬마을 을숙도란 섬이었다. 그 섬은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한 시진 정도 더 들어가야 나오는 제법 큰 섬인데 인구 사백여 호 정도가 그 섬 안에서 살았다고 한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만큼 그곳 사람들 대부분이 주로 바다에서 생업을 이어가며 사는데 봄이면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자연의 신비를 담은 동굴들이 많은 무척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기록에 의하면 을숙도는 동아민족 중 일부가 발견하여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육지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동아인들과도 교류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특색이 발달해 있었다. 그러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그들은 동아민족이 멸망하고 환국 전역에서 실시된 개화운동으로 전국에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때에도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간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평화의 섬이 지금은 죽음의 섬이 되어 버렸다.

  비극의 시작은 약 십여 년 전 배 한 척이 을숙도에 닿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개화를 거부하고 관군들을 피해 을숙도로 도망쳐 온 사람들로 오래전부터 모루항과 을숙도를 오가며 가교 역할을 해오던 동아인들이었다. 그랬기에 섬사람들은 그들을 아무런 경계 없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때만 해도 섬사람들은 검계라는 것이 뭐하는 조직인지도 몰랐을 시기였다. 그런 그들이 섬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검불계라는 조직이 만들어졌고 을숙도는 주민들도 모르는 사이 검계들의 병참기지가 되어갔다.

  육지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섬사람들에게 그들은 마치 검계들을 민족을 위해 한 몸 바치는 영웅처럼 묘사하였고, 실제 그들의 꼬임에 넘어가 검불계에 들어간 섬 주민도 꽤 되었다. 점차 그들에게 가담하는 젊은이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급기야 그들은 군사훈련까지 하기 시작했고 을숙도에서 점차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섬 어른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만 보았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 온 것이다. 바로 환국 군대. 을숙도가 검계들의 병참기지가 되고 있음을 파악한 환국군은 배 아홉 척에 각기 육십여 명의 군사들을 태워 을숙도를 공격하였고 그로인해 을숙도는 쑥대밭이 되었다. 을숙도에 정착중인 검계들이 나름 치열하게 저항하였지만 결국 병력의 열세를 극복 못하고 패해 산과 바다로 도주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을숙도를 점거한 관군들은 을숙도를 아예 검계들의 소굴로 치부하여 저항하지 않는 섬사람들까지 모두 죽여 마을을 불태운 것이다. 그것을 그들은 소거작업이라 불렀다. 때문에 그 사실을 안 섬사람들은 살기 위해 검계들처럼 도망 다닐 수밖에 없었다. 관군들은 그들을 계속 추적하였고 말이다. 그렇게 일주야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나중에 도착한 국군 지휘관이 조금씩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산과 동굴에 숨어있다 잡힌 이들 대부분이 변변한 무기 하나 갖추고 있지 않고 저항할 의지조차 없는 양민들임을 뒤늦게 파악한 것이다. 또한 붙잡힌 이들의 증언을 통해 을숙도에 똬리를 튼 검계 핵심인사들 대부분이 외지에서 온 것임을 파악한 지휘관은 그때부터 소거작업을 중지시키고 섬사람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동굴로 피신하였던 호세와 그의 가족들도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난리가 진정되고 난 이후 파악된 을숙도 주민들의 숫자는 이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검계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평화로웠던 섬이 그렇게 한순간에 비극과 절망의 땅으로 변모하고 만 것이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것으로 비극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자신들이 검계가 아니고, 또 그들에게 협력한 바도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없는 증거라도 만들어 내야 했고, 그럼에도 딱히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토벌군에 자원하는 것이다.

  을숙도를 점령한 지휘관이 약속하기를, 토벌군에 자원하여 오년 간 군 생활을 마치면 본인을 포함 가족들에 대한 모든 혐의를 벗겨준다고 하였다. 호세와 그의 분대원들 모두가 그렇게 토벌군으로 들어왔고, 지금까지 일선부대를 돌며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많은 동료들이 죽었다. 그래도 죽은 사람들은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적어도 그로 인해 자신의 가족들만큼은 검계라는 지옥 같은 멍에를 벗을 수 있을 테니까.......

  현재 을숙도는 수용소 마을로 지정되어 주민들 대다수가 위사들의 통제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 통제된 생활이란 다름 아닌 끝없는 노역에 동원되는 것으로, 노비들만 못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루 빨리 군 생활을 마쳐 가족들을 그곳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자신을 포함한 칠기대 대원들 대부분의 소망이라고 하였다. 그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제대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그의 이야기에 깊이 집중해 있었다.

  묘하게도 그의 이야기가 지금 내 처지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더 실감나고 끔찍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이야기가 모두 끝이 났을 때, 나는 그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알고 보니 이들이야말로 자신보다 더한 피해자였던 것이다. 소수의 검계들로 인해 섬 주민 전체가 학살당하다시피 한 것도 모자라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억울한 혐의를 벗지 못하고 있는...... 비교할 것은 못되지만 그래도 이들에 비하면 자신은 훨씬 나은 경우였다. 그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해와 적개심이 이들에게는 또다시 어떤 상처로 다가왔을지,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저는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짐작도 못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섬에서 살다가 아무 것도 모른 체 큰 환난을 겪은 그나, 외진 마을에서 어느 날 갑자기 횡액을 당한 자신이나 무엇이 다를까? 다만 차이라면 나는 아직도 내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내가 꿈에서 보았던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 역시 그들에게 동무들을 잃고 죽을 뻔하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아직 그들의 실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체 그들의 진짜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까?”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소수민족들은 모두 저마다의 독특한 문화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네. 그들 중 새 나라의 법과 제도를 받아들인 자들이 오늘날 개화민이라 불리는 것이고, 그것을 거부하고 법과 제도를 피해 숨어 지내는 자들이 불령자라 불리게 되었지. 그러나 이 나라는 처음부터 불령자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어. 처음에는 회유하고 설득도 했겠지만 나중에는 피의 숙청이 이루어졌지. 그렇게 수많은 불령자들이 관군들에게 쫓기다 짐승처럼 사냥 당했다고 들었네. 검계들은 바로 그러한 시기에 만들어진 저항 세력이야. 수년 동안 짐승처럼 쫓기며 사냥당한 그들의 원한이나 분노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 분노가 이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의지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네. 내 고향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허면 불령자들이 곧 검계란 말인가요?”

  “그건 그렇지가 않네. 그것은 무척 위험한 생각이야.”

  “......?”

  “을숙도에 살던 나와 같은 섬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격리된 공간에 살고 있었기에 당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 그때의 나나 섬 주민들 역시 이 나라의 기준으로 구분해 부르자면 불령자라 불려야 마땅하겠지. 하지만 우리 본래의 모습은 불령자도 무엇도 아닌, 그저 을숙도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뿐이야. 세상 흐름에 어두웠던, 미련하리만치 순박했던 사람들 말이야.”

 

  그의 말 속에서 짙은 회환과 후회가 느껴졌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처럼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무 것도 모른 체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삶의 터전까지 송두리째 빼앗긴 그의 심정이 얼마나 허망하고 고통스러울지 나로서는 감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우선 그들에 대해, 또 이 나라의 역사와 현 상황에 대해 좀 더 확실히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야 두 번 다시 바보처럼 당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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