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숙!”
진운의 사타구니를 노린 은혈접이 당충선의 손에 막히자 당희지는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방해했느냐는 의미가 담긴 목소리였다.
허나 당충선은 태연히 말했다.
“제대로 익혔구나. 두 마리 혈접을 쓰는 솜씨가 전보다 늘었어. 허나 다짜고짜 암기부터 날려대는 버릇은 고쳐야겠다. 가뜩이나 석기로부터 그런 서찰도 왔는데 저쪽에서 책잡을 만한 꺼리를 줘선 안 되는 법이지.”
“이놈하나 어찌되든 누가 안다구요!”
“내가 알지.”
단호한 당충선의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당충선은 은혈접을 품속에 갈무리 하며 진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안다고 했어. 내 이번 한번은 자네를 용서해 주겠네.”
“예!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르신.”
진운은 앉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용서는 했지만 탐탁지 않은 모양인지 당충선은 그대로 작별을 고했다.
“슬슬 목적지에 다 와가는 듯하니. 이만 흩어지세. 피차 오래 보고 있어봐야 고역일 텐데. 석호야. 잠시 마차를 멈추거라.”
“예. 당숙.”
진운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마차를 세웠다. 물론 진운도 찬성이었다.
진운은 냉큼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잘 얻어 타고 갑니다.”
진운이 인사하며 마차의 문을 닫기 전에 당충선이 나지막히 말했다.
“자네 이전의 그 검의 검주(劍主)에게 감사하게. 그 검이 자넬 살렸으니.”
진운의 표정이 굳었다.
아닌 척 발뺌을 해 보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안다는 말이 그 말이었나.’
문이 닫히자 마자 엄중하게 당희지를 나무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부석에서는 당석호가 고개를 돌려 진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차 안에서는 들리지 않게 몸짓으로 진운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손가락으로 진운을 한번 가리키고 주먹을 한번 불끈 한다.
‘다음에 보면 죽이겠다는 뜻인가?’
헌데 그의 얼굴에 뿌듯한 웃음이 가득하다.
표정으로 봐선 ‘네가 내 동생을 놀려줘서 기쁘기 한량없다’는 뜻 같았다.
이상한 가족이었다.
진운은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중얼거렸다. 혹시나 들릴까 조용히.
“농 한번 잘못 걸었다가 고자 될 뻔 했네. 젠장.”
* * *
마차는 진운을 내려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양에 도착했다.
양양은 꽤 큰 도시였다. 사천의 성도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여태 지나온 어떤 도시보다 컸다. 널찍한 관도는 마차 두 대가 지나다녀도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관청 옆에 자리한 가장 큰 저택이 바로 호북 포정사사 정계욱의 거처였다.
당문 일행을 태운 마차는 양양 시내를 관통해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슬슬 밥짓는 연기가 올라올 무렵이었다.
과연 고관대작의 저택이라는 것인지.
기백에 이르는 하인과 수십 명의 개인 무사들. 그리고 관사를 호위하는 관군까지 몇 백 명이 상주하는데도 마당은 한산해 보일 정도로 넓었다.
당충선을 맞은 하인은 그들을 곧장 주인에게 데려가기보다 우선 그들이 묵을 방으로 안내했다. 이미 저녁때가 되어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모시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허나 그들은 무인이었다. 문밖에서 떠든 하인들의 소리를 아니 들을래야 안 들을 수 없었다.
“이번 의원은 아직도?”
“뭔 뜸을 그리 오래 뜨는지 모르겠구먼.”
독의 당충선을 초청해놓고 그새 다른 의원에게도 부탁을 했던 모양이다.
정작 당사자인 당충선 보다는 당희지가 더 자존심 상한 듯 했다.
“사람을 불러놓고는 뭐하는 짓이래. 지가 고관이면 다야.”
“어허. 말 조심하거라. 관부를 적으로 삼으면 어찌되는지 알고서 그러는 게냐?”
“요깟 말 한마디로 죽이기야 하겠어요?”
당희지는 태연했다. 물론 말 한마디로 진운을 죽이려 했던 그녀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 저택에도 관군이 머물고 있다. 당장 관군을 시켜 우릴 잡아 가둔다 해도 방법이 없거늘...... 어찌 그리 말을 함부로 할까.”
“호위무사라 해봐야 별 볼일 없어 뵈던데. 그냥 도망치면 되죠.”
“어이쿠. 내 말을 말자.”
당충선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허나 그녀의 말이 진실로 일어나게 될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 * *
진운은 융중에 들리자마자 소소정부터 찾았다.
마을 변두리에서 융중산으로 뻗은 한적한 길.
허나 날이 어둑해 지는 지금쯤이면 붉은 등을 켜고 줄선 손님들을 받아내던 그 곳.
진운은 대흥방 따윈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고 싶었다. 이렇게 커서 남자가 되었노라고 루화누이에게 말하고 싶었다.
