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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오솔길
작가 : 엔보이
작품등록일 : 2019.9.2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이 걸어온 길.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갈등과 폭력의 역사.
태초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러한 갈등과 폭력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단원 2. 저주.(5)
작성일 : 19-09-12 22:15     조회 : 275     추천 : 0     분량 : 8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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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한바탕 폭설이 내리고 며칠 뒤, 다행히 다시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한순간에 뒤덮었던 눈도 점차 녹아 보리울도 서서히 본연의 색을 찾아갔다. 그에 맞춰 마을 사람들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감에 따라 사열 준비를 위한 단테 훈련도 차질 없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모두가 모인 훈련장에서 병사들의 교육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내 마음은 점차 풀리고 있는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싸늘하게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에서 벌써 십 여일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사람들이 아직 기본적인 제식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좌양 좌, 우양 우, 뒤로 돌아 가, 구령에 맞춰 일사분란 한 움직임을 보여주어야 할 그들이 중구난방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치 내 가슴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만 같은 참담한 심정을 느껴야 했다. 만약 사열 당일 이런 모습을 보였다간 어떤 웃음거리가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내 정신은 아득해졌다.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 못하고 눈치 없이 옆에서 킥킥거리고 있는 토끼풀에게 내 날선 시선이 가장 먼저 꽂혀들었다.

 

  “토끼풀.”

  “어, 형.”

  “재밌냐?”

  “아, 그게 방금 사리 씨랑 음푼 씨랑 부딪혀서 넘어졌는데 그게 너무 웃겨서......”

  “씨발,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

  “그리고 저 사람들 네 분대 소속이잖아?”

  “.......”

  “지금 우리가 열흘이 넘게 가르친 사람들이 기본적인 제식조차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넌 지금 웃음이 나와?”

  “잘못했어, 형...... 아니, 단장.”

 

  나는 그날 제식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사람은 분대 전체가 남아 제대로 숙지할 때까지 훈련을 받아야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공지했다. 그러자 불만이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특히 나를 가장 어이없게 한 것은 그러면 훈련비를 더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일부 사람들의 항의다. 나는 그 순간 허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식으로 계산이 진행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다.

  그들이 추가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그들만 남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교육할 우리도 함께 남아야 함을 뜻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이곳에서 열성적으로 그들을 교육하고 있는 자신들이야말로 아무런 대가없이 가장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모든 것을 떠나 애초에 자신들이 누구를 위해 이토록 아등바등 애쓰고 있는지 과연 저들이 알고 있기는 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병사들에게 돈까지 쥐어줘 가며 교육시키는 단테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어깃장을 놓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문득 군수님과 약조를 하던 날, 그분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중간에 마음이 바뀌거든 나를 다시 찾아오게나. 나는 자네를 중히 쓰고픈 마음이 있어.’

 

  그러다가 또 퍼뜩 정신이 드는 것이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된다는 마음속 굳은 의지 때문이다.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다른 동무들이 앞장 서 마을 사람들을 다독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앞으로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 달리 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비록 아직은 정식 단장도 분대장도 아니지만 나와 동무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이들에게 어떤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 이들에게도 한 번 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단한 연장 훈련을 마치고 모두 떠나보낸 텅 빈 훈련장 안에서 나는 한동안 그렇게 음습한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다.

 

 ----------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억누르고 나는 곧장 촌장님 댁으로 향했다. 이 마을에서 동무들을 제외하면 그나마 나와 마음이 가장 잘 통하는 사람이 바로 촌장님이었다. 그의 오랜 연륜과 경험은 동무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라서 나는 다소 어렵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자주 그에게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고는 했다. 요즘 들어 자주 그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긴히 상의드릴 이야기도 있고, 또 그 말고는 이런 고민을 나눌 상대가 없다보니 나는 다시금 그의 집을 찾게 되었다.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그런가요? 오늘 좀 기운 빠지는 일이 있었거든요.”

  “반디군.......”

