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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오솔길
작가 : 엔보이
작품등록일 : 2019.9.2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이 걸어온 길.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갈등과 폭력의 역사.
태초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러한 갈등과 폭력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단원 1. 운수 좋은 날.(5)
작성일 : 19-09-06 21:11     조회 : 258     추천 : 0     분량 : 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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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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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그런 생각의 기틀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는 내게 왜 그렇게 잘 대해준 것일까? 그는 나를 단 한 번도 나모가를 의지해 살아가는 미손으로 대우한 적이 없다. 내가 글을 어느 정도 깨친 이후로는 향교며 단테 가리지 않고 나를 데리고 다녔고, 비록 문밖에서 기다리는 게 전부였을지라도 나를 늘 배움과 가르침이 있는 곳 가까이에 두려 하였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내가 문밖에서 주워들은 조각난 가르침들을 섬세히 이어주고는 하였으니, 그것은 아무리 그가 나를 예담으로서 아낀다고 하여도 분명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자, 그럼 어제 배운 것을 한번 외어 보겠니?”

  “음...... 어버이가 자식을 교육할 때에는 사랑으로 가르치되, 그 사랑은 때로는 해와 같고 때로는 달과 같아야 한다. 자식이 올바른 길을 갈 때에는 해처럼 따뜻하게 바라보고 잘못된 길을 갈 때에는 달처럼 서슬을 품어야 하니, 늘 해와 같고 늘 달만 같아서는 제대로 영근 자식을 바랄 수 없다. 자식은 어버이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 행동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고, 비록 그 가르침이 잘못되었거나 지루할지라도 시뜻한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그래. 그게 도덕경에서 말하는 어버이와 자식 간 교육의 기본이야. 혹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니?”

  “음...... 글쎄.......”

  “반디야. 너는 머리가 총명하여 경구를 외우는 데는 특출한데가 있지만 고작 그것에만 만족해서는 안 돼.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한 구절 한 구절 잡도리하고 되새김질하여 그 속뜻까지 헤아려야지만 진정 그 학문을 깨우쳤다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그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받았다. 내 처지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공부와 무예의 기초, 세상을 보는 식견 등을 그를 통해 배워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며 진정으로 배웠던 것은 지금 내가 가진 학문의 깊이나 무예의 수준 따위가 아니라 진한 형제의 정이라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다. 단순한 소임에서 벗어나 내가 그를 진심으로 형처럼 생각하고 따랐던 데에는 그런 형제와 다름없는 정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점차 셈이 들고, 또 그와 가까워지면서 나 역시 그의 평범치 않은 생각이나 일상 등에 말 못할 사연이 있음을 차츰 짐작하게 되었다. 가만 보면 그의 문중 사람들은 모두가 그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그에 대한 어떤 믿음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마치 당장 풀기 힘든 어떤 난해한 문제를 앞에 두고 기피하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런 모든 상황과 정황들이 그의 남다른 생각이나 행동과도 연관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미군에서 백마지기가 넘는 땅을 소유하고 있는 일영가. 발등에 오줌 눈다는 깐깐오월, 미끈유월의 시기가 되면 백 명이 넘는 일영가의 미손과 노비들이 허리 한 번 못 펴고 정신없이 바쁜 시기를 보낼 때였다. 그때가 되면 그는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샛강 근처 버드나무 언덕에 올라 예속들이(한 가문이나 기관에 매여 있는 아랫사람) 분주하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하였다.

  그를 따라 그곳에 오르면 샛강을 타고 흘러오는 시원한 바람에 더위가 한풀 꺾이기도 하였지만, 오뉴월 땡볕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일하는 예속들을 내려다보는 내 마음까지 편할 수는 없었다. 저들이 있는 자리가 바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또 분명 저 어딘가에서 함께 땀 흘리고 있을 내 어버이와 누이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디야. 보이니?”

  “무엇이?”

 

  그는 나와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어림하여 쫓으니 샛강 나루에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누군지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시기에 샛강나루에 모여 색색 수실로 치장한 배를 띄어 놓을 사람들이라면 그들밖에 없었기에....... 그들을 한동안 먼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우습지 않니? 한 쪽에선 농작물을 심는다, 김을 맨다 정신이 없는데 다른 한 곳에선 마을 나모들이 모여 꽃배를 띄어놓고 한가롭게 시화나 즐기고 있으니....... 저들의 저런 무익한 놀음이 이 마을 다님들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을 가져다줄까?”

  “.......”

  “저런 한가한 나모놀음이 지금같이 바쁜 농번기 철에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 군현의 운영이 제대로 되고 있지 못하단 증거겠지.”

 

  이 군현의 군수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일영 찬이었다. 그는 그렇듯 자기 아버지나 문중을 욕보일 수 있는 말에도 항상 거리낌이 없었다.

 

  “관습적으로 있어온 일이잖아. 나모들의 화합을 위해서.......”

  “농번기에 잔치와 시화를 즐기는 것은 조정에서도 자제시키는 일이야. 아무리 조정의 힘이 이런 외진 군현에까지 미치지 못한다지만...... 쯧! 나라 운영의 근간은 다님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야. 다님들의 ‘다’자가 모든 것을 뜻하는 뜻 음으로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 한데 나모란 것들이 그러한 다님들의 노고와 애환을 외면하고 저들끼리의 향락을 추구해서야 어느 다님들이 그들을 진심으로 따르겠니?”

