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검을 눈여겨봤던 당충선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진운의 검에 관심을 내보였다.
하지만 그 관심이 적의인지 호의인지 알 길이 없는 바. 진운은 순순히 인정 할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뭐 이렇게 생긴 검이 한 두개여야죠.”
“하하. 내 오해를 한 모양이군. 하긴 그게 순순히 내어줄 물건도 아니고.”
“그 검이 꽤 유명한가 봅니다.”
“뭐 검보다야 사람이 유명하지.”
“아...... 그 무평...이라는 친구분이요?”
“그렇소. 검이야 뭐... 제법 튼튼하긴 하다만 세상이 탐낼 절세의 보검 까진 아니야. 아. 한 가지 상징이 되긴 하지. 전진파 장문인의 상징.”
장문인의 상징이라 했다.
진운은 여태 사부가 가지고 다녔던 애검 녹옥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검을 줄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장문인의 상징이라니!’
졸지에 장문직을 물려받게 생겼다.
진운이 속으로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당충선이 말을 이었다.
“검이야 그냥 상징에 불과하다만...... 무평 그 친구는 아주 유명하지. 사천 무림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는 말. 당충선의 어투가 미묘했다.
진운은 아직도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궁금한 것은 사부의 과거행적이었다.
이러쿵저러쿵 전진파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부는, 반대로 사부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얘기해 준 적이 없었다.
헌데 사부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사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물론 반례는 있었다.
당희지였다.
“저는 모르는 사람인데요?”
덕분에 당충선의 입에서는 진운이 알고 싶어 하는 일들이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게 5년도 넘은 일이니 그렇지. 6년인가? 아니다 7년쯤 되었겠구나. 그때까지 무평이라는 사람은 그저 전진파의 재능 없는 전인이라는 평가밖엔 가지지 못한 이류? 아니 삼류무인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대에서 전진파는 끝났다며 전진말자라는 호칭이 생겼겠느냐. 아무튼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어디로 사라진지 알 수 없던 그가 7년전 딱 한번 모습을 드러냈단다.”
당충선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어느새 진운과 그의 조카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출도하자마자 호기롭게 구파에다 비무장을 뿌렸지. 처음엔 점창 외방 무사들을 꺾었다고 했다. 뭐 그 정도야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 다들 비무에 외방무사들을 내보낸 점창의 멍청함을 비웃었다. 다음은 아미파였어. 아미에서는 본산제자가 나왔지. 헌데 결과는 똑같았어.”
당충선의 말은 숫제 무평의 무용담에 가까웠다.
“청성산에 비무첩이 도착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청성엔 난리가 났지. 청성과 무평이 검을 맞댄 그 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당숙이요?”
“그래. 그런 좋은 구경거리가 있는데 안 가볼 수 있나. 아무튼 그날 청성에서 나온 인물은 청성오수의 셋째 현량이었다. 청성에서도 촉망받는 청성오수검의 일인이었지. 사람들은 현량의 승리를 점쳤다. 그는 별다른 무명 하나 없던 아미나 점창의 무인과는 달랐으니까.”
“그런데요?”
당희지가 말을 재촉하는 때가 절묘했다. 당충선은 신이나 말을 이었다.
“헌데 웬걸 무평 이자가 현량과 비슷한 무위를 보이는 거야. 고고하게 풀어내는 청운적하검을 정교하게 흘려내고 날카롭게 틈을 노리는데, 내가 소싯적 봤던 전진파의 무공과는 다른 느낌이었어. 아무튼 현량은 그 날카로운 검공을 버티지 못했다. 현량이 패배를 선언하자 참관했던 청성 장로들의 낯빛이 독무을 들이킨 것 마냥 거무죽죽해졌지. 그 얼굴들을 진기형님이 직접 봤어야 했는데......!”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요?”
“그 다음은 섬서로 갔다. 종남파의 장문제자가 그에게 대패해 사경을 헤맨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지. 화산과 무당에도 비무첩이 갔다는 얘긴 들었는데 그 뒤로는 행적이 묘연해. 아무튼 그 때부터 사천사람들은 무평을 일러 비무선자라 불렀어.”
긴 얘기였다.
진운은 그제야 사부의 당부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무평이라는 삼류도인이 사천무림인의 자존심에 먹칠을 한 셈이니.
그런데 사천무림의 한 축인 당문은 어째 그 사실이 무척 기꺼운 듯 했다.
진운은 당충선에게 물었다.