 

  그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거칠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만약 내게 할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그 앞에 서면 가끔 어린양을 부리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촌장님. 저는 가끔 이 마을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오늘 교육 훈련 중에 제식을 제대로 숙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남겨놓고 추가로 교육을 시켰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그러면 훈련비를 더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생짜를 부리더라고요.”

  “그런......!”

  “그들은 정말 이 마을에 단테가 세워지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요?”

  “당연하지! 그건 이 마을의 오랜 염원이었어.”

  “한데 제가 보기엔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아요. 오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시 내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을 혼자 괜한 착각에 빠져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생각 말이에요.”

  “아닐세! 아니야! 그건 다 나와 이 마을 사람들이 못나고 무지하기 때문이지, 결코 그래서가 아니네. 나를 포함해서 이 마을 사람들은 여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해 본 일이 없어. 당장 죽느냐 사느냐 하는 척박한 환경에서 늘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왔기에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함께한다는 건 이들에게는 정말 낯선 일이야. 그래도 반디군. 자네만은 그들을 이해해 주었으면 하네. 나는 지금까지 자네가 한 일들을 쭉 지켜봐왔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네. 이 마을도 점차 변하고 있어. 더 이상 개인의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마을의 번영을 위해서 조금이나마 자신을 희생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단 말이네. 나는 자네가 분명 이 마을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네. 나는...... 그저 염치없지만 자네를 믿고 있어. 나뿐만 아니라 아마 마을 사람 대부분이 그럴 것이야.”

 

  그의 말에서는 나에 대한 굳은 신뢰와 절실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때문에 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며 투정을 부린 것이 못내 죄송스러웠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오늘 그를 찾아온 진짜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이렇게 한창 바쁠 시간에 촌장님 댁을 찾아온 건 제 신상에 관해 긴히 의논하고픈 내용이 있어서에요. 지난번 제가 구서 씨에 대해 물어본 거 기억하시죠? 사실 그가 저희에게 저주를 퍼붓고 간 이후로 저와 동무들에게 정말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해서......”

 

  나는 그동안 그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구서 씨가 악담을 퍼붓고 간 뒤로 정체모를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과 그 꿈 내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것. 그리고 며칠 전 구서 씨를 찾아가 나눈 대화까지....... 나는 지금까지 그의 오랜 경험과 연륜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기억이 있기에 이번에도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내심 가지고 있었다. 내 얘기를 모두 들은 촌장님은 한참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사실 그런 이야기가 옛날부터 있기는 하였어. 영느리를 죽이면 동티가 난다느니, 일진이 사납다느니 하는 그런 흔한 이야기 말이야.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영느리를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은 그동안 이 나라에서 영느리를 주도적으로 사냥해 왔기 때문이 아닌가 말이야. 백해무익한 영느리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준다 해서 과거 군부에서는 영느리를 사냥한 사냥꾼에게 착호갑사라는 무관직 벼슬까지 내렸네. 만약 그러한 속설이 사실이라면 그들 모두가 잘 못 되든지 해서 어떤 식으로든 얘기가 돌지 않았겠나? 하지만 나는 여태 살면서 그 비슷한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어. 속설은 결국 속설에 불과할 뿐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더군다나 자네뿐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가 씨몰살을 당할 거라니, 그건 정말 내가 듣기에도 황당한 이야기구만.”

 

  역시 그의 생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에 크게 위안을 얻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허면 지금 저와 동무들이 겪고 있는 이 심상치 않은 상황은 무엇일까요?”

  “이보게. 자네같이 심지가 강건한 사람이 이리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 꿈이 정말 보통 꿈은 아닌 모양이구만. 하지만 자네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지금 자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과연 영느리의 죽음과 관계된 일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말이야.”

  “.......”

 

  그리고 잠시 촌장님은 말이 없으셨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그런 낌새를 눈치 채고 몇 번이나 채근을 한 끝에야 촌장님은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여셨다.

 

  “사실 자네 꿈 이야기를 듣고 한 가지 떠오르는 일이 있어서 말이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자네가 꾼 꿈 내용과 그것이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해서.......”

