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꿈 -
파란 하늘. 움직이는 조그마한 흰 구름 한 점. 비둘기. 하얀 비둘기. 바람을 타고 한없이 자유롭게 날아가는....... 구름을 뚫고 산을 넘어 강을 지나 아래 보이는 푸른 들판 위로 미끄러지듯 날아간다. 들판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나무. 그 높은 나뭇가지 위에 한 여인이 겁도 없이 앉아 있었다. 비둘기는 익숙한 듯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고 그가 새를 쓰다듬는 모습을 나는 존재 없이 지켜보았다. 그런데 잠시 후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내 쪽으로......
정확히 내 쪽으로......
나를......!!
팟!
“헉! 헉!”
그것으로 그날 잠은 다 잤다. 아직 달이 중천에 떠있는 새벽녘, 낯선 꿈을 꾸다 잠에서 깬 나는 그 후로 다시 잠들지 못했다. 대청에 나가 새벽 찬 기운을 맞으며 말똥한 눈으로 밤하늘만 한참을 바라보았다. 요새 들어 꿈이 잦았다. 대체로 악몽이었고 오늘 꾼 꿈 역시 그러했다. 이전과는 달리 무척 생소한 꿈이었지만 분명 기분 좋은 꿈은 아니었다. 꿈에 대해 생각하니 다시금 그 끔찍했던 느낌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무언가 무서운 걸 본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나를 본 것. 그게 문제였다. 꿈에도 종류가 있다. 내가 존재하는 꿈과 내가 존재하지 않는 꿈. 방금 꾸었던 꿈은 그저 풍경화를 보듯 비둘기를 쫓았을 뿐, 그 안에 내 존재는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꿈이라는 희붐한 의식세계 너머 잠자고 있는 내 존재를 직시하듯 한 그 눈빛. 마치 한 순간에 물 밖으로 낚아채진 물고기처럼 내 심장은 펄떡거렸다.
꿈속에서 나를 보던 그 눈동자가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이 무척이나 나를 소름 돋게 하고 생각에 잠기게 했다. 달빛 내려앉은 고요한 풍경만이 내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었다.
단원 1. 운수 좋은 날.
어제는 번리 거간꾼들이 나를 찾아오더니 오늘은 홍 을관(고을 관리, 촌장을 높여 부르는 말) 댁 마름이 나를 찾아왔다. 용건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게서 그것을 사고 싶다는 것이다. 부르는 금액도 은전 백 냥부터 오백 냥까지, 매번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불러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며칠 전 내가 쳐놓은 덫에 그것이 잡히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작은 마을에서 청년회를 운영하며 마을 지킴이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나는 매일매일 마을 근처 야산을 돌며 사냥을 하는 것이 정해진 일과였다. 짐승들이 마을 논밭에 내려와 작물에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또 그렇게 잡은 사냥감들을 해체해서 내다 팔아야 청년회를 운영하는데 최소한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에도 나는 한창 동무들과 함께 사냥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수수 씨가 운영하는 남새밭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우리는 망설일 것 없이 곧장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소문대로 수수씨의 남새밭은 온통 엉망이 되어있었다. 대부분의 작물들이 훼손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였다. 대체 얼마나 큰 짐승이 이곳에서 놀판을 벌이다 간 것인지 흡사 온 밭이 한번 갈아엎기라도 한 듯, 밭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발자국과 남은 흔적 등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엄청나게 큰 멧돼지 같은 것이 다녀간 것으로 보였는데, 그 현장을 살피고 있는 나와 동무들의 심정도 실제 그 현장만큼이나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청년회가 인정받아가고 있던 때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청년회 활동으로 느리 피해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가 간간히 마을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하던 무렵, 그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던 우리에게 엉망이 되어버린 수수 씨 밭은 밭주인 못지않은 상실감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비상 체제에 돌입하였다. 경험상 한번 마을에 내려온 그 놈은 분명 배가 고파지면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 분명했고, 우리에게는 또 한 번 그런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그놈을 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사냥에 제법 미립이 나기도 하던 때라 우리들은 당장 그 흔적을 쫓아 움직였지만 결국 놈의 소굴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에 그놈이 자주 다닌 것으로 확인되는 길목을 몇 개 포착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교묘한 함정, 즉 덫을 만들어 놓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중에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가 온 마을을 들었다 놓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한 나는 당장 그 길로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달려갔고, 내 예상대로 그곳에 그놈이 있었다. 반나절이 넘게 힘들게 만들어 놓은 덫, 죽창구덩이에 온 몸이 꼬치처럼 꿰인 그놈이 힘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듣기로 그놈이 평범한 멧돼지가 아니라 영살가운 느리라 불리는 멧담불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 사실을 마을 제일의 도살업자이자 동무 하늘소의 아버지이기도 한 우솔 씨에게서 처음 들었다.
