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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무협물
회귀불사지체
작가 : 서은하
작품등록일 : 2018.12.31

목숨을 걸고 강호를 주유하는 진운의 이야기.

 
12. 사제(2)
작성일 : 18-12-31 17:36     조회 : 369     추천 : 0     분량 : 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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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호남성 서북쪽에 위치한 청암산.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이곳. 하늘의 신장(神將)이 산등성이를 뭉텅뭉텅 썰어낸 듯 허연 속살을 드러낸 절벽들이 즐비하다. 산허리에 걸친 희뿌연 구름 위로 하늘을 향해 뻗은 돌기둥들이 머리를 불쑥 드러냈다.

 끝없이 우람한 절벽들 사이엔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들이 자리했다. 깊숙한 동굴에서 시작된 물길은 우뚝 솟은 돌기둥들을 돌아 내려가며 새벽안개를 피워냈다.

 계곡 옆엔 가파른 산림. 청록의 나무들 사이를 희뿌연 안개가 가득 메우고, 그 속에 온갖 기화요초가 몸을 숨겼다.

 선계를 찾아 나선 장량이 터를 잡았다고도 전해지는 곳. 신비함으로 가득한 산이다.

 푸드드득

 청회색 하늘에 아직 달이 걸려있는 새벽, 멧비둘기 날아가는 소리가 고요한 산을 깨웠다. 누군가의 다급한 움직임이 산새들에게 날갯짓을 강요한 탓이다.

 “헉...헉......”

 쉼 없이 발을 움직이는 그 사람은 진운이었다. 그의 발은 숲이 놀랄 만큼 빨랐다. 이슬 머금은 풀들 위에 희미한 족적을 남기면 일장은 우습게 치고 나갔다.

 텅!

 때때로 굵은 나뭇가지를 밟고 솟구치면 하늘을 날 듯 삼장거리를 뛰어넘었다. 날다람쥐 같은 움직임. 꺼끌꺼끌한 질감의 회색 도복이 날개처럼 펄럭였다.

 앳된 티를 막 벗어던진 멀쑥한 얼굴에는 거뭇한 수염이 자라고 있었고 너저분한 긴 머리는 뒤로 질끈 동여맸다.

 오랜 시간 산속생활을 한 모습이었다.

 진운은 불안한 눈으로 연신 뒤를 돌아다 봤다.

 ‘쫓아오려나?’

 가공할 속도로 산을 내려가면서도 추격을 염려한다. 쫓기는 자의 전형이다.

 조급함은 그 움직임에도 드러나는지 바람 같던 몸놀림이 점점 거칠어진다.

 파삭!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뛰어가는 그의 몸을 때렸다. 그 대가로 잔가지는 부러졌고 허름한 그의 도복엔 상처가 하나 더 생겼다.

 ‘칫!’

 옷 상태에 신경을 쓸 시간 따윈 없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

 “제자야. 어딜 그리 바삐 가느냐.”

 정면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젠장!”

 진운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발을 멈췄다.

 “헉 헉......”

 발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진운의 앞에 작달만한 체구의 노인이 나타났다.

 전진파 19대 장문인 무평이었다.

 “이번이 몇 번째냐 이눔아. 일곱번째냐?”

 “후...... 이번엔 진짜 많이 왔는데......”

 진운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클클클. 이놈아, 아직 이 사부의 눈을 벗어나기는 10년은 이르다.”

 뒷짐을 진 채 진운을 타박하던 무평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5년 만에 벌써 이정도 성취라니...! 지름길로 오지 않았다면 따라잡지 못할 뻔 했어. 이 짓도 한두 번이면 못 하겠군!’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진운은 천재였다.

 내공 구결의 이해나 초식의 투로는 물론이고 경공까지, 무평이 30년이 걸렸던 경지를 진영은 단 5년 만에 도달했다.

 무섭도록 빠른 성취다. 그 때 비굴하리만치 매달려서 진운을 제자로 받은 것은 정녕 훌륭한 선택이었다.

 ‘다섯살... 아니 두 살만 더 어렸었더라면......’

 보통의 문파나 무가에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는 나이는 열 살 전 후였다. 소림이나 아미같은 불가에서는 너댓 살의 동자승때부터 무공을 익힌다. 열여섯부터 배우기 시작한 진운은 시작부터 늦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그가 배워온 호흡법 때문인지 대로처럼 잘 닦인 혈맥은 어린아이처럼 내공을 흡수했다.

 만일 삼사년만 더 일찍 무공을 배웠더라면 초식은 물론 내력까지도 자신의 경지에 도달했으리라.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무평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턱짓으로 산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얼른 다시 올라가라 이눔아.”

 “후...... 조금만 이따가요.”

 “지금 갈래? 아니면 맞고 지금 갈래?”

 무평이 제시한 선택지엔 진운이 원하는 ‘조금만 이따가’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들을 진운이 아니었다.

 “안 맞고 이따가요.”

 “이눔이!”

 무평은 녹옥을 검집 째로 휘둘러 진운의 머리를 노렸다.