  뎅 뎅 뎅 뎅

 

  밭일하는 다님들 사이에서 새참을 알리는 징 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땅만 보며 일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고 걸어 나오는 모습이 내게는 마치 어린 시절 자주 관찰하던 개미들의 행렬만큼이나 일사분란해 보였다. 사실 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 개미들은 여왕개미를 살찌우기 위해 온갖 노고를 마다 않는다. 여왕개미가 많은 알을 낳아 그들의 노고에 보답한다면 이 군현의 나모들은 무엇으로 다님들의 노고에 보답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너져야지. 언젠가는 무너져야지. 신분의 차이를 조장하는 이따위 법도....... 사람을 신분으로 구분하고 귀천을 나누는 것은 잘못된 법도야. 누누이 말하지만 하늘학 원본에는 본래 이 따위 법도가 존재하지 않았더랬어. 오늘날 우리가 읽고 배우는 경전은 대대로 권력을 잡아온 세도가들에 의해 많이 왜곡되고 수정되어 온 사실을 알아야 해.”

 

  탁 트인 시야만큼이나 거리낄 곳이 없던 그 언덕에서 그는 자신의 속엣 말을 거침없이 내뱉곤 했다. 그곳에서 그가 내뱉는 말 속에는 언제나 그의 가문을 포함한 모든 나모귀족들에 대한 알 수 없는 원망과 분노가 담겨 있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이 그로 하여금 문중 사람들과 그를 멀어지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항상 다님들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위한 정치를 생각하는 그야말로 그가 항상 이야기하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가 꿈꾸는, 그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끔씩 참을 수 없는 희열에 젖어들고는 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았는지 그가 서문을 맞이하던 해(성년이 되던 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오 년 전, 그는 쫓겨나듯 이 군현을 떠나게 되었다. 여러 향리와 촌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국가에서 개정한 농지법을 의도적으로 미루어 시행하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문제 삼은 것이 화근이었고, 그것이 그동안 알게 모르게 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구실아치들을 단합시키는 계기가 되어 크고 깊은 일영가의 그늘로도 무탈하게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패한 다미군을 개혁할 것이라 늘 자신하던 그의 말과는 사뭇 더린 결과였고, 그가 사라지게 되면서 나도 다시 평범한 미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른 사내 미손들과 마찬가지로 밭을 갈고 보습을 손질하고 똥장군과 새갓통을 들고 다니며 거름을 쳐주는 일 등, 본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순 없겠으나 그간 수펄로 살아온 나에 대한 다른 곁 식구들의 셈 어린 질시를 받아내는 것은 나로서도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이 바로 당시 마름의 아들이자 내게 도련님의 옆자리를 빼앗겼다 생각하고 있는 두칠이라는 인물이었으니, 그와 내 관계가 오늘날까지 좋지 못한 것은 사실 필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우리 집은 또 일영가에서 일어난 좋지 못한 사건에 휘말려 쫓겨나게 되었고, 그 서슬을 피해 가장 멀리 떨어진 보리울에 정착하게 되기까지가 내게도 그렇고 가족들에게도 가장 힘겨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도련님이 내게 남겨놓고 간 서적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무예와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한 현실에 파묻힐 때마다 몇 번이나 공부를 그만두어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도 하였지만 왠지 그것은 그와 함께한 세월들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져....... 살면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항상 그와의 마지막 만남, 헤어지기 전 그가 남긴 진심어린 조언을 떠올리고는 했다.

 

  “반디야. 너는 귀한 사람이 되어. 큰 그늘로 다님들의 애환을 보듬을 줄 아는, 한없는 푸르름으로 세상을 맑게 할 그런 사람이 되어. 네게는 재능이 있어. 정말이지 재능이 있어. 지금은 잠시 헤어져야겠지만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꼭 다시 만나서 그때는 우리가 꿈꾸었던 세상을 함께 만들어 보자. 너는 나의 영원한 동생이고 자랑이야. 네가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마.”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혹여 그가 나를 보고 실망하지는 않을까, 그가 내게 베풀어준 은혜와 가르침이 헛되었단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나는 여태껏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왔다.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어쩌면 그의 생각보다 더욱 난사람이 되어 어린 시절 내가 그랬듯, 그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되고자....... 그런데......

 

  “꿈도 분수에 맞게 가져야지.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은 너 뿐만 아니라 네 형제라는 것들, 그리고 네 가족에게까지 커다란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왜 몰라! 반디야, 내 동생아. 제발 정신 차려! 그가 네게 무슨 말을 해주었든, 무슨 희망을 주었든, 그는 어찌됐든 나모가의 도령이었고 너는 이방삼순이 전부인 결찌의 자식이야. 제발 네 분수를 좀 알아!”

 

  누이는 내게 분수를 알라고 말한다. 헛된 꿈을 버리고 여느 다님들처럼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고....... 지금 내가 꾸고 있는 꿈은 철없는 객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보통은 무시하지만 가끔은 나도 그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정말 누이의 말처럼 내가 꿈꾸고 바라는 것들이 내 분수에 맞지 않는 허황된 꿈에 불과한 것은 아닐지, 하루하루 나를 설레게 하고 마음 충만하게 하는 내 미래에 대한 계획들이 그저 철없는 객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지.......

 

  ‘그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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