“아따, 큰 것 보소. 세상에 정말 이런 게 있긴 있구마. 이건 그냥 느리가 아니라 영느리인기라. 니들 참말로 운이 좋았데이.”
“영느리요?”
“그래, 영느리. 니들 모르나? 느리들 중에 본래의 수명을 넘어 사람보다 오래 사는 특이한 느리들이 있다 아이가. 그런 느리들을 영느리라 부르는데 사납기는 오죽 사납고 또 영특하긴 얼마나 영특한지 모른데이. 해서 마 영느리 잡으려다 죽는 사냥꾼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
“그런데 이게 참말로 니들이 만든 덧에 걸려 죽었다고? 그 죽창구덩이인가 뭔가 하는 거시기에? 하이고 참말로 소 뒷걸음질에 쥐가 잡혀도 유분수지.”
“아버지요.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해체나 해주이소. 우리 오늘 이걸로 오랜만에 고기잔치나 합시데이.”
“고기잔치? 그거 좋재!”
우솔 씨네 도살장 앞에는 어느새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콩나물시루만큼이나 모여 그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황소만한 멧돼지가 잡혔다는 소식에 고기 한 점이라도 얻어 볼 요량으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워낙에 경사랄 것이 없는 마을인 만큼 모처럼 만에 들려온 희소식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워낙에 크기가 크고 가죽이 두꺼운 터에 마을 제일의 도살업자인 우솔 씨도 해체하는데 엄청 애를 먹는 눈치였다.
한참이 걸려서야 해체를 끝낸 우솔 씨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더니 조용히 나를 작업장 뒤켠으로 불러내었다.
“니 이제 이거 어쩔 기가?”
“어쩌다니요?”
“이것을 어찌 처분할 거냐 이 얘기재.”
“그야 늘 하던 대로 해야죠. 고기야 끊어서 팔면 될 일이고, 가죽은 많이 상하긴 했어도 장에 나가 거간꾼들에게 경매를 놓으면 열 닷 냥은 받지 않을까요?”
“니 아까 내 얘기를 어디로 들었노? 이건 그리 쉽게 처분할 물건이 아이다. 암, 그리 해서는 안 되재.”
“예?”
“이게 보통 느리가 아니라 영느리라 이 말이다. 사냥꾼들이 영느리가 위험한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잡을 라고 기를 쓰는지 아나? 이거 하나 잡으면 그야말로 횡재하는 거라. 가죽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거이 있는데 이게 바로 그거다.”
시뻘건 내장이 담긴 그릇을 두 손에 보물처럼 받쳐 든 우솔 씨가 내게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니, 이게 뭔지 아나? 이게 바로 내단이라고 보물중의 보물인기라. 모르긴 몰라도 같은 크기의 금덩이와 같은 값어치일걸? 상하지 않게 소금 좀 뿌리고 그늘진 곳에 잘 말리면 족히 은 백 냥은 받을 수 있을 기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선뜻 믿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게도 비위가 약해 해체작업 만큼은 주로 남에게 맡기는 내가 보기에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 징그러운 내장을 그만한 돈 주고 살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소문을 들은 것인지 나는 그 일이 있은 다음날부터 옆 마을과 가온(중심마을) 등에서 온 차인, 거간꾼들의 방문을 수시로 받게 되었다.
모두 그 목적은 하나였다. 내가 얻은 영느리의 내단을 흥정하러 온 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뜻밖에 생긴 보물에 대한 처리 문제를 놓고 나와 동무들은 날마다 우리 집에 모여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집 앞에 아예 진을 치고 기다리는 거간꾼들을 보면서 동무들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 참! 웃기지 않소? 그동안 거래 좀 터보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만나주지 않던 사람들이 지금은 한번만 만나 달라 저리 애걸복걸하는 모습이?”
그도 그랬다. 유랑민들이 일군 마을 보리울. 그래서인지 나와 동무들은 이 마을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매번 배척당하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마을이 커지고 제법 인구수가 늘어나면서 전임 군수에 의해 보리울이 다미군 관할 아래 편성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이 마을에는 그 흔한 단테조차도 없었다. 단테가 없다는 것. 그것이 가진 의미가 적지 않았다. 쉽게 말해 이 마을을 어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살인사건이 나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는 것이다. 지난해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나라에서 구휼미가 보급 되었을 때에도 보리울만은 예외였다. 큰 물난리가 나 마을의 절반이 유실되었을 때에도 마을 외적으로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행정상으로만 다미군에 속해있을 뿐, 아직도 보리울은 외딴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은 점이 있다면 세금과 군역 또한 없다는 것인데 그것을 진심으로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걸핏하면 흘러들어와 온갖 패악 질을 일삼는 옆 마을 왈패들이나 잊을만하면 어딘가에서 나타나 보호비를 뜯어가는 거지떼인지 화적떼인지 구분이 안가는 놈들. 인근 마을에 범이 나타났다는 소문만 들려와도 보리울 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떨어야 했다. 때문에 마을 촌장님이 해마다 군수님을 찾아뵙고 통사정을 해보고는 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늘 같았다. 거리가 너무 멀다, 파견할 인원이 없다, 자체적으로 단테를 꾸려보아라 등의 성의 없는 답변뿐. 그래서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한 것이다.