헌데 그가 찾아간 자리에는
귀신이 나올법한 폐허뿐이었다.
진운은 그녀들의 행방을 쫓았다.
다행인건 근처의 객잔에서 진운을 알아보고 재워줬다는 것이었다.
몇 년 만에 나타난 진운을 용캐도 알아봤다.
“얼씨구, 이게 누구야. 소년장사 아닌가.”
“소소정? 무슨 살인 사건이네 어쩌네 하더니 그대로 망했지 뭔가. 그땐 난리도 아니었다네. 그 안주인이 잡혀갔지 아마?”
객잔주인은 이런 저런 말들을 아는 대로 해 주었다.
기루가 망해버린 뒤로는 장사가 어려워 졌다고 했다. 뻔질나게 소소정을 드나들던 이들이 이젠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 가지 의문인 점은 그 어디에도 대흥방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저 살인사건과 관군이 개입했다는 말이 전부였다.
진운은 머리를 굴렸다.
‘대흥방이 나서지 않은 것일까, 나서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나선 것일까.’
세가지 모두 염두에 둬야 했다.
첫 번째라면 사부의 말대로 대흥방의 목적은 오직 자신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경우 대흥방을 찾아봐야 진운이 얻을 건 없다.
두 번째는 조금 다르다. 관군이 먼저 나서서 그들이 손을 뻗지 못한 것이라면 관의 눈이 닿지 못한 곳에서 해코지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소미는 몰라도 다른 이모들은 위험했다.
세 번째라면 훨씬 직접적이다. 그들이 관에 말했거나 관군의 뒤에서 일을 꾸몄을 수도 있다.
어찌됐건, 소미를 잡아간 것은 관군이라는 게 확실했다. 관복을 입은 자와 병사들이 와서 소미를 포승줄에 묶어가는 모습을 봤다 했으니.
무림인이 직접 손을 쓴 경우보다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에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관부를 상대로 드잡이 질을 해야 하기에 더 곤란해졌다 해야 할지.
진운은 날이 밝자 그길로 6년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알아보고 다녔다.
처음으로 진운이 찾은 곳은 도박장이었다.
소소정의 주된 고객은 어깨 좀 쓴다하는 동네 양아치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소소정과 더불어 애용하는 곳이 바로 도박장이었다.
6년 만에 찾은 도박장은 새삼 달라져 있었다.
도박장 문지기를 한다는 뱁새 놈은 찾아 볼 수 없었고 좀 더 험악한 인상의 거구가 박도 한 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진운은 그를 지나쳐 도박장으로 들어가려 했다. 분명 뻔질나게 소소정을 드나들었던 인물들이 이 안에 그득 할 테니까.
허나 그의 생각은 입구서부터 막히고 말았다.
“처음 보는 놈이군. 출입증은 가지고 왔나?”
험악한 인상의 거구가 진운을 막아섰다.
큰 키의 진운보다도 한 치는 더 큰 듯 했다.
박도를 흔들거리며 물어 보는 게 출입증이 없이 들어가려 한다면 곧바로 휘두를 듯 한 모양이었다.
진운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출입증? 그런 게 있을 거 같아?”
아니나 다를까 거구의 사내는 곧장 횡으로 박도를 휘둘러 왔다.
거구의 움직임은 진운의 예상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느긋한 움직임으로 박도를 피해냈다.
청운산 절벽을 타며 익힌 보법, 유운보였다.
물 흐르듯 비껴나간 박도를 거구가 망연하게 쳐다보는 사이 진운의 검이 번쩍였다.
발검하며 한 번, 착검하며 또 한 번.
찰나지간에 거구의 좌우를 훑은 검은 정확하게 혁띠를 두 동강 냈다.
어지간한 이들은 눈치도 채지 못할 만큼 빠르고 정교한 수법이었다.
거구의 바지가 훌러덩 흘러내렸다. 거구는 허전해진 그의 하체에 깜짝 놀라며 바지를 들어 올렸다.
엉거주춤하게 바지춤을 부여잡고 있는 거구를 진운은 간단한 발길질 한번으로 넘어뜨렸다.
문을 가로막은 방해꾼이 사라지자 진운은 거칠게 문을 열고 도박장으로 들어섰다.
도박.
강호의 사람들은 무림인이건 아니건 도박을 즐겼다.
그들이 주로 즐기는 도박은 마작이었다.
사각형 탁자에 둘러앉아 싸구려 백주를 마시면서.
그들은 마작을 시끄럽게 즐겼다.
특히나 높은 액수의 돈이 오가는 불법 도박장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진운이 들어간 곳만큼 시끄럽지는 않았다.
와아아아아아아!!!
진운이 문을 부술 듯 박차고 들어간 소리도 함성소리에 감춰져 버렸다.
일반적인 도박장에서는 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곳은 그가 알던 융중의 도박장이 아니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건달패들의 낭만 따위는 피 냄새 가득한 광기에 먹혀버린 지 오래다.
