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을 선고하는 바입니다.
-Prologue of End-
마치 초봄 하늘에서 떨어지는 함박눈처럼 얼어버린 그녀를 품에 안은 이현은 왕으로서의 체통을 잊고 펑펑 목 놓아 울며 그녀의 뺨에 방울방울 눈물을 떨군다. 설움과 미안함, 사랑과 괴로움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온도를 담은 눈물을. 예쁜 아이가, 소중한 아이가, 사랑하는 아이가 이현의 정비에 의해 죽어버렸으니 울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북받친 감정도 정비에 대한 배신감도 소중한 이의 죽음도 이현이 견디는 건 무리였다. 그가 고작 약관(弱冠) 조금을 넘겼을 지금인데 무리가 아니면 무엇이랴. 아니 무리가 아닐 터다. 무리 일리가. 무리 이상의 것이 찾아와 이현을 괴롭게 만들고 있다. 눈가는 눈물에 잠겨 잔뜩 젖어있고 머릿속에 할 말들은 제대로 떠오르질 않고 있다.
충격에 의한 현기증에 꽉 쥐어 잡혀, 안의 온갖 살갗들이 내부에서 갈기갈기 뜯기는 고통이 저를 지배하고 있음에도 품의 서월을 놓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 잔인하게도 아름다운 서월의 모습은 그저 아름다움뿐으로 남질 않아 이현에게 우아하게 보일 정도의 화사한 실루엣을 가진 짙은 우울을 선사한다. 목구멍을 넘지 못하는 말들을 빼고 남은 말들이 물 범벅이 되어 짤막짤막 밖으로 나온다.
“서월아, 사랑한다. 어찌 이리 떠나느냐..”
서월의 뺨에 마치 서월의 눈물인 것 같은 그의 눈물을 이현은 저의 검지로 쓸어낸다. 차가워져 버린 감촉, 웃어주던 얼굴은 이제 없다는 것에 이현은 곧장 실성해버릴 것만 같은 박탈감을 느끼지만 억누른다. 끅끅, 가까스로 버티며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아낸다.
그는 그의 후궁, 하지만 더 없이 사랑하는 서월을 그의 침대에 고이 뉘였다. 그리곤 그 옆에서 제 자신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에 파묻었다.
그렇게 조선의 한 왕이 사랑하는 여인의 옆에서 무책임하게 죽어버렸다. 후대도 없는데 조선을 덜렁 남겨두고서 떠나버렸다.
서월은 그런 이현을 보고 있다. 이현의 품의 자신의 주검도 이현도 한 시선에 담고 있다.
“누구십니까?”
제 앞에서 우는 얼굴이 흐릿한 한 청년까지도.
***
“...하. 뭐 어쩌자는 거야.”
서늘하고 시린 푸른 새벽, 기분 잡치는 좆같은 꿈으로 눈을 떠버렸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 자극 없이 깬 것 치고 몸이 무거웠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꿈을 덜 꿨다는 것.
나의 시점은 서월이다. 늘 나는 죽으며 시작한다. 다음으로 넘어가면 내 앞에서 울던 남자와 함께 하얀 꽃이 만개한 초원으로 가서 나는 눈물을 떨군다. 정말 투명한 눈물 줄기가 톡 떨어지고 만다.
거기서 꿈은 끝난다. 질리도록 똑같고 질리도록 평생을 이 꿈을 꿨지만 남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남자에게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도.
“..x발.”
습관 밴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거짓말 조금도 보태지 않고 한평생을 같은 꿈을 꿨고 오늘은 특히나 짜증이 났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일어나는 감각부터가 거슬렸다. 아니면 이제서야 이렇게 반복되는 꿈에 질린 건가. 생각하는 것조차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라서 엷은 한숨 한 번, 손으로 머리를 헝클리고 다시 누웠다.
이젠 안 봐도 지금이 몇 시인지 정도는 안다. 시침은 4와 5사이 즈음 분침은 7과 8사이에 위치해 있겠지. 안다, 다 알아. 몇 년을 이렇게 살았는데. 자그마치 28년 줄곧 이렇게 살아 왔는걸.
출근까지 몇 시간 남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자야 버틸 테니 억지로 억지로 눈을 붙였다.
이런 새벽을 보낸 후 눈을 뜨면 별로 많이 지난 것도 아니지만 햇볕이 창문으로 들려 하는 아침이다. 남들 출근하고 등교하고 하는 그런 아침. 나라고 남들하고 다를 바는 없기에 출근준비를 한다.
