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해요?”
토요일 오후 1시, 한강 공원 잠원지구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두 남녀. 바로 수민과 재영이었다. 재영은 직접 싸온 샌드위치를 도시락통에서 꺼내 수민에게 건넸다.
“우와, 샌드위치까지 싸오시다니. 이걸 다 직접 싸신 거예요? 전 그러고 보니 한강에 돗자리 펴고 놀 생각으로 왔으면서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왔네요.”
“다음 블로그에 있는 레시피보고 만들어봤는데, 어떤지 한 번 먹어봐요 수민 씨. 나름대로 콜드컷 햄도 넣고 삶은 계란도 으깨서 넣어봤는데. 헤헤.”
수민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초록색 오이와 노란색 계란, 연한 핑크빛 콜드컷 햄이 귀여운 색깔만큼이나 조화를 이뤄 입 안에 고소함이 꽉 찼다.
“어쩜, 재영 씨 이렇게 요리 잘 하는 줄 몰랐어요. 진짜 맛있어요.”
재영은 맛있게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 수민의 얼굴만 봐도 흐뭇한 듯 연신 웃어댔다.
“재영 씨도 좀 먹어요.”
수민의 말에 재영이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한입만 먹여주면 안 돼요?”
“네? 하하하.”
한입만 먹여달라는 재영의 애교에 수민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내심 싫지 않은 듯 샌드위치를 들어 재영의 입가에 댔다.
“자, 먹어요.”
“히힛”
재영은 참새처럼 입을 있는 한껏 크게 벌리고 수민을 바라봤다. 샌드위치를 입에 넣어주자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앗! 마요네즈가 좀 많이 들어간 것 같아요. 다음엔 참치 샌드위치도 만들어볼게요. 마요네즈는 좀 적게 넣어야겠다.”
야심차게 맛을 느끼며 혼자 중얼거리는 재영의 모습에 수민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남자랑 연애하고 결혼하면 참 마음이 편하겠다.’
그때 수민의 휴대폰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재희였다. 평소 밖에 나가 있는 수민에게 좀처럼 전화를 걸지 않는 자유방임주의 엄마 재희가 무슨 일일까.
“네, 엄마.”
“수민아. 큰아빠가 쓰러지셨어. 지금 병원에 가보려고 하는데 너도 올 수 있니?”
“쓰러지셨다구요? 무슨 일이에요?”
“뇌졸중이래. 경황이 없어서 자세한 건 병원에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전화를 끊고 난 수민을 재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누가 쓰러지신 거예요?”
“큰 아버지요. 뇌졸중인 것 같다는데 자세한 건 병원에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대요.”
“아...수민 씨. 병원 가봐야 되죠? 제가 지금 데려다줄게요.”
도시락까지 바리바리 준비해온 첫 데이트. 하지만 재영은 아쉬운 마음을 접고 주저 없이 수민을 병원에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미안해서 어떡해요 재영 씨.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한강에 오자마자 일어나게 생겨서.”
수민의 사과에 재영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오늘 아니라도 우리 자주 볼 거잖아요.”
다행히 병원은 한강 잠원지구와 지척에 있는 강남성모병원이었다. 한강을 출발해 교통체증을 뚫고 도착한 재영의 차가 병원 입구에 섰다. 재영은 마음 같아선 함께 내려 병문안이라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주제넘은 행동인 것 같아 머뭇거렸다. 그때 수민이 선뜻 제안했다.
“재영 씨, 괜찮으면 병실에 같이 갈래요?”
한편으론 첫 번째 데이트에서 만나자마자 자신 때문에 재영을 돌려보내는 게 미안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이참에 부모님에게도 재영을 인사시키고 형준에게도 당당하고 매몰차게 선을 긋고 싶은 것이 내심 수민의 마음이었다.
“정말요? 저 같이 가도 돼요?”
재영은 수민의 제안에 들뜬 표정으로 흔쾌히 병실을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근데 병문안 올 거면 쥬스라도 사들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급하게 오느라 빈손이네요.”