 부웅

 진운의 이마에 따끔한 혹을 안겨주리라 기대했던 무평의 검집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진운이 이미 예상한 듯 고개를 뒤로 젖혀 피한 탓이다.

 그것이 무평의 심기를 거슬렀다.

 무평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피해?”

 스멀스멀 위험한 기운이 무평의 오른팔에 모였다. 여차하면 내지르는 무평의 비기, 뇌명검의 내력 운용이었다.

 “이크!”

 진운은 그 흉험한 분위기를 감지하자마자 기겁하며 꽁지를 내뺐다.

 5년전 강물을 가르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무평의 저 무공은 감히 마주할 엄두가 안 났다. 검집으로 휘두른다 해도 정면으로 마주했다간 뼈도 못추릴 게 자명했다.

 이럴 땐 도망이 상책이었다.

 그는 왔던 길을 바람처럼 거슬러 올라가며 외쳤다.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사부!”

 진운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산위로 멀어졌다.

 진운이 멀어지자마자 무평은 오른팔에 모으던 내력을 풀었다. 흉포하게 내달리던 진기가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오자 서서히 잠잠해졌다.

 무평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후우우......”

 점점 뇌명검이 아니면 진운을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덩치는 커다란 놈이 초식을 전개 할 때면 은근 영악하게 굴었다. 이제 일원검법의 경지 자체는 자신에게 거의 근접한 수준이었다. 여태껏 쌓아올린 내공으로 꾸역꾸역 막아내곤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공 없이 붙으면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그가 비빌 것은 이제 뇌명검 뿐이었다.

 ‘슬슬 뇌명검을 가르쳐야 하나.....’

 그의 눈은 산등성이를 거슬러 올라가는 진운을 쫓고 있었다.

 

 * * *

 

 청암산엔 이름 모를 봉우리가 많다.

 수직으로 높게 솟은 봉우리들이 숲속의 나무처럼 많아서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탓이었다.

 수많은 봉우리중 하나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췄다. 사면이 가파른 절벽인 봉우리를 어찌 올라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꼭대기 절벽 끝에 걸터앉은 남자, 진운은 눈 앞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손에 쥔 마 줄기를 한입 베었다.

 으적.

 “퉤퉤...!”

 금세 씹던 줄기를 뱉어낸 진운은 떫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이건 먹을 때 마다 후회한다니까.”

 도통 먹을 게 부족한 산중생활에 씹을만한 것이라곤 마 줄기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항상 이렇게 몇 번 씹다 뱉어버리곤 했다.

 진운은 한손에 들린 마 줄기를 산 아래로 휙 던졌다. 끝을 모르고 떨어진 마 줄기는 점이 되어 사라졌다.

 “입맛만 버렸네. 그나저나 이제 여길 또 내려가야 하는데.....”

 진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 봤다.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내리는 일은 2년 전부터 진운이 매일 아침 하던 수련이었다.

 “읏차!”

 진운의 신형이 아래로 훅 꺼졌다.

 그의 신법은 가볍고 유려했다. 손바닥만 한 바위틈을 차고 나면 어느새 미끄러지듯 움직여 다음 바위에 발을 내딛었다.

 푸스스스

 돌 부스러기들이 아찔한 낭떠러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위태위태한 광경에도 아랑곳 않고 진운의 발은 틈틈이 나 있는 돌바닥과 나뭇가지를 착실히 밟았다.

 진운이 삼장 건너의 바위틈을 향해 발을 디딜 때였다.

 쩌적 하는 소리를 내더니 돌덩이가 갈라져 내렸다. 순간 갈 곳을 잃은 진운의 발이 허공을 맴돌았다.

 “어엇!”

 순식간에 진운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일장, 이장, 삼장......

 아래로 떨어지던 진운에게 다행히도 잡히는 것이 있었다. 진운은 있는 힘껏 그것을 움켜쥐었다.

 우드득

 진운의 손에 걸린 나뭇가지가 부러질 듯 말 듯 간신히 진운의 몸을 지탱했다.

 그는 절벽 아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우...... 또 공명선생 만날 뻔했네.”

 그는 무의식중에 남은 한 손으로 자신의 목에 걸린 벽옥목걸이를 매만졌다.

 절벽을 타는 경신법 수련은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경공이 경지에 다다른 지금의 진운에게도 간혹 지금과 같이 재수 없으면 디딤돌이 부서져 추락하고 마는 것이었다.

 때문에 저승에서 마중 나온 제갈량을 만나는 일도 몇 차례나 있었다.

 그때마다 제갈량은 불사의 염이니 회혼이니 하는 말을 읊으며 목걸이를 소중히 하라 일렀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가 가진 목걸이에 걸린 주술이 그의 목숨을 살려낸다는 사실을.

 그럴수록 진운은 필사적으로 경공을 수련했다. 회귀고 역천이고 간에 또다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기필코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이딴 절벽 따위 평지마냥 뛰어주겠다고 다짐하는 그였다.

 진운은 다시 아래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요리조리 절벽사이를 산양처럼 누벼 지상에 도착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목걸이를 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휴... 어서 이모들한테 가봐야겠는데......”