  “판단은 제가 할 테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개의치 말고 모두 말씀해 주세요.”

  “그게...... 사실 나로선 밝히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해서 말이네. 왜 지난번에 내가 해준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오래전 이 마을이 유명한 발굴지이기도 했다는 이야기 말이야.”

  “물론이죠.”

  “내 아버지 역시 그렇게 이 마을로 오게 된 노동자 중의 한 분이셨네. 특별한 일도 아니지. 사실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따지고 보면 다 그분들의 후손인 것이니....... 내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예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 분들과 자주 이 집에 모여 술자리를 갖고는 하셨네. 그런데 그때 그분들이 나누던 이야기들 중에 무척 괴이한 이야기가 하나 있었어. 다름이 아니라 그분들이 한창 발굴 현장에서 일할 당시에 수백구의 유골이 무더기로 나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야.”

  “유골이요?”

  “그래, 유골. 사람의 뼈 말이야. 때문에 당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떠돌았다고 해. 혹시 이곳이 오래전 큰 전투가 있었던 전쟁터가 아니냐부터 어쩌면 이곳이 어느 부족의 합장묘지일수도 있다는 이야기 등 당시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모두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이야기에 불과했지. 다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비사가 있으리라는 것이 아버지께서 동료 분들과 자주 나누던 이야기였어.”

  “지금 그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는......”

  “자네 꿈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자연히 그 이야기가 떠올라서 말이네. 지나친 억측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잖은가. 자네가 멧담불을 죽인 것과 방금 자네가 말한 악몽이 무슨 연관관계가 있냔 말이야. 그런 것으로 볼 때 나는 자네가 악몽에 시달리는 이유가 멧담불을 죽여서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데에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드네.”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실 지금 내가 꾸고 있는 악몽의 내용은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내용으로 멧담불의 원혼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은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못 했을까? 그것은 구서 씨가 남기고 간 저주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으니,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이 늘어났을 뿐이다.

  만약 촌장님 말대로 죽은 멧담불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나와 동무들을 밤마다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왠지 나는 그 실마리가 촌장님이 해주신 그 이야기 안에 있을 것 같았다.

 

  “허면 촌장님. 혹시 그렇게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지역이 정확히 어디쯤인지 알고 계시나요?”

  “자네도 익히 아는 곳이라네. 가시곶이라고.......”

  “가시곶이요!?”

  “그래. 그 버려진 땅 말이야.”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가시곶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시곶은 이 마을 인근에 있는 비슬산을 따로 지칭해서 부르는 말로,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땅이 너무 척박하고 볼품이 없어 쓸데없는 가시나무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꼬여 자란 나무들이 음침해 보이기도 하고, 또 쓸데없이 벌레만 많아서 마을 사람들도 발걸음을 꺼렸다.

  한데 내가 그 지명을 듣고 섬뜩한 기분을 느낀 이유는 근 며칠 동안 나와 동무들이 그곳을 자주 왕래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가시곶은 그 지형적 특성 때문에 보리울 사람들에게는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인 곳으로 정상적으로라면 자신들도 그곳을 전혀 왕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최근까지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던 이유는 공교롭게도 지난번에 사로잡은 멧담불과 관련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수수 씨 남새밭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짐승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그를 잡기 위해 흔적을 추적하던 우리는 그 짐승의 흔적이 가시곶으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한참동안 그 일대를 샅샅이 수색해 보았지만 둥지를 옮긴 것인지 끝내 그 짐승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뜻밖의 발견이 있었으니 거대한 썩은 나무 아래서 우리는 멧담불의 흔적이 아닌 죽은 사람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그냥 유골뿐이었다면 뭐 특별할 게 있겠냐만 그 유골주변에 죽은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와 제법 값나가 보이는 유물들이 함께 있었다는 게 중요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우리는 청년회를 운영할 자금에 항시 목말라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망자에 대한 예의나 죄책감을 떠올릴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것들을 취해 장에 나가 은밀히 팔아넘겼다.