갑자기 긴장해서 중얼거리는 재영을 대동하고 수민은 병실을 물어 찾아갔다. 병실엔 성재권 회장이 누워있고 양 옆으로 홍명화 여사와 재희, 연준이 서 있었다. 성원식 회장은 거동이 불편해 집에 누워있느라 오지 못했다. 홍 여사와 재희, 연준 모두 수민과 재영을 보자 눈이 동그래졌다.
“큰아버지, 상태가 좀 어떠세요? 많이 편찮으신 거예요?”
“수민이 왔구나...괜한 걱정을 끼쳤구나 내가 쓰러져서.”
성재권 회장이 힘겹게 대답했다. 모두가 수민의 옆에 선 재영의 존재를 궁금해 하는 가운데 재영이 먼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큰아버님께서 아프신데 이렇게 제 소개를 올려도 되는 건지 좀 송구스럽지만 저는 유재영이라고 합니다.”
막상 이름을 말하고 나니, 재영은 ‘수민의 남자친구’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성원그룹 패밀리의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섣불리 남자친구라고 말했다간 수민을 곤란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이 수민에게 남자친구가 맞는 건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때 팽팽한 침묵을 깨고 연준이 물었다.
“저기, 이름은 알았고 수민이랑은 무슨 관계신지?”
“네? 아... 그게...”
수민의 눈치만 보는 재영에게 이번엔 재희가 물었다.
“어머, 혹시 수민이 남자친구? 반가워요. 난 수민이 엄마에요. 어머머, 수민이 남자친구 소개받는 건 처음인데. 아니 우리 딸이 남자친구를 사귄 게 처음인 건가? 호호호. 인상은 좋네. 무슨 일해요?”
아픈 사람을 아래 두고 재희는 호들갑스럽게 웃어댔다. 어색한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 수민이 입을 열었다.
“다들 놀라셨죠? 제 남자친구에요. 근처에 있다 같이 왔어요. 지금은 큰아버지 아프신 게 우선이니까 나중에 천천히 소개드릴게요. 그나저나 큰아버지 병세는 어떠세요?”
‘남자친구’라는 소개에 가장 들뜬 사람은 재희였다. 아무리 새엄마라지만 딸의 남자친구를 살면서 처음으로 정식 소개받는 순간이었다. 재희는 들뜬 마음을 꾹 누르고 대답했다.
“큰 아빠 뇌졸중은 과로 때문이라네. 의사가 당분간은 일을 쉬시는 게 좋을 것 같대.”
“그렇구나...큰아버지 빨리 나으셔야할텐데...”
그때 병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형준이었다.
“아버지, 어떻게 되신 거예요?”
입으로는 아버지를 찾으면서도 형준의 눈빛은 재영에게로 향했다. ‘찌릿’ 강하게 째려보는 시선에선 마치 우주를 감싼 오로라처럼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형준아, 너희 아빠 너무 과로하셨대. 지금부턴 좀 쉬셔야 된다고 하네 의사가.”
아무 것도 모르는 재희가 자신의 오빠 성재권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 장손 형준이 어깨가 더 무거워지겠다.”
옆에 서있던 홍 여사가 한마디를 보탰다. 성재권 회장이 휴식을 위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 형준의 역할이 더 커지는 건 당연한 일. 형준은 일단 “걱정 말라”며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아버지 이렇게 아프신데 좀 쉬면서 건강 회복하셔야죠. 제가 열심히 잘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이 말을 하면서도 형준의 시선은 계속 재영에게로 향했다. 시종일관 째려보는 눈빛이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연준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오버해서 크게 말했다.
“그래 형 걱정 마! 큰아빠 빨리 나으실 거야. 아참, 형. 인사해! 이쪽은 수민이 남자친구래. 이름은 유재영? 맞지? 헤헤.”
