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4. 덫.
매일 아침 묘시(오전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 달맞이 공터 앞은 훈련을 받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지금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제식이었다. 집단 전투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제식은 단테에 소속된 병사들이라면 모두가 필수적으로 익혀야하는 단테의 기본이다. 무예를 익히지 않은 병사는 있어도 제식을 익히지 않은 병사는 있을 수 없다는 어느 유명한 격언처럼 병사들에게 있어 제식은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었다.
단테가 구사하는 모든 전술이 바로 그러한 제식을 바탕으로 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형편없는 병사들을 지칭하여 오합지졸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 오합지졸과 정예 병사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제식이었다. 제식 교육이 끝나면 그 다음으로 병기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현재 이 나라 군대의 주력 병기는 길이가 약 일곱 척(2m) 정도 되는 창으로 병사라고 하면 모두 이 창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아야 했다.
그렇다고 뭐 거창할 것은 없는 게 기본적으로 창이 군대의 주 무기가 된 이유가 누구나 쉽게 익히고 사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단테 교본에 나와 있는 창술도 기본적으로 창을 잡는 법과 찌르고 휘두르는 법, 마지막으로 던지는 법 정도만이 나와 있을 뿐이니 사실 창술에 대해선 이론적으로 그다지 가르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무예 실력이라는 게 똑같이 가르쳐도 개개인의 능력과 깜냥에 맞게 차이가 나는 것이라.......
가장 어려운 것이 역시 궁술인데 이런 시골구석, 거기다 아직 창단하지도 않은 단테의 병사들이 그런 고급 기술까지 익힐 필요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본적인 전술대형까지 익히고 나면 병사로서의 기본적인 요건은 갖추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병기 한번 잡아본 적 없는 농투성이가 그럭저럭 쓸 만한 병사로 거듭나기까지 최소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나라의 명운이 걸린 다급한 상황에서는 사내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단 며칠 만에 교육을 끝내고 전장에 투입시키기도 한다지만,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것이고 대체적으로 단테에서는 최소 사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한 달이라는 시간 여유가 있던 내 입장에서는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사주란 온전히 모든 시간을 교육과 훈련에만 집중했을 때의 경우로 생업을 이어나가야 하는 보리울 다님들에게는 참으로 빠듯한 시간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최소한 번리 단장으로 있으면서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사문일 같은 인간보다야 자신이 서너 배는 낫다는 믿음. 또 그런 자신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해온 동무들에 대한 믿음. 이렇게 훌륭한 교관들이 있을진대 마을 사람들이 잘 따라오지 못할 리가 없다는 믿음. 그러나 모든 일이라는 게 그렇게 사람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엇! 눈이다!”
제식 훈련 중에 누군가가 낯선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훈련에 열중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정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산과 들이 꽃피운다는 잎새달(사월) 끄트머리에 내리는 눈이었다. 한 송이 한 송이 꽃잎처럼 떨어지는 눈송이가 누군가에게는 무척 아름답고 반가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는 아니었다.
“니미럴! 오라는 비는 안 오고, 이건 또 뭐야? 기껏 심은 작물들 죄 얼어 죽으라고! 하늘도 참 지랄 맞지!”
누군지 모르나 그가 한 욕지거리야 말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이맘때가 되면 늘 물이 아쉬워지는 상황에서 봄눈은 사실 농민들 입장에서는 반가운 손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봄눈과 숙모 채찍은 무섭지 않다는 말처럼, 봄에 내린 눈은 곧 녹아 소중한 물이 되어주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보리울 같이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그 눈이 잘 녹지 않는 게 문제였다.
혹여 차가운 새벽 기온에 얼어버리기라도 하면 그것은 보리울 사람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눈이 적게 오기만을 바라고 또 비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리울 사람들에게 바람은 늘 외면당하기 십상인 것이라......
“심상치가 않네. 가볍게 내리는 눈이 아닌 것 같은데.......”
“젠장! 어쩐지 오늘 날떠퀴가 좋지 못하더라니.......”
“날떠퀴가 어쨌기에?”