알람시계보다 일찍 깨어나버려서 폰은 이제야 요란스러운 소리로 이미 침대에서 떠난 나를 깨우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심히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아침을 준비해 식탁에 앉으면 7시.
“아놔. 좆됐네.”
실상 아침이라는 사치와 여유부릴 시간은 아니었다. 살인적인 업무량을 남겨놓고 퇴근한 지난 불금의 내가 있었고 주말에 출근을 하지 않았으며 그 업무는 늘어나면 모를까 줄어들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미룰 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허?”
생각하다 보니 남겨놓은 건 판결문이지만 오늘 쌓일 건 재판과 그 재판의 판결문이었다. 이 생각은 대강 만든 샌드위치 대충대충 감싸서 손에 들고 문을 나서게 만들었고-
시끄러운 도로 위에서 달리게 만들었다. 그러다가도 신호에 걸리면 아침 소음이 귀를 찔러댄다.
“Oh, come on.. No..no.. no.. Don’t do that.. Ouch!!! Fuxking my face!!”
창문을 다 열어놓고 화장 번졌다고 욕하는 어느 동네 얇디 얇은 남자의 목소리나,
“Oh, sweetie.”
“Oh, honey.”
아침부터 애정행각하며 물고 빨고 난리가 난 커플이나,
“Dude, she’s a dime.”
그 커플네 여자를 탐내는 여자 같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음들이.
추가적으로 내가 샌드위치를 먹는 소리까지.
여기는 미국 뉴욕.
뉴욕법원으로 향하는 도로 위이자 나의 출근길이다.
“Good morning, Sia.”
도착은 7시 30분.
먼저 와있던 비서, 보니타가 엷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주었다.
“Good morning, Bonita.”
업무를 설명 받고 난 뒤에 보니타에게 할 일을 맡기고 나도 내 자리에 앉았다. 타자를 두드리자니 왠지 모르게 힘 빠져서 멍을 때리고 있는데 흐릿한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윽.”
그리고 핑 도는 두통과 함께 눈의 초점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지만 열이 나거나 하는 감은 없었다. 두통도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모든 것이 제 점을 찾았을 때 흩어졌던 흐린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라고 하오.’
‘그대 나와-..을 약속하지 않겠소?’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보이며.
“..뭐야.”
장면의 주인은 꿈 속의 그 우는 청년이었다.
똑똑-.
흐릿한 장면의 방문을 기준으로 전과 비슷하게 생산성 없이 가만히 있는데 보니타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It’s time to go to trial, Your Honor.”
배시시 웃는 모습과 장난스런 어투.
‘벌써 재판 갈 시간이라고? 아까 10시라 하지 않았나?’
보니타가 장난스레 ‘재판가실 시간이에요, 재판장님.’하고 말했다지만 보니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일종에 그녀의 말투. 평소에 식사하다가도 혹은 비꼬거나 할 때 ‘예. 어련히 그러시겠어요, 존경하는 재판장님.’하고 말하던 그녀였고 오늘도 딱 그런데..
근데 시계를 바라보니 10시가 맞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장으로 향하고 있긴 하지만..
‘출근해서 곧장 멍만 때렸는데 2시간이 넘게 지났다고?’
속임수라 할 수도 없이 재판은 진행된다.
…
재판을 본 후에는 자연스레 업무에 쫓겨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날은 저물어가고,
“M’lud, are you going to work late again today?”
보니타가 들어와 어느새 캄캄해진 사무실 안의 불을 켜주었다.‘이렇게 일하시면 눈 상해요’ 하는 말과 함께.
“I just ended up this way. I'll leave work at least at midnight. So go ahead.”
일순 밝아진 사무실 때문에 눈이 적응을 못해 표정을 약간 찡그리며 말했던 것 같다. 보니타는 어깨를 으쓱이고 ‘일이랑 뜨거운 밤 보내세요, 존경하는 재판장님.’을 의도한 군소리들을 구시렁거리며 문을 닫고 나갔다. 뭐 제대로 들을 마음은 없어서 한 귀로 들어 한 귀로 흘렸지만.
가만히 있다가도 뭔가 아니꼬우면 별거 아닌 군소리로 나를 쪼아대곤 하던 그녀이기에 ‘데이트 깨졌나..’하는 생각이고 가볍게 넘겼다. 평소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조금 까탈스럽고 유난스러운 비서니까.
…
그래서.. 방금도 그런 줄 알았다.