형준이 수민과 함께 방에 들어가 찰나의 키스를 나눈 그날 밤, 사실은 목격자가 있었다. 수민에게 “치킨을 시켜먹자”고 방문을 두드리려던 연준은 방에서 나는 목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모든 걸 정확히 듣진 못 했지만 10분이 채 안 돼 씩씩거리며 방에서 나온 형준의 모습을 목격했을 때 둘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건 아닌지 잠시나마 의심했던 연준이었다. 곧이어 ‘말도 안 돼’라며 자신의 상상을 비웃어 넘겼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그건 상상이 아닌 사실이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수민에 대한 형의 감정을 조금은 알아차린 연준. 지금 이 참에 수민의 남자친구를 확실히 소개해서 형을 빨리 금지된 사랑에서 빠져나오도록 정신 차리게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내가 오늘 처음 봤지만 우리 수민이랑 재영 씨랑 아주 잘 어울리네 그래. 하하하. 오빠로서 안심이 되는 걸? 하하하.”
과하게 오버하는 연준의 말을 형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계속 재영을 노려볼 뿐이었다.
“우리 몇 번 마주친 적 있죠?”
형준은 재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어 재영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앗! 네 형님. 손힘이 굉장히 세시네요.”
“형님? 내가 왜 당신한테서 형님 소리를 들어야 되지? 미안, 원래 좀 꽉 움켜쥐는 버릇이 있어요. 내 걸 남한테 뺏기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거든.”
갑자기 이글거리며 불타올라 중얼거리는 형준의 모습에 아무 앞뒤 상황을 모르는 홍 여사와 재희는 당황했다.
“형준아, 너 아버지 때문에 많이 예민해졌구나.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오빠가 이렇게 쓰러지니 걱정이 많이 되는데 넌 오죽하겠니.”
“그래그래, 형. 다 괜찮아질 거야. 형이 요즘 일도 많은데 큰아빠까지 쓰러지셔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보네요. 하하.”
상황을 수습하려는 연준의 노력에 홍 여사와 재희는 다행스럽게도 감지하지 못 했다. 형준과 재영, 수민 세 남녀 사이의 이상한 관계를. 그리고 홍 여사는 연준을 타박했다.
“연준이 너, 형 좀 도와라. 너도 이제 망아지처럼 그만 놀고 다녀. 입사해서 형도 돕고 니 큰아버지도 도와야지.”
졸지에 화살이 자신에게 쏠리자 연준은 비장한 표정으로 각오를 다졌다.
“알겠어 할머니! 내가 마음을 잘 안 먹어서 그렇지 또 한 번 마음 먹으면 끝내주게 하잖아.”
할머니와 손자의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형준은 재영을 재영은 형준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봤다.
그때 갑자기 수민이 재영의 손을 잡았다. 아직 한 번도 잡아본 적 없는 재영의 손을 일부러 보란 듯 꼬옥 잡았다. 바로 앞에 서 있는 형준은 그 손을 보고야 말았다. 얼굴이 시뻘개졌다.
“어, 여기 벌레가 있나?”
형준은 갑자기 벌레 타령을 하며 둘이 꼭 잡은 손 주변을 툭툭 쳤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심하게 바라보는 수민에게 들으라는 듯 형준은 큰 소리로 말했다.
“아참, 근데 병원에선 세균이 많아서 조심해야하죠? 다행히 여기 손 세정제가 있네. 역시 요즘 병원은 없는 게 없어. 자, 다 같이 세정제 바릅시다.”
형준은 홍 여사와 재희, 연준에게 손 세정제를 친절하게도 직접 한 방울 씩 짜줬다. 수민의 손을 꽉 잡은 재영에게도 말했다.
“재영 씨? 뭐해요? 세정제 발라야죠!”
재영은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아, 여기가 감염병동도 아닌데요 뭘. 제가 아버님을 직접 만질 것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하하.”
“아니, 우리 아빠 잘못되면 재영 씨가 책임질 거예요?”
“네? 그게 무슨...”
“빨리 손 내요. 세정제 바르라고요!”
