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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오솔길
작가 : 엔보이
작품등록일 : 2019.9.2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이 걸어온 길.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갈등과 폭력의 역사.
태초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러한 갈등과 폭력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단원 2. 저주.(1)
작성일 : 19-09-08 19:54     조회 : 279     추천 : 0     분량 : 9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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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결국 동무들은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훈련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그날그날 훈련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결국 결정이 난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새벽부터 각자 자기 분대에 소속된 인원들 집을 찾아다니며 알려주었다. 훈련에 참가하면 소정의 훈련비가 지급될 거라는 소식에 소집 대상자들의 입이 모두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그렇다고 모두 듣기 좋은 말만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단테의 규율대로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 규율이란 이렇습니다. 단테에서는 정당한 사유 없이 정해진 훈련에 불참하는 경우 곤장 열 대, 또는 구리전 열문의 벌금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에 빠진 시간만큼 또 보충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괜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게 오늘 훈련에는 꼭 나오세요.”

 

  훈련비를 준다는 말에 혹한 것인지, 아니면 그 뒤의 엄포가 효과가 있었는지, 과연 그날 훈련에는 대부분의 인원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오지 않은 인원들이 있었다. 하늘소가 분대장으로 있는 분대원들이 특히 그랬다. 나는 그에게 약간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너 내 말 똑바로 전했어?”

  “했지. 그런데......”

 

  하늘소는 그들이 훈련에 나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애초에 짐작한 듯,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그들이 번리에서 소작을 붙이고 있는 땅주인이 그들보고 훈련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인의 입장에서는 지주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땅주인은 나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다름 아닌 번리 촌장, 함 을관. 돼지같이 살찐 양 볼에 욕심이 그득 들어 차있는 노인네였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보리울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번리에서 촌장으로 있는 그를 하루 이틀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오지 않은 인원들만 몰아붙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 얼굴을 다시 볼 생각에 미리부터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나 잠시 번리에 좀 다녀올게.”

  “어쩌려고? 설마 가서 깽판 치려는 건 아니지?”

 

  시솔이 내게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생각이 없는 줄 아니? 걱정하지 마. 그러려고 가는 게 아니니까....... 지금이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할 때라는 건 나도 잘 알아. 싫어도 어떻게든 살살 구슬려 봐야지.”

 

  번리에서는 유일하게 솟을대문이 솟아있는 곳. 집의 규모에 비해 과장되게 큰 대문이 주인의 성정을 잘 대변하고 있는 그곳이 바로 번리 촌주 함 자영의 집이었다. 옛날에 도련님과 함께 이 집 대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한데, 마음은 굴뚝이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나는 얌전히 그 집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보리울 사는 반디가 촌장님을 뵙고자 왔다고 좀 전해주시겠소?”

  “무슨 일로 온 것이오?”

  “특별한 건 아니고 그저 인사차 왔다고 전해주시오.”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촌장의 처소로 안내된 나는 몇 년 만에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흘겨보았다.

 

  “보리울 사는 반디가 번리 촌장님을 뵙습니다.”

  “네가 예까진 웬 일이냐? 내가 있는 곳으론 오줌도 누지 않을 것 같던 녀석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왜......?”

  “설마 잊었단 말이냐? 네가 그 녀석과 함께 이 집에 찾아와 나를 망신 주었던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한데.......”

 

  그런 일이 있었다. 보리울 다님들을 제 집 노비보다 못하게 여기는 함 을관. 어떻게든 일을 해 먹고 사려는 그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제 마음대로 부려먹기가 부지기수. 품삯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보리울 소작인들에게 과한 소작료를 거두어 가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춘궁기에 선심 쓰듯 장리쌀을 놓아 이듬해에 과한 이자를 물리어가니 그 수법에 당해 조막만한 밭뙈기나마 빼앗기고 노비로 전락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스운 것은 그런 그가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선량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이어지던 그의 전횡에 제동을 건 자가 바로 이삭 도련님이었으니 보리울 다님들을 대신하여 직접 청사에 소장을 제출하고 그와 함께 이 집을 방문해 그의 사악한 행실을 꾸짖던 기억이 나 역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하지만 나는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촌장님. 제가 오래전에 도련님을 배행하여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당시 저는 그저 도련님을 곁에서 모시는 예담이었을 뿐입니다. 한데 어찌 저에게 그런 앙심을 품고 계십니까?”

