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지하철역 사이로 들어왔다. 빛 사이에서 먼지들이 춤을 춘다. 기침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입에서 침이 흘러나온다. 눈을 깜빡이더니 빛이 들어온 곳을 고개를 돌려 살폈다. 지하철역 주변이 환하게 보였다. 아직 새벽이다. 그래도 앞이 보인다는 것에 감사했다.
뒤통수 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일었다. 왼팔로 부들거리며 뒤통수 쪽을 만져댔다. 어딘가 툭 튀어나온 부분이 만져졌다. 나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그 물체를 잡았다. 손가락에 힘을 줘서 그 물체를 빼버렸다. 숨을 가쁘게 쉬며 그 물체를 보았다. USB였다. 그것도 최신인 100테라 바이트 짜리.
나는 몸을 일어서며 지하철역 벽에 몸을 기댔다. 한숨을 쉬며 방금 전에 경험한 듯한 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꿈에 나온 사람이 나일까?
USB를 후드티 주머니에 넣고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그 꿈이 어제 봤던 남자와 여자의 말에 따르면 그 꿈이 내 기억일 것이다. 그게 내 기억이라니? 그렇게 내가 평화롭게 있었던 때가 있었어? 내가 글을 쓴 건 또 뭐야?
‘내 기억인건가? 아니면 그냥 그 악몽에서 벗어난 정상적인 꿈?’
나는 수많은 의문을 남기며 애써 머리를 정리했다. 이것이 설령 진짜 내 기억일지라도 지금은 아무 생각하기 싫었다. 눈을 깜빡이고 두 손으로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일어서자 온 몸에 힘이 쫙 풀리는 느낌이다. 비틀거리며 겨우 손을 지하철역에 대고서야 몸을 설 수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어제의 일이 마치 꿈인 것처럼 평온했다. 노숙자들이 있던 곳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고 편의점 알바생이 쓰러져 있던 곳은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역에 비춰진 빛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이틀 전부터 정말 미쳐 돌아가네.’
나는 모레와 어제 겪은 일들을 생각하며 탄식을 가했다.
올라가는 첫 번째 계단에 도착하자 발을 멈추고는 지하철역 밖을 보았다. 비구름은 걷혔고 새벽의 하늘이 넓게 깔렸다. 딱히 좋은 풍경도 아니었고, 비가 그쳐서인지 세찬 새벽바람이 지하철역 안으로 불어왔다. 바람은 다시 내 머릿결을 휘날리게 하고 몸의 반만이 바람의 느낌을 받았다. 차라리 여기서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바람은 내 마음을 완전히 날려 버리는 녀석이다. 다시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올라서자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기관지가 따가워졌다.
계단을 모두 올라서자 하늘에서 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자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다이소 매점이 있다. 몸을 계단을 올라갔던 방향 반대쪽으로 돌렸다. 큰 길과 사이에 횡단보도가 놓여 있었다. 더 앞에는 상가아파트가 위치해 있다. 상가 아파트의 외관이 독특했는데, 외관에 동그란 구멍이 뚫린 장식 벽이 있어서 창문 밖을 불 수 있게 했다.
나는 눈을 바닥에 내리꽂고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불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정장을 입은 회사원 몇 명이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나를 보더니 대뜸 욕을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횡단보도를 건넜다. 상가아파트의 그림자가 나를 가렸다. 눈이 부신 것보단 나았다.
‘어디 숨을만한 데가.’
횡단보도를 건너며 숨을 만한 곳을 살폈다. 이곳은 내가 지금까지 숨은 골목길을 제외하면 건물 말고는 숨을 만한 데가 보이지 않았다. 그마저도 웬만한 골목길은 다 숨어보았다. 볼이 빵빵해지게 공기를 넣고는 후드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 뒤통수에 꽂혔던 USB가 만져졌다.
횡단보도를 모두 건너고 오른쪽으로 꺾고 다시 왼쪽으로 꺾어 걸어갔다. 지하철역 앞으로 몇 걸음을 걷자 나무 몇 그루와 나무 벤치가 위치해 있었다. 앉을까도 생각했지만 지금은 시위단으로부터 피할 곳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게다가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상가아파트를 지나고 낮은 건물 2개를 거치자 다시 상가아파트가 보였다. 이번에는 국민은행이 아파트 밑에 자리해 있었다. 역시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아도 ATM기가 있는 곳은 열려 있었다. 그곳에는 두어 명의 사람들이 ATM기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사람들이 날 쳐다보지 않을까 하며 지나갔다.
나는 조금 더 발걸음을 빨리 움직였다. 이젠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그래 봤자 한두 명 정도가 더 많아졌을 뿐이었다.
국민은행 옆에는 골목길이 있는데 골목길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또 반대편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 길로 들어갔다. 그곳에도 벤치가 있다. 건물 뒤쪽과 연결되어 있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진 않는다. 그래도 저곳에서 쉴 순 없다. 큰길에서도 고개만 돌려도 벤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이내 바로 그만두었다. 6개월 동안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일단 손이 기계이기에 손톱이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걷고 또 걷자 어색한 곳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상가아파트와 건물들 사이에 떡하니 있는 고물상이었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걷느라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생각보다 큰 크기였다, 예전에는 말 그대로 고물들을 모아놓은 곳이라는데 지금은 로봇들의 무덤이라고 더 불리는 곳이었다. 주위를 다시 둘러보고는 고물상 안쪽을 바라보았다. 로봇들의 무덤이라고 불릴 만했다. 로봇들의 잔해가 여기저기에 방치되어 있었다. 어제 비가 내려서인지 바닥에는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은 채로 있다. 처참한 현장이었다. 당장이라도 구토를 할 뻔했다.
그 순간, 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몸을 돌리자마자 누군가가 발로 내 몸통을 밀어냈다. 나는 밀리는 느낌을 받으며 고물상 안으로 떨어져 나갔다. 아스팔트 바닥에 몸이 쓸렸다. 급하게 정신을 차리곤 나를 찬 사람이 누구인지 보았다. 왼팔에 빨간 완장을 찬 것이 보였다. 시위단 중 하나이다.
“저기 네 동족 보니까 안쓰럽냐? 어?”
나를 발로 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늦게 찾아온 아픔을 느꼈다. 충격이 내장까지 관통한 것 같았다. 복부를 부여잡았지만 입은 굳게 닫았다. 시위단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은 왼팔로 고물상 문을 닫기 시작했다. 철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왼팔을 뻗으며 고물상 문이 닫히는 걸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문은 닫힌 후였고, 그 사람은 자물쇠로 고물상 문을 잠그는 듯했다. 애써 굳게 닫힌 철문을 두드려 봐도 돌아오는 건 고요한 정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