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유일한 과거를 떠올리자 다시 치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딴 기억이 내 유일한 기억이라는 것이 정말 뭐 같을 뿐이었다.
두 손으로 양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자 먼지가 낀 골목길이 보였다. 다리도 다 필수 없는 좁은 골목길이다. 나는 골목길 사이에서 잠이라고도 할 수 없는 쪽잠을 청하곤 한다. 시위단들만 아니면 웬만해서 지하철역에서 잘 수도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많이 통하는 길이라고 해도 직업이 없는 노숙자처럼 보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골목길이든 지하철역이든 반쯤 누운 채로 잠을 자면 과거의 일이 떠올라 몇 시인지도 알 수 없는 밤에 깨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벽에 기대며 유일한 기억에 대해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감정이 묵묵히 쌓여갔다, 이러니 내가 정말 이 기억을 뭐 같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두 손의 손가락들을 서로 끼며 기지개를 폈다. 서로 다른 모습의 팔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두 팔 모두 사람의 팔로 보일 것 같지만 오른팔에는 누구에게나 있는 정맥이 팔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기계인 것이다. 반면에 왼팔은 정맥이 확연히 보인다.
그리고 내 왼팔엔 아직 총에 맞은 자국이 있다. 이젠 아프지도 않지만 흉터는 영원히 남을 것 같다.
나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잡았다. 따뜻하고 탄력 있는 피부가 느껴졌다. 몇 초가 지나자 오른손의 차가움으로 인해 왼팔을 잡은 부분이 차가워졌고, 왼팔을 놓아야만 했다. 나는 반대로 왼손으로 오른팔을 잡았다. 차갑고 매끈한 이질적인 피부가 느껴졌다. 늘어나는 플라스틱 같은 느낌이었다. 따뜻함은 없었고, 단지 차가움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게다가 반 이상은 인조피부조차 없다. 감촉이라고는 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있는 고무의 마찰력이 느껴졌다.
할 때마다 내 몸의 반이 기계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기지개를 피고 팔을 내려놓았다.
골목길 왼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골목길의 먼지와 낙엽들이 여기부터 골목 끝까지 휘날리고 내 머리카락도 휘날렸다. 잠시는 쌓여온 이 묵묵한 감정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기를 원했다. 바람의 시원함은 왼쪽 팔과 오른쪽 얼굴과 머리, 위쪽 복부를 제외한 몸통, 왼 다리와 오른쪽 정강이만이 느꼈다. 그 나머지 부분은 기계인지라 아무 느낌도 얻지 못했다. 감정이 날아가기는 무슨, 울적한 마음이 더 쌓였다.
바람이 그치자 골목은 처음의 모습대로 다시 먼지가 내려앉고 낙엽은 천천히, 여유롭게 떨어졌다. 나는 왼손으로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넘겼다. 그 와중에도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진짜가 아닐까 생각했다. 실은 아주 얇은 기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된 이후로 머리를 감은 적이 없는데 이렇게 부드럽게 찰랑거리다니. 이미 기계일 거라는 생각이 반쯤은 들어도 머리카락이 기계일 거라는 생각은 바로 집어치웠다. 이미 기계인 부분이 많고 이 기계들이 나의 인생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기계들이 내 몸의 일부분이라는 것이 증오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푸른 청바지에 붙은 먼지를 양손으로 털어냈다. 어제저녁에서부터 묻은 먼지는 정말 고생을 거쳐 묻은 먼지였다. 어제 저녁에 시위단 중 두 명과 추격전을 벌였다. 15분 동안 1킬로미터 이상을 뛴 정말 미친 짓이었다. 골목길을 이리저리 지나고 도로의 차들을 멈춰가게 하며 도로를 가로지르며 뛰어서야 따돌릴 수 있었다. 언제부터 따돌릴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는 지금 있는 골목길에서 잠을 청한 걸로 기억한다. 얼마나 졸렸으면 그 뭐 같은 기억이 이번에는 좀이나마 늦게 떠올랐을까 싶다.