  “허헛, 예담이라....... 네 말처럼 네가 그저 그런 예담이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악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아. 그 옆에서 네가 나를 보던 그 눈빛이 말이야. 그래, 그 눈빛. 마치 벌레를 쳐다보듯 한 그 눈빛 말이야.”

  “그건 오해십니다, 촌장님. 보리울 소작인들을 훈련에 나가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까?”

  “물론 그러한 이유도 있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

  “먼저 네게 묻고 싶구나. 군수님께서 네게 일영가 가신 자리를 제안하였다 들었는데 그 좋은 자리를 거절하면서까지 네가 보리울에 단테를 세우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하는 이 대답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내가 가장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자와 같은 구실아치들이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한결같이 제 잇속을 추구하는 저들이야말로 그들의 이익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시 얼마나 강하게 결속하는지 이미 한번 경험해본 바가 있었다. 때문에 지금 나로서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본심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단테의 단장이 되는 것. 그래서 훗날 무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향토예비군의 성격을 띠고 있는 단테에서 분대장급 이상의 직위를 맡으면 무과에 응시할 자격이 생긴다. 나는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허허. 네가 무과에 뜻이 있더냐?”

  “부끄럽지만 제 유일한 꿈이 바로 다간이 되어 제 비루한 팔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가 내 말의 진의를 파악치 못하겠다는 듯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알기로 자네와 이삭 도련님이 유독 각별했던 사이라 들었네. 실제 그가 떠나고 난 뒤 자네가 보인 행보도 묘하게 그를 닮은 구석이 있고....... 한데 그것이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건가?”

  “촌장님. 제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촌장님들 손바닥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설마 제 깜냥으로 그를 흉내 낼 생각을 하겠습니까? 제가 보리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제가 목적한 바가 있기 때문이지, 결코 그의 허황된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면 제 말을 믿어주시겠습니까?”

 

  내 간곡한 해명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에 나는 미리 준비해온 물건을 봇짐 속에서 풀어 그 앞에 내어놓았다.

 

  “이게 무엇인가?”

  “제가 며칠 전에 잡은 영느리의 간이온데 핏물을 빼고 소금을 쳐서 바람에 말린 것입니다. 내단에 비할 바는 못 되어도 이것 또한 보신에 무척 좋은 약재라 하여 신경 써서 보관해 왔습니다.”

  “이것을 왜 내게 보여주는 겐가?”

 

  그렇게 묻는 그의 눈빛이 벌써 욕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준비해온 보람이 있었다.

 

  “그동안 보리울 사람들이 어렵게나마 연명해올 수 있던 것이 모두 촌장님께서 베푼 은혜 덕분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촌장님께서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는 저희 마을을 그동안 돌봐주지 않았더라면 보리울이 어렵게나마 지금까지 연명해 올 수 있었겠습니까? 지난 일로 의도치 않게 실례를 범한 적도 있고 이렇게라도 성의를 표시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부디 촌장님께서 좋은 마음으로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흐음......!”

 

  그가 내 말을 정말로 믿는지 아닌지는 그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나는 그가 이 선물을 사양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내가 아는 그라면 분명히 그랬다. 과연 그는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자네를 조금 오해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듯 싶으이. 나모가에서 오랜 기간 예담으로 있던 사람답게 과연 자네는 생각하는 바가 여느 촌무지렁이들과는 다른 바가 있구만. 자네의 진심은 잘 알았네. 내 앞으로 자네가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지는 못해도 헤살을 놓지는 않겠네.”

  “정말 감사합니다, 촌장님.”

 

  이야기를 잘 마치고 보리울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와 나눈 대화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지어낸 말들이 왠지 모두가 거짓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스로 들었기 때문이다. 무과에 뜻이 있다고 밝힌 내 말은 진심이었다. 내 궁극적인 목표가 다간이 되는 것임은 다른 동무들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이다.

