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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독
톡 톡
톡톡톡
쏴아아-
창문으로 이슬 몇 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시원하게 쏟아진다. 어제 일기예보에서 비가 내릴 거라며 우산을 챙기라는 베이지색 반팔 랩스커트에 똥머리가 잘 어울리던 기상캐스터가 말하는 것을 분명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챙길 생각도 하지 않은 자신이 정말 한심했다. 기상캐스터 언니가 입은 베이지색 반팔 랩스커트는 착실하게 쇼핑 장바구니에 담아놨으면서도.
"하아-"
"웬 한숨이세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내가 못마땅했는지, 옆에 있던 내 파트너이자 동료인 승우가 말을 걸며 따뜻한 믹스 커피를 내밀었다.
이 녀석과는 벌써 6년을 함께 했다.
사람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많았던 나는 회사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았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받아주었으나 깊게 사귀지는 않았다. 그렇다보니 초반에 난 회사 내에서 아싸였다. 뭐, 자진해서 아싸가 되었지만.
그러나 승우가 온 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회사 분위기도. 나도.
*
승우는 밝은 아이였다. 나와 다르게. 사람 기분을 잘 맞춰주었고, 같이 있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즐거웠다. 또 승우는 잘 생겼다. 그래서 승우는 인기가 많았다. 다른 부서 여직원들이 승우를 보기 위해 3층에서 12층으로 올라올 정도로.
모든 게 완벽할 것 같았던 승우에게도 한 가지 결점이 있다면 승우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건 4년 전 정비실에서였다.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커피 마시기를 즐기는 조금 이상하고 기괴한 취미가 있었던 나는 평소와 같이 차가운 믹스커피를 가지고 나만의 아지트였던 정비실을 찾았다. 그날따라 유독 정비실은 어두웠고 음산할 정도로 조용했다. 회사 내 직원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장소라 그런지, 전등이 나간지 벌써 세 달이나 지났지만, 회사에선 이를 고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비실 문 바로 옆, 낡아서 이제 사용하지 않는 큰 테이블 위에 가져온 램프를 두고 불을 붙였다. 오늘은 커피를 마시며 소설책을 읽기로 하였다.
나의 소소하지만 행복한 취미 생활을 즐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려고 뒤를 돌아본 순간, 정비실 한 쪽 구석에서 손목에 피를 흘린 채 울고 있던 승우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10분 정도가 흐르고,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자켓 안 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승우의 손목을 지혈했다.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나와 달리, 승우는 무표정으로 그런 나를 그저 바라보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승우와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하게 된 나는, 승우가 고아였다는 것, 처음 입양된 집에서 가정 폭력을 당했다는 것, 그 이후 자해를 시도 때도 없이 했다는 것 등, 승우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승우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 , 승우와 난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고, 보다시피 이렇게 회사 내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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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드세요? 팔 떨어집니다."
"나 냉커피만 마시는데-"
"그럼 말고요."
"누가 안 먹는데?"
다시 가져가려던 커피를 승우의 손에서 재빠르게 낚아 채갔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니 몸이 따뜻해지는 느껴지면서 뭔가 소름이 끼쳤다.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시려던 순간,
"이거 PPT 누가 만들었어?!?! 제품 자료가 덜 들어갔잖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 속을 찌르듯 들어왔다. 누군가 회사 내 깐깐하기로 소문 난 김부장이 맡긴 PPT 제작에 작은 실수를 남겨 이 사단이 난 것 같았다. 목소리를 외면한 채 주위를 둘러보자 누가봐도 PPT를 잘못 만들어 어쩔줄 몰라하는 병아리 신입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2개월 차 인데, 요번에 외국 회사와 새롭게 손을 잡아 개발한 신제품을 소개하는 PPT를 제작하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기다니. 정말 김부장도 어지간한 쓰레기 같은 놈이다.
"이거 오늘까지 만들어야 하는데!! 이거 어쩔꺼야?!! 다들 정신 안 차려?!!누구냐고!!!!"
"아 거참 너무 하시네-"
김부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한번 더 울려퍼지자,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승우가 이를 말리기 위해 일어서는 중 이었다.
"됐어. 내가 갈게. 너 다음달에 승진이잖아. 찍히고싶어?"
승우가 일어나는 것을 재빠르게 제지한 후, 옆에서 불안에 떨며 얼쩡거리던 신입에게 다가갔다.
" 만든 PPT 메일로 나한테 보내. 그거 제품 자료지? 이리 줘."
"네?"
신입 손에 있던 제품 자료가 몽땅 담긴 종이 뭉치를 건네받는 순간,
"아!"
"선배-!"
종이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일반 종이보다 더 두껍고 빳빳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깊게 베인 손바닥에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맺히기 시작하더니, 이내 진홍빛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짧은 신음과 함께 그저 멍하니 손을 바라보았다. 승우가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어 내 손을 지혈해주었다. 신입이 옆에서 또 안절부절 못하며 나와 승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법 멋있게 도와주려했다가 이 꼴이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제법 사람들이 몰려 서로 수근대고 있었다. 아까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나 보다.
"가요. 소독부터 해야겠어요."
승우가 사람들 사이로 나를 이끌어 회사 내 작은 휴게실로 향하였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 사람들 사이로 흩어진 내 피가 묻은 종이를 바라보았다. 뭔가 기분이 쎄하고 좋지 않음을 느꼈다. 애써 무시하고 앞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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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소리가 들렸던 건,
내 착각이였을까.
(참고)
*-회상
**-회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