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남편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이전처럼 사늘한 시선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당신이 나를 바람난 년으로 취급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은 단지 시선만 사늘할 뿐이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묻는 자체가 상상 임신을 하듯이, 하지도 않은 외도를 스스로 실토하는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마음 속에서 가끔 그 희한한 놈이 떠오르는 것도 상상 임산을 하듯이 자신이 바람이 난 듯한 기분을 주는 데 한몫을 했다.
남편이 무슨 불만이 있는지 말을 하지 않은 자체만으로도 애리에게는 공포였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는 시간만 많았지, 아무런 진전도 없이 세월만 계속 지나갔다. 그 사이 남편은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와 방구석에 쳐 박혀 TV나 보던가, 가끔씩 집 근처를 배회하듯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길을 걷거나 강변을 걷는 게 그의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간혹 애리는 감시 받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오래 전으로 돌아가보면 이런 게 부부의 일상적인 생활이라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단지 남편이 예전처럼 밝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게 문제였다. 어떤 때는 남편이 정년퇴직하고 오갈 데가 없는 영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땐 측은한 마음이 들다가도, 원인을 죄도 없는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무언의 시위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때는 화도 나고 불안하기도 했다. 남편의 이런 행동들은 정신의 갈피를 흐트러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 던 어느 날 애리는 돌발적인 사건으로 남편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멀리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날은 휴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남편은 강변을 한 바퀴 돌고 가계 주위를 얼쩡거리다가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때 두희 남편이 예고도 없이 가게로 쳐들어와 다짜고짜 애리를 다그쳤다.
“허병식이와 싸돌아 다닌 년들 이름 다 불어. 같이 골프 치러간 그 놈도.”
소란 소리에 남편이 후다닥 뛰어 나왔다. 그러나 애리는 남편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남편만 없었다면 오히려 휘파람을 불듯이 줄줄이 두희의 지저분한 짓거리를 모조리 불어버리려고 했다. 부는 도중에 그 놈이 누구인지도 같이 물어 보려고 했다.
도대체 어떤 놈인지 궁금한 건 애리도 마찬가지였다. 이 기회에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다. 그러나 남편의 출현으로 물어볼 기회도, 필요도, 없게 돼 버렸다. 애리를 벌레 보듯이 사늘하게 대했던 남편이 어깨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주두희 남편을 배로 밀쳐 버리듯이 주두희 남편 앞에 바짝 붙여 서서 노려보며 따지고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당신 마누라 바람 난 걸 왜 우리 집사람에게 따져요?”
애리는 귀를 의심했다. 눈물도 펑펑 흘릴뻔했다. 그러나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 동안 외면하고 냉대했던 차디찬 눈매가 제대로 임자를 찾아가긴 했지만, 남은 뒤처리는 당연히 자신의 몫이란 건 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주두희 남편은 주두희처럼 주둥이만 나불거리고 나가버리면 이 집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떠들고 있는 말들은 바닥에 기름을 붓고, 불 붙은 성냥을 던지는 짓과도 같았다. 뒤처리는 고스란히 애리 몫이란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주두희 남편이 고성에 장단을 맞추려는 듯이 삿대질까지 해대기 시작했다. 그가 쏟아내는 말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아내에 대한 존중은 애당초 없었지만 이렇게 욕을 하는 짓이 자기 얼굴로 침 뱉기란 걸 전혀 모르는 인간임이 분명했다.
오래 전에 남편이 상종할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 걸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길가던 사람들이 들어도 민망할 정도로 자기 아내를 거의 창녀 취급하는 말만 골라서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했어야 했는데 길가는 사람들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해놓고, 애리도 똑 같은 년이라며 각인시켜주기 위해, 손가락을 애리 눈으로 향해 놓고 실제로 그렇게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온 동네에 소문을 퍼트려 애리에게 망신을 줄 작정을 하고 온 게 틀림없었다.
“당신 마누라나 그 년이나 똑같아. 허병식이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어떤 짓을 했는지 내 입으로 꼭 말을 해야 알겠어.”
그렇잖아도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죽을 인상을 쓰고 있던 남편의 얼굴이 더 일그러지면서 애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애리가 강력하게 부인하는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봤다.
“그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년이 누구야?”
애리가 입술을 툭 내밀며 조두희 남편 쪽으로 보내며 어깨를 위로 꿈틀했다. 남편은 무슨 말을 하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굳어진 표정으로 얼버무리듯이 조두희 남편에게 물었다.
“설마...... 당신 마누라를 그년이라고 했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새끼야!”
말이 나오기 무섭게 애리 남편을 잡아 먹을 듯이 성큼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 섰다. 아직까지 주먹다짐을 벌일 자세들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애리는 방어를 하던 공격을 하던 말리던 어떤 식으로든 준비태세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치면서 비웃으며 말을 했다.
“당신이 당신 마누라를 그 년이라고 했으니 나도 그년이라고 해도 되겠네.”
남편이 일발 장전을 하듯이 숨을 고르며 주두희 남편을 노려 보고 있었다. 주두희 남편은 여전히 흥분된 상태로 씩씩대기만 했디. 고함만 지르지 않고 차분하게 먼저 얘기를 했으면, 남편은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자초지종을 물어보며 받아줬겠지만, 그렇잖아도 인간 이하로 취급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거친 말에 고분고분하게 대할 필요가 만무했다. 바로 총알을 날려 버렸다.
“그년이야 원래 그렇다고 온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나 있는데 그게 뭐라고 별스럽게 떠들고 있어? 지나가는 개한테 물어봐. 당신이나 당신 마누라나 똑같다는 데 아니라고 할 개가 있는지? 왜? 어떤 놈이 여자 소개시켜준다며 골프장에 갔더니, 데려 온 년이 당신 마누라였던 모양이지. 당신 마누라가 원래 그런 년인 거 몰랐어. 아무데나 공짜라면 기를 쓰고 쫓아간다는 소문이 연습장에 파다하게 나 있는데 어떻게 혼자만 모르고 있었어? 주야로 벌은 돈을 다른 년한테 뿌리지 말고 웬만하면 마누라한테도 좀 주지 그랬어. 당신이 교대근무 하러 들어가서 벌은 돈을 마누라 주려니 아까웠어? 당신이 밤새도록 근무할 동안 당신 마누라는 골프치고 뒤풀이까지 한 얘기도 들은 그대로 해줄까? 증인 필요하면 증인도 데려오지.”
애리는 남편의 말에 속은 시원했지만 덩치 큰 남정네 둘이 당장이라도 치고 박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어 불안하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쳐 다닐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