“헌데. 그 무평이라는 사람이 당문에는 안 들렀답니까?”
“하하하. 명색이 도사랍시고 무평은 비무를 하기 전에 ‘비도(比道)’라 적힌 붉은 편지를 보냈다는군. 도를 견준다는 말로 비무를 포장한 게지. 헌데 우리 당문에 견줄 도가 어디 있겠는가? 하하하”
당충선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심 무평의 입장이 이해되긴 했다. 명문정파라는 이름에 묶여있는 구파와는 달리 무림세가는 가문의 자존심을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데였다.
만약 무평이 당문과의 비무에서 이긴다면 갖은 구실을 붙여서 무평을 억류하거나 자신들이 이길 때 까지 차륜전을 했을 지도 모른다.
아마 무평도 이 사실을 알기에 구파에만 비무를 걸었던 것이리라.
당충선은 진운의 검을 향해 눈을 쓱 흘기며 말했다.
“흠흠. 내 말이 좀 길었군. 자네 검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진운은 의심을 지우기 위해 능청을 떨며 말했다.
“하하. 이게 그분 검이랑 그렇게 닮았나요? 거참 꼭 한번 뵙고 싶네요.”
점창, 아미, 청성, 종남.
그의 사부는 구대문파중 네 개 문파와의 비무에서 승리했다.
진운은 이런 중요한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간 사부가 몹시 보고 싶었다.
‘꼭 다시 봬서 대체 뭐하고 다니신 건지 직접 여쭤야 겠네요.’
진운은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 * *
다음날 날이 밝자 진운은 당충선 일행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진운의 목적지인 융중이 당문 일행이 가려는 양양과 지척인데다 그들의 위치가 예상보다 많이 남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문 일행은 진운의 말을 듣고서야 그들이 생각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는 걸 알았다.
“의창 쪽에서 올라오는 길이니까 양양으로 가려면 아마 북동쪽으로 가야할걸요?”
“그럼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바로 옆이요. 융중.”
“흠흠... 어차피 가는 길인데 같이 하겠나? 우리가 딱히 길을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고.....”
진운이 그들의 마차에 올라타게 된 이유였다.
진운으로써는 무척 편한 방법이었다.
더 이상 경공을 하지 않아도 될 뿐더러 말동무도 생겼으니 말이다.
다만 한명의 존재가 그의 기분을 망치고 있었다.
“크... 지독한 냄새......”
열일곱의 맹랑한 소녀, 당희지였다.
진운은 당희지의 노골적인 발언은 싹 무시한 채 오로지 당충선의 말에만 맞장구를 쳤다.
‘쟤 오빠가 왜 그런 태도였는지 알 만 하군.’
“푸하! 당숙도 참. 왜 저런 걸 데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하는 푸념을 이젠 그녀의 당숙조차 무시할 정도였다.
“......그러니 가끔은 이 독이라는 것이 사람의 몸을 보하기도 한다네.”
당충선의 말에는 일생동안 한 분야를 연구해온 깊이가 있었다. 과연 독의라는 명성을 거저 얻진 않았는지 독극물에 대한 지식이 남달랐다. 물론 절반이상은 진운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독제독이라는 게 그리 어려운 것만도 아니지만, 또 제대로 알고 쓰는 사람은 드물거든. 당문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극독을 먹고 지낸다는 둥 헛소리를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내성이 생기는 독은 몇 종류 안 돼. 내 비록 그 종류를 알려줄 수는 없네만......”
게다가 자신이 이룩한 경지에 대한 자부심 때문인지 말이 무척 많았다.
“아 네. 그럼 양양의 관리라는 사람도 독으로 다스려야 하는 겁니까?”
“글쎄, 그건 모르지. 중원의 이름난 의원들도 불러보고, 몸에 좋다는 약까지 먹어봤지만 차도가 없다는 걸 보니, 독을 써봐야 되지 않을까 짐작할 뿐. 아마 그들도 그래서 날 초빙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이따금씩 맞장구를 쳐주면 알아서 자신의 썰을 풀어내 주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엔 진운을 향해 물었다.
“그럼 자네는 융중 어디를 가려는가? 그 작은 마을엔 끽해야 무후사 몇 개 뿐일 텐데?”
진운은 그가 말하고서야 잠깐 떠올렸다.
자신의 목숨을 여기까지 이어준 제갈무후의 존재를.
“아. 무후사도 있었죠.”
하지만 그가 가려는 곳은 무후사가 아니었다.