“말도 마. 아 글쎄, 오늘 새벽에 참 지랄 맞은 꿈을 꾸지 않았겠어. 밤중에 내내 악몽에 시달리다가 중간에 깨어 일어났는데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는 거야. 목소리도 안 나와서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눈에서는 또 미친 듯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하, 참! 집에 귀신이 들었는지.......”
동무들이 주고받는 대화였는데 나는 어리가 꿈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그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나 역시 어젯밤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 혼자만 그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는 생각에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 좋은 꿈을 꿨다고? 무슨 꿈이었는지 좀 더 자세히 말 해 볼래?”
“말도 마.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 나. 정말 희한한 꿈이었다니까. 우리 마을처럼 산 속 어딘가에 위치한 마을 같아 보였는데 무장한 병사들이 그 마을 다님들을 줄줄이 묶어 어디론가 데려가는 거야. 어디로 데려가나 봤더니 깊고 으슥한 산속으로 데려가서는 거기서 무슨 짓을 하나 했더니 아, 글쎄 살아있는 사람들을 모두 생매장 시키는 게 아니겠어? 얼마나 끔찍스럽던지, 여자들이고 아이들이고 가리지 않고 파묻는데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살려 달라 소리 지르던 여인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아. 그렇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산채로 파묻혔는지....... 악몽이 그런 악몽이 또 어딨겠어?”
“.......”
“.......”
“그런데 표정들이 다들 왜 그리 심각해? 내 꿈 이야기가 그리도 실감났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동무들과 한차례 대화를 나누어본 끝에 우리는 모두 비슷한 악몽을 꾸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서로 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그날 훈련을 평소보다 일찍 마무리 하였다. 때 아닌 눈 덕분에 더 이상 훈련을 진행할 상황도 아니었고, 당장 우리부터가 마음이 심란하여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난 훈련장에 남은 우리들은 공터 한 켠에 마련된 정자에 앉아 어제 겪은 일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요새 들어 꿈이 잦기는 했어. 그렇지만 그렇게 지독한 악몽은 처음이었어.”
“정말 우리가 모두 같은 꿈을 꾼 거야? 그게 가능한 일이야?”
동무들은 습관적으로 내게 이 낯선 상황에 대해 물었다. 동무들은 그들이 잘 모르는 일이나 처음 접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지나치게 내게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그래도 내가 그들 중에서는 가장 많이 배운 축에 들기 때문이겠지만 이런 류에 있어서 황당하고 영문을 모르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하늘소가 신경 쓰이는 말을 했다.
“혹시 정말 그 것 때문 아닐까? 왜 멧담불을 죽인 것 말이야.”
“아서라. 그 이야기라면 꺼내지도 마. 그게 당최 말이 되는 소리냐?”
“아니, 혹시나 해서.......”
보리가 타박을 주긴 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그 일이 신경이 쓰였다. 시기가 참으로 공교로웠기 때문이다. 구서 할머니가 저주와 같은 악담을 퍼붓고 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하였으니 말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지금은 뭐라 해 줄 말이 없어. 꿈을, 그것도 그런 끔찍한 악몽을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이 동시에 꾼다는 것은 책에서도 본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야. 하지만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해. 그러니 지금은 그런 것에 동요하지 않았으면 해. 일단 내가 거기에 대해서는 알 만한 사람을 찾아가 자문을 구해 볼게.”
의연한 척 말은 했지만 사실 불안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이 동시에 같은 악몽을 꾼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참으로 불길한 일이었다. 때아니게 쏟아지는 눈발도 그런 불길함을 더해주었고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동무들이 동요하지 않게 별일 아닌 척 의연해 보이려 노력했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이상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는 몰라도 방금 내가 한 말처럼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그보다 나는 당장 내일 있을 훈련이 더 걱정이었다. 오늘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일단 눈이 조금 쌓이더라도 아침 훈련을 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이야기를 해두었는데 어찌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나는 그저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또 그로인해 생각할 것이 많아지는 것이 다만 야속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꿈자리마저 사나우니....... 무심한 눈송이가 켜켜이 내려앉는 만큼 내 고민의 깊이 또한 한층 더 깊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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