  과연 촌장 앞에서 한 말이 모두 거짓에 불과한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그런 본심이 숨어 있는지,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진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던 내 저의가 과연 내가 경멸하는 그와 다르지 않음을 자신할 수 있냐고 내 양심이 자꾸만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보리울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동구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동무들의 모습이 보였다. 갔던 일이 잘 되었는지 궁금해서 함께 마중을 나온 것 같았다.

 

  “갔던 일은 잘 되었어?”

  “그래.”

  “정말이야? 그리 쉽게 말을 들어?”

  “뇌물을 주었거든.”

  “뇌물이라면...... 또 돈을 썼단 말이야?”

  “아니, 귀하다는 영느리의 간을 내주었어. 욕심이 끝이 없는 자라 그런지 과연 한순간에 표정이 변하더라고.”

  “그게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었어? 지난번에 거간꾼들에게 다 팔아넘긴 것으로 아는데?”

  “맞아.”

  “??”

  “실은 그냥 평범한 돼지의 간이었어. 그런 작자한테는 그것도 참 아까울 노릇이지.”

  “!!”

 

  동무들 사이에서 한바탕 크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고 있는 동무들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결코 어디에 가서도 발설해서는 안 돼. 설령 너희 가족들 앞에서라도 말이야. 만약 이 사실이 그의 귀에 들어가면 나나 너희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거야. 그런 소인배일수록 한번 원한을 사면 쉽게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

  “우리가 뭐 바본 줄 알아? 염려 마.”

  “그리고 보리야. 병기창에는 가 보았어?”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웃음기 돌던 좌중이 사뭇 조용해졌다. 그것을 보고 나는 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을 짐작했다. 현재 우리들은 아직 제대로 된 무기와 장구류를 지급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군사훈련을 함에 있어 집에서 쓰는 보습 등을 가져와 무기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모양새가 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제대로 된 무기사용법조차 가르치기가 힘들었다.

  나는 일찍이 군수님에게 약조를 받은 즉시 병기창에 들러 군사훈련에 사용할 무기와 장구류를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곧 연락을 준다던 병기창에서 며칠 째 아무런 소식이 없자 슬슬 다급해지던 참이었다. 보리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가 오늘 병기창에 들러 사정을 알아보기로 했었다. 그가 천천히 오늘 들은 이야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병기창에서는 아직 보리울에 단테가 세워지기로 확정된 것이 아닌 이상 무기와 장구류를 미리 지급해 줄 수 없다고 했어. 현재 병기창의 재정이 어려워 보유하고 있는 여분의 무기나 장구류도 없을뿐더러 기존 병사들의 정량을 맞추기에도 빠듯하다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무기도 없이 어떻게 사열을 치르라는 거야?”

  “일단 죽창을 만들어 쓰라고 하더라고. 실제 무기가 부족한 다른 마을에서도 그렇게들 한다고.......”

 

  순간 머릿속에서 끔찍한 상상이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군현의 모든 병사들이 도열한 자리에서 제대로 무장도 갖추지 못한 채 서있는 보리울 사람들의 모습이....... 그리고 그런 자신들을 비웃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절로 이가 깨물어졌다.

 

  “정말 그리 말했단 말이야? 병기창에서?”

  “응.......”

 

  병기창에서 그리 나왔다는 건 결국 군수의 뜻이 그와 같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저의가 궁금했다. 설마 영느리의 내단만 꿀꺽하고 나와의 약조는 지키지 않을 셈인지, 하지만 그렇게 보기는 힘든 것이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에겐 명예가 곧 생명과도 같았다. 이미 그와 나 사이의 거래가 온 동리에 파다하게 퍼진 터에 입을 싹 씻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보리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가 딴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닐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평소 명예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그가 이미 온 동리에 파다하게 퍼진 일을 모른 체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다만......”

  “다만?”

  “아무래도 그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사열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면 단테 설립은 없던 일로 하겠다던 그 말말이야.”

  “그렇다면......”

  “아무래도 그는 우리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 같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죽창이라....... 당장은 병기창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겠지. 군사의 우열이라는 게 가진 바 무기와 거탈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사열 당일 똑똑히 보여주는 수밖에.......”