 진운이 경공에 집착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적도상인 정도는 능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얼른 소소정을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사부는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며 하산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하는 신법수련을 핑계로 도망쳐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사부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어서 사부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수준의 경공이 필요했다.

 ‘그래도 어젠 거의 성공할 뻔 했어.’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

 진운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발길을 옮겼다.

 “그럼 이제 검을 배우러 가보실까.”

 

 * * *

 

 청암산 중턱, 절벽들이 호리병 모양으로 둘러싼 협곡.

 분지 같은 지형 안쪽에 작은 초옥 하나가 지어져 있다.

 누런 흙벽 위에 짚단으로 지붕을 얹은 허름한 집이다. 한쪽 벽면에는 장작이 무더기로 쌓여있고 집 앞엔 제법 너른 공터가 자리했다.

 무평과 진운이 기거하며 무공을 배우는 곳이다. 전진파의 하나남은 건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진운과 무평이 검을 들고 마주 섰다.

 “뇌명검은 일원검법과는 다르다. 초식의 투로 보다는 내력운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무평이 설명과 동시에 검을 몸 앞으로 들어 올렸다. 검법을 설명하는 무평의 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이것이 일식(一式 ) 부지(不止)다. 검을 든 손은 명치 앞에서 시작해 명치 앞으로 끝난다. 전진하는 발에 칠, 뒤가 삼이다.”

 무평이 천천히 움직인 검이 명치 앞을 사선으로 지나 한바퀴 회전해 다시 명치로 돌아왔다.

 “한 번 움직인 검은 멈추지 않으며 끊임없이 같은 식으로 연환 할 수 있다.”

 다시 반대방향을 사선으로 지난 검이 한 바퀴를 회전한다. 양옆으로 원을 그리는 듯 한 모양새다.

 진운이 그 움직임을 따라했다. 무평을 마주보며 움직이는 팔이 똑같이 두 개의 원을 그려냈다.

 무평은 시범을 멈추고는 진운의 자세를 보며 말했다.

 “비유혈부터 팔 전체 혈에 내력을 비운다고 생각해라. 비워진 혈맥에 내공이 들이차기 전에 검으로 뿜어내야 식이 멈추지 않는다.”

 무평의 말에 따라 검을 휘돌리던 진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내공을 계속 뿜어내면 금세 바닥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 검법이 중양심공과는 안 맞는 것이다. 이 검법에 맞는 심법은 따로 있다.”

 “그게 뭡니까. 사부?”

 “풍운심법이라 한다. 내 그것도 구결로 알려 줄 것이다.”

 무평의 대답에 진운은 억울한 듯 툴툴거렸다.

 “그럼 처음부터 그걸로 배우면 되잖아요. 이 검법이 더 쎈 거 같은데.”

 “이놈이!”

 “으억!”

 무평이 투덜대는 진운의 허벅지를 검면으로 냅다 때렸다. 바람처럼 빠른 횡베기의 초식이었다. 진운이 맞은 부위를 비벼대며 억울한 눈빛을 보이자 무평이 목소리를 높여 중양심공을 가르친 이유를 설명했다.

 “그 심법은 몸 전체를 단전처럼 만들어 천천히 내공을 쌓아가는 바. 축기의 속도가 지극히 느리니라! 열 살 때부터 축기를 했어도 지금 네놈의 내공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에이. 그럼 별로네. 그래서 사부도 그거 안 익혔구나.”

 “내 축기의 속도가 차이난다 하지 않았느냐. 게다가 몸 전체를 단전화 하는 것은 그냥 단전에 내기를 쌓는 것 보다 몇 배는 어렵다.”

 “근데 그렇게 방식이 다르면 이미 중양심공을 익힌 사람은 못 쓰는 거 아닙니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중양심공은 빠른 축기와 유연함이 장점이라 다른 내공들을 배우는데 제약이 덜한 편이었지만 풍운심법은 축기는 물론 그 운용이 판이하게 달랐다. 하단전을 기초로 하는 일반적인 내공심법과는 섞일 수가 없는 무공인 것이다.

 “잘 봤다. 나도 아직 구결만 외울 뿐 익히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류귀종이라 했으니, 네놈의 무공이 화경의 경지에 이른다면 풍운심법의 구결대로 내공을 움직일 수 있겠지.”

 “그럼 화경의 경지는 어느 정도인데요?”

 “그거야...... 허공섭물이나 허공답보쯤은 써야하지 않겠느냐?”

 “......”

 진운은 입을 다물었다.

 허공답보라니. 허공을 딛고 하늘을 나는 정도라면 초능력 수준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경지에 닿아야 쓸 수 있는 심법이라면 배우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게다가 저 확신 없는 말투. 분명 사부 본인도 본적이 없는 경지일 것이다.

 “그만 됐으니 다음 검식이나 보거라. 이식(二式)은 호풍(呼風)이다. 어깨서부터 시작해 횡으로......”

 무평은 다시 검법을 설명하며 횡으로 베는 초식을 시범했다. 아까 진운을 때렸던 바로 그 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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