습관이라는 미친 것에 찌들어서 집에 왔는데도 보니타가 잔소리를 하는 줄만 알았다. 아무리 일 때문에 보니타랑 많은 시간을 보낸대도 그렇지.
제대로 미친 년.
“하아.. 진짜 서럽네. 이 넓디넓은 집에 나밖에 없어, 늦게까지 일하고도 대화할 사람도 없어. 뭐가 이렇게 비참하냐.”
테라스난간에 기대어 캔 맥주를 망설임 없이 깠다. 내일도 일을 나가기는 마찬가지고 곧 잘 시간이, 아니 지금도 충분히 잘 시간인데. 마시기 직전. 목넘김 소리가 나기 전 내 맞은편, 그러니까 거실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이 이게 무슨 꼴이오?”
어깨를 내려와 쇄골 아래에 닿는 선명한 은빛 머리칼과 이제껏 본 적 없는 신비하도록 푸른 눈.
“내가 아주 그대 없는 동안 치울까 하다가 구박은 주고 치워줘야겠다 싶어 그대로 두었소.”
책이나 TV에서나 보고 듣던 예스러운 말투를 한국어로 구사하는..
“야 x발. 너 뭐야.”
남자.
그것도 우리 집에서 날 기다리던, 나보다 먼저 와있던 남자다. 들어오고서 아무런 인기척을 못 느꼈고 들어온, 심지어 들어올 사람조차 없는데!
어떤 미친 새끼가 40층 높이의 건물을 기어올라오나?
무슨 수로도 여기로 들어올 수 없기에 떠오른 이상한 발상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든 일단 무단침입자이고 어떤 개 좆 같은 짓을 했을지 모르기에 제압하려던 그때,
“어허, 그대. 저급한 욕설은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소. 또-,”
여유롭게 내 양 손목을 가벼이 쥐고 코 앞에서 웃는다.
“겁 없이 이리 달려들면 다치지 않겠소?”
분명 힘을 주는 느낌이 아닌데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있는 힘껏 벗어나려 하자 또 가볍게 웃으며 손을 놓아주었다.
“너, 너 뭐야. 뭔데 여기 있어.”
그가 잡은 손목에 온기가 느껴졌다. 적어도 헛것을 보는 건 아니라는 건데..
“아 참. 그대는 놀랐겠소. 나는 초련이라 하오.”
“허어? 자기소개 듣자고 한 말이 아닌데?”
능청거리는 꼴에 웃는 얼굴은 볼만하지 못했다. 뜯어보자면 말 뜻과는 맞을 수 없는 얼굴이긴 했다. 상황만 이렇지 않았다면 ‘끝장나게 잘생겼네’소리가 절로 나올 수 있는.
아니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다. 퇴근하고 오자마자 무슨 불상사인가. 들어왔을 땐 집이 지저분하다며 잔소리하던 게 말귀도 못 알아먹고 저러고 있다니.
“아아. 미안하오. 나는 그대 사는 세상 밖의 천계. 천계의 신이오.”
아, 진짜 헛것을 보고 있구나.
…
“뭐래.”
저거 멀쩡하게 생기고 멀쩡하게 말하는데 역시 한국말을 해서 그런가?
“또라이야?”
천 뭐? 내가 꿈을 꾸나? 나 원래 이런 망상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데. 아님 헛것을 볼 정도로 요즘에 무리를 했다거나.. 그래. 오늘도 이상한 형상이 좀 일어나긴 했어.
“엑. 그대. 욕설을 입에 담을수록 피폐해지는 건 그대라오. 또, 나는 그런 부류도 아니고 말이오.”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눈썹을 내린 채 찡그린 미간은 ‘불만은 있지만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는다.’라는, 흔히 말하는 아니꼽고 언짢은 감정을 담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한 편으로는 비죽이는 입술이 붉은 게..
아니, 이럴 게 아니고. 거 참. 얼굴 거슬리네!
“어떻게 들어왔어? 뭔데 들어와있냐고.”
“아까 말했잖소. 나는 초련이고, 천신이라고. 그리고 들어온 건.. 순간이동이라 표할 수 있겠소.”
아니 이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계속 주장하는 게 진짜라도 되는 것처럼. 천신은 뭐고 순간이동? 무슨 판타지 소설이 되기라도 해?
“하, 아니.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내가 한 수 접고, 그래 네가 천신이라고 하자. 그게 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그게 네가 여기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어?”
“물론이오. 나와 그대가 약혼했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