 

  이런 압박으로 우리의 의지가 꺾일 거라 생각했다면 그는 크게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할 일이 태산인데 또 대숲을 뒤지고 다닐 생각에 나로서도 눈앞이 조금 아득하기는 하였으나, 이런 압박은 오히려 우리의 의지를 더욱 불태울 뿐이었다. 병사들 가르치랴, 무기 만들랴, 오지 않은 인원들 챙기랴, 할 일은 늘어만 가고 몸은 더욱 고달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 모든 고생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단테 설립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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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노인부터 어린아이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공터에 모여 있는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과 장내에 흐르는 삼엄한 긴장감만 아니었다면 흔한 마을 모임이라도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상황은 그런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살을 에는 듯한 긴장감이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잔뜩 얼어있는 아이들에게서 흔한 칭얼거림 하나 들려오지 않는 적막한 고요 속, 그들 앞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병사들은 손에 든 명단을 읽어 내리며 계속 누구누구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었다.

  그가 호명할 때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중 일부가 앞으로 나왔다. 여인에 아이들까지 섞여 있는 것을 보면 한 가정 전체가 불려나오는 듯 했다. 병사들은 그들을 사열 종대로 줄을 세워 정해진 인원이 차면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인솔자를 따라가는 마을 사람들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지만 살벌한 분위기에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였다. 인솔자는 그들을 마을 주변 산 속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마을과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삽 몇 개를 내어주며 깊게 땅을 파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 중 한 사내가 인솔자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자기는 아니라고 호소를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인솔자는 그에게 칼끝을 들이대면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래도 그가 말을 듣지 않자 인솔자는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망설임 없이 그의 배를 칼로 찔러 죽여 버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인솔자는 겁에 질려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하였다. 지금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하지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어른 키 높이 정도 되는 구덩이가 수어 개 만들어질 때까지 힘 센 장정들이 돌아가며 땅을 팠다.

  열심히 땅을 파는 어른들 사이를 철모르는 어린 아이가 뒤뚱뒤뚱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참이 흐른 후, 넓고 깊은 구덩이가 대 여섯 개 정도 완성이 되자 그들로부터 삽을 회수한 인솔자는 그들 모두에게 방금 파놓은 구덩이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병사들이 강제로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다시 흙을 덮기 시작했다.

  당연히 구덩이 안은 난리가 났다. 빨리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미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의 창에 찔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나약한 아이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어른들의 발악이 더 무서운 흉기였다. 창에 찔려 죽어가는 사내, 아이를 지키려고 끌어안은 여인, 알 수 없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노인 등, 구덩이 안은 말 그대로 피와 절규가 난무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산채로 파묻고 있는 병사들은 그에 대한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묵묵히 자신들이 할 일을 하였다.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땅 속으로 조용히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 하나의 무리가 병사들을 따라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병사들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사람들이 땅속으로 사라져갔는지 모른다. 나무들만이 말없이 그 끔찍한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민들이 모두 사라진 마을에 시뻘건 불길이 솟아올랐다.

 

  “허억!”

 

  나는 깊은 신음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끔찍한 악몽을 꾼 것이다. 보통 꿈이 아니었다. 그토록 생생하고 끔찍한 꿈은 난생 처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이, 그들 눈에 담겨 있던 선연한 공포가 바로 눈앞에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투둑 툭

 

  내 두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 눈물이다.

 

  ‘대체 왜?’

 

  왜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 왜 내가 이렇게 슬픈 것일까?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끔찍했다고 해도 그저 꿈이었을 뿐이다. 한데 왜?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 이 불길한 꿈이 어떤 재앙을 예견하는 것은 아닐지, 문득 구서 할머니가 퍼붓고 간 저주가 떠올랐다.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겨!? 재앙이 올 것이다, 이놈들아. 네 놈들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재앙이 올 것이야!’

 

  앉은 자리에서 한참을 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곧 정신을 차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요 근래 너무 무리한 탓일까?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반디야.’

 

  아직 달이 서산에 걸려있는 깊은 밤. 나는 다시 애써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내일도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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