어이없어 하는 재영의 손을 강제로 수민에게서 떼어 내 형준은 세정제를 쭉 갈겼다. 수민은 점점 찌질해지는 형준의 행동이 어이없어 한숨만 푹푹 쉬었다. 형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민에게도 손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수민이도 자, 오빠가 짜 줄 테니까 잘 비벼.”
억지로 세정제에 손을 비비는 수민을 보며 형준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옳지. 그렇게 싹싹 비벼야 되는 거야.”
언제나 완벽하고 냉정하며 여유있는 왕자님은 이제, 완벽하게 찌질한 질투의 화신이 되어있었다.
그때 성재권 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계속 누워있었더니 목이 마르네.”
형준은 바로 재영을 ‘찌릿’ 바라보며 물었다.
“재영 씨. 우리 아버지한테 잠깐 물 좀 사다줄 수 있어요?”
그러자 재희가 형준을 흘겨봤다.
“형준아, 처음 온 손님이나 마찬가진데 왜 물 심부름을 시키고 그래? 우리 수민이 남자친구라는데. 연준아, 네가 가서 좀 사와.”
“응, 고모. 알겠어요.”
분위기만 살피던 연준이 눈치 빠르게 대답하곤 나가려 했다. 그러자 재영이 연준을 막아서며 호기롭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안 그래도 오면서 음료수라도 사와야 하는 것 아닌가했는데 워낙 경황없이 오느라 빈 손으로 왔네요. 지금 당장 나가서 사 올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작은 형님.”
“응? 작은 형님? 흐흐.”
난생 처음 듣는 작은 형님 호칭에 연준이 속없이 웃었다. 형준은 그런 연준을 한심하다는 듯 툭툭 치며 속삭였다.
“야, 넌 웃음이 나오냐? 대체 누구편이야?”
“뭐야 형? 누구 편이냐니? 나한테 언제 뭐 말한 적 있어? 형 설마 진짜...?”
“됐고. 지금은 너랑 말할 시간 없다.”
형준은 속삭이는 연준의 말을 끊더니 조용히 밖으로 재영을 쫓아나갔다.
“어이, 유재영 씨. 나랑 이야기 좀 하지.”
“네? 형님 무슨 일이신가요?”
형준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재영 씨,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형님 형님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재영은 살짝 당황했지만 특유의 친화력이 가득 담긴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언짢으신가요? 수민 씨 사촌오빠라고 하셔서 반가운 마음에 제가 그만. 하하. 실례를 했네요. 많이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많이 부족한데 어떻게 예쁘게 보나?”
‘찌릿’하는 형준의 눈빛과 유치찬란한 공격에도 재영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방하게 웃으며 답했다.
“앗 네...하긴 무작정 예쁘게 봐달라고 할 게 아니라 제 부족함부터 먼저 채워야겠네요. 하하.”
형준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맞는 말만 하는 재영이 점점 더 미워졌다.
“오늘은 수민이랑 뭘 하다 온 거죠?”
마치 취조하듯 묻는 질문에도 재영은 조곤조곤 대답했다.
“아, 네. 오늘이 수민 씨가 제 고백을 받아주고 나서 첫 번째 데이트거든요. 그래서 한강공원 가서 강바람 좀 쐬고 있었습니다.”
“강바람? 수민이랑 같이 한강에 갔다는 건가요?”
형준은 눈빛이 이글거렸다. 웃는 얼굴의 ‘수민이 남친’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선 천불이 났다. ‘한강’이라는 말을 들으니 둘이 함께 한강에 갔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한강에 가기 전까진 사촌오빠와 사촌동생이라는 그것도 이복 사촌지간이라는 명확한 거리를 두고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맥주 한 모금에 팔짱을 끼던 수민의 모습. 천진난만한 수민에게 빠져들어 얼굴을 바라보며 키스할 뻔한, 뜨거웠던 그날 밤의 공기. 유유히 불어오던 한강 강바람.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한 번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