그에겐 이제 고향과 같은 곳. 소소정이었다.
“근데 제가 가려는 데는 소소정이라는 곳이에요.”
“소소정?”
“기루에요. 기녀들이 있는 곳.”
“음?”
당당하게 기루를 가겠다는 말에 당충선은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더 극적인 반응은 당희지에게서 나왔다.
“흥. 더러운 놈. 말코에 땡중이네.”
엄밀히 따지자면 땡중은 아니었으되 그녀가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
종교에 몸을 담고 여색을 탐한다. 그녀의 입장에서 말코도사나 땡중이나 그게 그거였으니 말이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당희지를 당충선이 낮은 목소리로 나무랐다.
“어허. 희지야. 어찌......”
허나 그녀에게 적당한 타박이 통할 리 없었다.
“맞잖아요. 말코도사. 치졸한 청성도 대놓고 그런 짓은 안하는데.”
진운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가 소소정에 있을 때도 간혹 도사복을 입고 나타나는 손님들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방술사라 불렀다.
세속의 도가 어쩌니 방중술이 어쩌니 하면서 기녀들의 술에 미약을 탈 때도 있었고 그들 스스로가 모종의 약의 힘을 빌어 밤일을 행하기도 했다.
진운은 농을 던질 생각으로 그들이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기억해 내뱉었다.
“아, 저는 보통의 도사와 다릅니다. 본산의 방중술을 펼치려면 기루만큼 적당한 데가 없죠. 어찌, 소저도 견식해 보려오?”
문제는 그 말이 보통의 여인에게 얼마나 큰 희롱이 되는지 진운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열 살 남짓부터 기녀들의 끈적한 농담을 듣고 자라왔던 탓이다.
당희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말을 잇지 못했고.
“이...이!”
당충선은 차갑게 분노했다.
“이보게 젊은이.”
이미 반쯤 진운의 정체를 확신하고 호의를 보이던 당충선 이었으나 진운의 말은 도가 지나쳤다.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진운 또한 움찔했다.
‘이게 왜...... 그냥 농담 한건데......’
“자네가 지금 한 말. 무슨 뜻으로 한 겐가? 대답 잘하게. 한줌 독수로 흘러내리고 싶지 않으면.”
사람 좋아보이던 당충선이었으나 그 역시 당문의 인물.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렸다.
진운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거릴 찾았다.
‘으......달리는 마차 안에서 독공을 펼치면 답도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 이럴 땐 모르쇠가 상책이지.“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는 말을 그만...... 이모랑 누이가 그곳에 있다 보니 주워들은 말을 아무렇게나......”
점소이 시절 손님에게 하던 존대가 자연스레 흘러 나왔다. 그 굽신대는 꼴에 당충선은 잠시 고민 했으나 그 옆에 있던 당희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진운에게 손을 뻗었다.
“이...... 음적!”
내공이 실린 움직임.
좁은 마차에서도 고양이처럼 몸을 놀려 손끝을 뻗어낸다. 진운은 그 동작을 이미 본적이 있었다.
어제 밤 그녀와 당석호의 박투에서였다.
기억속의 권장법이라면 마차의 반대편 끝에 앉은 진운에게는 닿지 않을 터.
역시나 그녀의 손은 진운에게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당희지의 손에서 은빛의 무언가가 섬전처럼 번쩍였다.
순간 진운은 대경하며 고개를 젖혔다.
“으헉!”
콰각!
마차의 한쪽 문짝에 박힌 그 물체는 나비의 형체를 띄고 있었다.
당가가 자랑하는 암기중 하나인 은혈접이었다.
진운은 등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걸 느꼈다.
아마 그가 어제 본 박투는 암기술을 배울 때 익히는 기본공인 모양이었다.
‘그나마도 봐두지 않았다면 이번엔 얼굴에 나비를 박은 채로 공명선생 만날 뻔했네.’
당희지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오는 그녀의 왼손이 그의 하체를 노렸다. 하체 중에서도 잃어서는 안 될 남성의 중심부였다.
처음 머리를 노렸던 은혈접은 양동이었는지 이번엔 진정 반응할 틈조차 없었다.
꼼짝없이 잘려나가겠구나(?)하던 그때.
당충선의 손이 움직였다.
먹잇감을 노리던 은혈접의 날개가 당충선의 손에 붙잡혔다.
목표지점에 단 한치를 남겨놓고서.
‘헙!’
진운은 진심으로 지릴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