녹이 슬었는지 피가 묻어서인지 검붉게 변해버린 철창.
그 속에는 두 미물의 치열한 사투가 진행중이었다.
사람들의 함성 속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서로의 목을 물어뜯기 위한 움직임.
그곳은 투견장이었다.
진운은 피냄새 진한 어둠 속에서 그가 알만한 자들을 찾아 다녔다.
면면을 살펴봐도 동네를 주름잡던 파락호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평범한 주민들 같았다.
복장을 보아도 그러했다.
어딘가 힘을 과시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옷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농사꾼이나 장사꾼의 옷이었다.
그럼에도 피에 대한 광기는 더욱 진했다.
으르르르 컹컹!
철창에 갇힌 개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의 목을 물어뜯자 내부가 요동칠 듯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아아!!
광기의 바다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았다.
깨물어라.
물어뜯어라.
피를 흘리고 살점을 뜯어내라.
진운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함성에서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혐오감이었다.
그는 도망치듯 도박장을 뛰쳐 나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진운은 고개를 돌려 다시 도박장을 바라봤다.
겉은 분명 익숙한 모습이었으되 내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곳은 이미 그가 알던 융중이 아니었다.
* * *
당충선 일행이 호북 포정사 정계욱을 만나게 된 것은 하루가 더 지나서였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다른 의원 하나가 더 다녀간 것이다.
아마 수십 칸 지어진 손님방이 죄다 의원의 자리인 듯 했다.
그나마도 대접은 융숭했다.
원래 모두에게 이런지 아니면 그들에게만 특별히 허락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식사 때마다 진귀한 음식들이 줄지어 나왔다.
새끼 돼지를 잡아 삶아낸 수육이라던가, 이 집 정원 연못에서 건져 올린 비단잉어 요리라던가.
처음에 주인을 탓하던 당희지 조차도 요리를 맛보고는 생각을 바꿀 정도였다.
게다가 이쪽에서 필요하다는 물건이면 가능한 구해다 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당희지가 대뜸 백은으로 만들어진 비녀를 말하자 하인이 두 시진도 안돼서 구해온 것이다.
당충선은 질녀의 철없는 행동에 다시금 머리를 부여잡았지만 이미 가져온 물건을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당충선은 장계욱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당희지는 빼놓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물론 당희지는 반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호북 포정사라면 호북땅의 모든 행정을 총괄하는 종2품의 고관. 어지간한 무림인이라 해도 만나기 쉬운 인물이 아니다.
“당수욱! 진짜 가만히 있을께요. 가만~히! 아무 말도 안할게요.”
“내 너를 어찌 믿느냐. 그 백은 비녀를 챙긴 벌이라고 생각해라.”
“아앙! 이깟 백은 비녀 버리면 되잖아요!”
“더 말할 것 없다. 포정사께는 나와 석호 둘이서 다녀 올테니 너는 방이나 지키고 있거라.”
“아아앙!”
그녀는 어깨를 흔들며 앙탈을 부렸지만 이미 충분히 시달린 당충선에게 통할 바는 아니었다.
당충선은 단호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짐을 꾸리며 말했다.
“떼 써봐야 소용없다.”
그리고 근엄한 표정의 당충선 뒤편, 치료에 쓸 만한 침과 자기병을 챙기던 당석호가 당희지에게만 겨우 보일만큼 살짝,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당희지는 열불이 났다.
매일같이 투닥대는 오라비인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까.
그녀는 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당석호에게로 손을 뻗었다.
“이익!!”
그녀의 손이 노린 곳은 당석호의 옆구리였다. 헌데 평소라면 눈감고도 피해냈을 당석호가 어딘지 모르게 굼떴다.
그는 마치 불의의 일격을 당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들고 위태하게 움직였다.
“어엇!”
자기병 안의 독액이 출렁 거렸다.
그들이 가져온 독이라 해봐야 치명적인 극독은 없었다.
허나 그것은 당문의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이곳의 하인들에게는 아니었다. 무공도 익히지 못한 그들이 중독된다면 죽음에도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위태한 꼴을 살핀 당충선이 엄하게 당희지를 꾸짖었다.
“당희지! 네가 그러고도 당문의 자식이더냐! 평생을 독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할 팔자면서 어찌 독 위험한 줄을 모른단 말이냐!”
“하지만, 오빠가 먼저...!”
“끝까지......! 내 이 일은 네 고모에게 이를 테니 그리 알아라!”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당희지의 고모라 하면 현 사천당가 가주의 누나가 되는 당연화였다. 그녀는 매우 엄격한 성정으로 가문의 다른 어른들과는 달리 여자라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천방지축인 당희지가 무서워 할 정도로.
당충선과 당석호가 짐을 챙겨 방문을 나갈 때 까지 그녀는 입을 삐쭉 내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을 나서는 두 사람의 등을 째려볼 뿐이었다.
특히 당석호의 등은 왠지 모르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당희지는 그녀의 오라비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