  그 한 번의 좋은 기억이 이후로도 우리를 그 장소로 이끌었고, 또 그때마다 첫날만큼은 아닐지라도 의외의 수확을 거두게 되면서 우리는 그 땅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갖게 되었다. 본래 밭을 훼손한 짐승을 잡는다는 애초의 목적은 나중에는 그저 좋은 구실이 되어 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 모르게 가시곶을 뒤지고 다니며 제법 많은 유물들을 취할 수 있었다. 최근 훈련을 받는 사람들에게 훈련비를 지급하는 등의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모두 그러한 일이 기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과거 유명했던 발굴지임과 동시에 유골들이 무더기로 나왔던 데가 다름 아닌 가시곶이라니, 한편으로는 그동안 우리에게 있었던 행운이 이해가 가면서도 섬뜩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촌장님은 제가 꾸는 악몽이 과거 가시곶에서 나왔던 유골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냥 자네 꿈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레 그 이야기가 떠오른 것뿐이야. 매우 오래전 일이라네. 내가 이곳에서 몇 십 년을 살았는지 아는가? 하지만 여태껏 그 누구도 그와 관련해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든가, 잘못된 사람을 보지 못했어. 한데 왜 이제 와서 자네들에게 그런 일이 생기겠는가?”

 

  촌장님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내게는 그가 해준 이야기들이 어느 것 하나 예사로 들리는 것이 없었다. 촌장님께 고맙단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오늘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해보았다.

  과거 발굴지였다는 이 마을 근처에는 오래전 유골들이 무더기로 발견된 지역이 있다. 그곳이 바로 가시곶으로 알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한 곳이었고, 자신들은 그러한 사실은 전혀 모른 체 그 척박한 땅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수수씨네 밭을 망친 짐승을 추적하던 중 그곳에 값나가는 유물들이 제법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짐승은 결국 자신들이 마을 근처에 쳐놓은 덫에 빠져 죽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짐승은 그냥 평범한 짐승이 아니라 멧담불이라는 영느리였다.

  그 후 구서 씨가 찾아와서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고 갔고, 공교롭게도 그 즈음부터 해서 나와 동무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만 보면 그 사건들 전부가 각자 연관성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또 묘하게 연관성이 있는 것이, 거기서 어느 것을 더하고 어느 것을 빼야 진실에 가까워지는지는 몰라도 그중에 분명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 있을 것 같았다.

  그 후로도 나는 촌장님을 몇 번 더 찾아가 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결국 명쾌한 해답은 얻지는 못하였다. 다만 지금까지 알게 된 사실과 단서들만 재확인했을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촌장님도 결국에는 무자를 찾아가 도움을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해 주셨다. 그러면서 번리에 사는 도도무녀라는 사람을 추천해 주셨는데, 정식 무자는 아니어도 이 다미군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용한 무자라고 하였다.

  아무래도 이런 종류의 일에는 그쪽으로 전문가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것인데, 그 조언이 내게는 그다지 좋게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평소 내가 무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 무척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숫제 무자라는 것들이 대체 무얼 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보기에는 그저 남들 등쳐먹는 사기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기를 낳고 싶다거나 병을 고치고 싶어 하는 흔한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제 배를 불리는 자들.

  실제로 그런 식으로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많아 나라에서도 그들에 대한 단속을 크게 벌인 적이 있고, 오늘날 역시 정식으로 서운관에 등록되지 않은 민간인들의 무업을 금하고 있었으나 대놓고 업을 이어가지 못하다 뿐이지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동리무자들이었다. 그들이 근절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서운관의 인가를 받고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는 무자들이 요구하는 복채가 너무 과하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보기엔 이들이나 저들이나 도둑놈인 건 매한가지였다.

  하여튼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난한 서일 다님들은 자연스레 동리무자들을 찾았고, 서로 쉬쉬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결국 구서 씨도 그렇고 촌장님도 그렇고 이야기의 시작은 달랐지만 그 끝은 모두 무자를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평소 그런 미신 따위를 우습게 여기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고, 다른 무엇보다 큰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괜히 무자들을 찾았다가 근거 없는 입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이 무척 안일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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