원래 같았으면 이른 새벽에 깨어하는데 오늘은 완전한 아침이 돼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잠이야 조금이라도 더 잤을지언정 이런 곳에 아침까지 있으면 그놈들, 즉 시위단이 나를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들은 나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몰라도 재빨리 이 골목길을 나가야 했다. 원래는 이리저리 이어져 있는 골목길을 찾아 밤을 보내는데, 이번엔 너무 힘이 부쳤던 탓일까, 길이 막혀 있는 골목길에서 잠을 자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골목길 밖을 보니 답답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는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딛고 일어섰다. 그러자 발을 한 곳 에 두지 못하고 곧바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버틸 정도이지만 한동안은 뛰지 못할 것 같다. 나는 골목길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줍고는 골목길 벽에 ‘X’자 표시를 했다. 이유는 당연히 시위단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골목길 벽이 드드득 소리와 갈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하얀 가루가 남는 표시가 되었다. X표시를 확인하고 나뭇가지를 떨어트리며 골목길 밖으로 나갔다.
골목길 밖을 나가자 여러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내가 한 발자국씩 길을 걷자 신선하지는 않지만 시원한 가을 공기가 느껴졌고 차도와 맞닿아있는 곳에는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밑에 떨어져 있는 은행열매는 내 코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것이 신경 쓰였다.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자마자 나를 쳐다보면서 야유를 보냈다. 간접적이어도 웅성대는 소리만 어지간히 들어도 들리는 조롱과 야유의 목소리였다. 기계로 된 부분은 웬만해서는 다 가렸다. 상체는 반 팔 흰 티에 회색 긴 팔 후드티를 입고 하체는 청바지를 입었다. 모자도 썼었지만 어제 시위단 중 몇 명과 추격전을 벌이느라 모자를 놓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오른쪽 눈과 볼에 살짝 있는 푸른 선을 가릴 수단이 없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두 달 전부터 시위단이 내 얼굴을 퍼트리면서부터 사람들은 나를 ‘기계’라 부르며 욕해댔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몸의 반이 기계이기 때문이다.
나를 욕하는 사람들은 모두 6개월 전까진 로봇들에게 직업을 뺏긴 채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두 달 전부터 시위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한들 이런 건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나처럼 몸의 일부가 기계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그만큼 시위단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기에 사람들은 우리를 더 핍박한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선은 초점을 잃은 채로 계속 앞만을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몸의 반이 기계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지금까지 내가 기계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조롱을 듣고 나면 나의 이 확고한 생각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내가 과연 태어났을 때는 완벽한 인간이었을까?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누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그 이후의 생각은 한 가지 뿐이었다.
‘나 인간 맞아?’
이 생각이 들고는 다시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을 확고히 다지기 시작한다. 도저히 내가 기계라고는 인정하기 싫었고, 내가 기계라고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의 짐을 쌓고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거리를 걸으며 보이는 광고판에는 ‘로봇을 없애자!’라는 문구가 써져 있었다. 말 그대로였다. 로봇을 박살내자는 얘기였다. 저마저도 시위단들이 만든 것이다. 저들은 로봇으로 인한 실업률이 90%이상이 넘어가자 일어난 ‘로봇 대학살’ 이후로도 남은 로봇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아왔다. 이마저도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이젠 몸의 일부가 기계인 사람들도 핍박하고 심하면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핍박받아온 사람들 중 한 명이 나이며, 몸이 이렇게 된 이후로 처음 본 광경이 6개월 전에 일어난 ‘로봇 대학살이었다.
광고판을 보며 6개월 전의 일을 떠올릴 뻔했다. 그때의 일은 이미 뇌리에 꽂혀 가끔씩 내 머릿속을 좀먹곤 했다. 게다가 그 악몽보다도 지금의 상황이 더 악몽 같은 현실이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욕을 먹으며 거리를 나아갔다. 오늘따라 차가 도로에서 많이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저만치 멀리 있는 도로변을 보았다. 갑자기 숨을 멎을 것처럼 소스라쳤고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왼팔에 빨간 완장을 찬 사람들이 저만치 멀리 있는 도로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위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