비록 아직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뜻이 있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단테를 조직하고 책임 구역을 나누어 분대장까지 뽑아놓았다. 그렇게 보리울 육십여 호에서 각 열 가구씩을 책임질 분대장을 선출하였고 그게 바로 지금 내 곁에 있는 동무들이다.
“그런데 반디 형. 타리 씨가 나한테만 귀띔해준 건데 길리에 있는 드팀전주가 이전에 부른 금액보다 두 배 쳐준다고 했거든.”
“두 배? 그럼 육백 냥?”
“응.”
“그럼 더 볼 것도 없지 않소? 타리 씨한테 맡겨 길리에 있는 드팀전주와 거래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럽시다.”
자신들로서는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금액에 동무들이 모두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나는 혼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젯밤 우연히 길을 가다 들은 소식 하나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은 이후로 내 머릿속은 온통 그것에 쏠려 있었다.
“아니야.”
“뭐?”
“그 사람들은 아니야. 아무래도 이 물건의 임자는 따로 있는 것 같아.”
“누구?”
“서둘지 말고 좀 더 기다려 보자. 내 예상이 맞다면 곧 그곳에서도 사람을 보내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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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덩달아 고생중인 가족들이 호들갑을 떨며 급히 나를 찾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일영가에서 마름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일영가는 현 다미군 군수의 가문으로 이곳 군현에서는 두말할 것 없이 제일가는 가문이었다. 바로 내가 애타게 기다리던 곳이기도 했지만 마름이 왔다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살짝 눈살이 찌푸려졌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를 보는 것이 나로서는 조금 불편하고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오랜만일세. 잘 지냈는가?”
“응.......”
“자네 소식은 사람들 입을 통해 꾸준히 듣고 있었네. 정말 장한 일을 하고 있더군. 역시 도련님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았던 게지.”
“.......”
“일찍이 자네가 운이 좋은 사내인 줄이야 알고 있었네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네. 산삼보다 귀하다는 영느리의 내단을 얻었다는 소문이 동리를 넘어 군현 전체에 파다하더구먼. 자네도 익히 짐작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가주님께서 보내서 왔다네. 최근 가주님께서 건강이 나빠진 소식을 자네도 들었는지 모르네만....... 허해진 기력을 보충하는데 영느리의 내단 만큼 좋은 약이 없다고 하더군. 해서 될 수 있으면 그것을 가주님께서 구입하고자 나를 보내신 것이라네. 물론 값이야 흥정을 해봐야겠지만 다른 곳도 아닌 일영가의 행사인데 자네가 섭섭할 일은 없으리라 보네만.......”
지금 꼬박꼬박 ‘자네’라고 나를 대우하며 부르는 이는 두칠이란 인물로 나와는 이미 오래전부터 낯이 익은 사이였다. 문제는 그와 나 사이가 결코 이처럼 친숙하게 대화를 나눌만한 사이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앙숙이랄까. 어린 시절을 한 집에서 함께 지냈던 그와 나 사이에 어울릴법한 단어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지만 저리 살갑게 말을 건네 오는 그의 모습이 적응이 되지 않는 나는 한동안 말문이 막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없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인간이 내가 알던 그 인간이 맞나 싶어서 말이다.
“많이 변했소.”
“그런가? 하긴 거의 육 년 만이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그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으니, 자네나 나나 참 바쁘게 살은 모양이야. 자네는 못 본 새 아주 늠름해 졌구먼.”
“인사는 이만하면 되었고...... 가주님께서 보내서 왔다고 했지? 그 문제에 대해 내가 직접 가주님을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어떻게, 가능할까?”
“자네가 직접?”
“응.”
“이보게. 내 얼굴 오래 보고 싶지 않은 자네 마음이야 익히 짐작하네만 어디 우리 가주님이 그런 일을 직접 나서서 하실 분인가? 그러지 말고 나와 흥정을 보세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도 사실 최근 가주님 건강이 많이 쇠약해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던 참이거든. 형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도 오래전부터 일영가의 은혜를 받아온 집안인데 그냥 모른 척 하고 있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
그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정을 가감 없이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자네 말뜻은...... 그러니까......?”
“며칠 전부터 내가 먼저 찾아뵈어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하고 있었어. 한데 그게 또 어려운 것이 우리 집안은 오래 전에 가주님 집안과 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잖아. 그래서 혹여나 누가 될까 섣불리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그, 그럴 수도 있겠구만. 허, 참! 나는 자네가 이리도 일영가와 가주님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 미처 몰랐네. 그런 줄도 모르고 알량한 돈푼으로 흥정부터 보려 하였으니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구만.”
더리기 그지없는 공치사가 한차례 더 오간 후에야 그와의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었다. 그도 아마 내가 순수한 의도로 그런 제안을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살면서 숱하게 체험한 진리가 하나 있다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그렇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바라마지않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대로 돌아가 내 뜻을 가주님께 잘 전달한다면 그는 그대로 생색을 낼 수 있을 터이고, 나 역시 내가 원하던 만남을 갖게 되는 것이니 서로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어찌됐든 그와 나는 서로 원하던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거래였다. 그와 나 사이에서는 처음으로 둘 모두에게 바람직한 결과가 나온 역사적인 날이 아니었을까?
“조심해서 가. 길이 머네.”
“하핫! 하루에 백리 길도 거뜬하다네. 삼십 리 정도야 눈 감고도 가지.”
나는 길게 드리운 그의 그림자가 삽짝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기억 속의 그를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바로 그의 눈빛,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억세고 검질긴 눈빛이다. 그런데 오늘 마주한 그의 모습에서는 그때의 사나운 눈빛이나 모습을 조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오늘 기억나는 것은 그저 넉넉한 미소를 달고 있는 넉살 좋은 사람뿐이다.
그는 정말 내게 갖고 있는 해묵은 감정들을 모두 털어낸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수가 없었다. 몇 십 년이 흐른 것도 아니고 고작 오륙년 지났다고 해서 그와 나 사이에 쌓인 해묵은 감정들이 먼 길처럼 아득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다만 그는 웃는 얼굴 뒤로 감정을 숨겼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처세가 몸에 베였으리라. 그도 나도 이제는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성년이 되었고, 어린 시절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며 치고 박던 우리들의 모습은 이제는 다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어느 게 더 나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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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칠이 돌아가기 무섭게 가족들이 나를 찾았다. 무슨 일로 왔냐는 것이다. 그들은 일영가에서 사람을 보내 온 것에 대해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만큼 일영가란 이름이 우리 집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다른 이유가 뭐 있겠어요. 내단을 구입하고 싶다는 거죠.”
“그래서?”
“다른 곳도 아닌 일영가에서 원한다는데 어쩌겠어요? 드려야지.”
“그래서 얼마를 받기로 했냐고?”
방금 질문은 나와 네 살 터울인 손위누이가 한 것이다. 역시 누이의 관심은 일영가 보다는 그쪽에 있었다.
“그냥 준다고 했어.”
“뭐!?”
“아버지, 어머니 말마따나 우리가 그 집안에 받은 은혜가 있는데 돈을 받고 거래하기는 좀 그렇잖아.”
“어버......”
누이는 내 대답에 더없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마침내 거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네가 언제부터 그 집안을 그리 생각했다고!?”
누이는 그대로 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는데 그런 누이를 어머니가 뜯어 말렸다. 누이야 그렇게 나올 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어버이의 반응이 궁금했다. 항상 일영가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그 은혜를 잊어선 안 된다고 버릇처럼 말씀하시는 그분들이라면 이런 내 결정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계시던 아버지가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여셨다.
“그래, 잘했다. 사람이라면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지. 이걸로 그분들에 대한 우리의 죄스러움도 조금은 덜어지겠지.”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자그마치 오백 냥이라고요. 우리가 일영가에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한 물건을 그냥 넘기는 경우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어요?”
“빚이라는 게 물질로만 존재하겠느냐. 오갈 데 없는 나와 네 어미를 거두어주신 게 돌아가신 전대 일영가 가주님이시다. 그 마음의 빚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느냐.”
“그래도 여보. 다만 얼마라도......”
“그만합시다. 우리가 그 느리를 잡은 것도 아니고, 잡은 사람이 그리 하겠다는데 우리가 무슨 명분으로 말린단 말입니까? 제 것이 아닌 것에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더욱이 영험한 느리가 준 선물이라지 않습니까. 그런 귀한 물건을 다만 재화로써 부리려 하다간 크게 화를 입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내 결정을 지지해 주셨고, 평소 아버지 말씀을 잘 따르는 어머니도 아버지 말씀을 듣곤 곧잘 포기하는 눈치였다. 다만 누이만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생난리였다. 제 돈이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팔짝팔짝 뛰더니 결국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러나 사실 나는 온갖 악다구니를 쓰다 문을 박차고 나간 누이보다 아버지, 어머니가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애초에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일로 나는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깨달았다. 정말 이 사람들에게는 기대할만한 것이 없구나. 내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말이 통할 사람들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뒤틀린 웃음 한 조각이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