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평과 진운은 해가 질 때가 다 돼서야 겨우 객잔을 찾을 수 있었다.
무당산 남쪽 소로에 위치한 허름한 2층짜리 객잔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드물어 손님도 얼마 없는 곳이었다.
객잔 주인은 노인을 업은 소년이라는 이상한 조합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접대용 미소를 흘리며 손님을 맞이했다.
“예~ 어서오십쇼.”
주인이 인사하기 무섭게 등에 업힌 노인, 무평이 소리쳤다.
“여기 방하나 내주고 먹을 것 좀 가져와.”
“먹을 거라면 어떤 걸...?”
“거 대충 소면이나 가져......”
그때 아무렇게나 주문하려던 무평의 말을 진운이 가로챘다.
“여기는 뭘 잘합니까?”
그러자 주인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야... 그...... 백육(白肉:삶은 돼지고기요리)이 그나마...?”
아마 손님이 없는 게 목이 좋지 못해서만은 아닌 듯 했다.
진운은 잠깐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럼 그거랑 마파두부 주시고, 방은 2인실로 준비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객잔 주인이 힘차게 대답하고 주방으로 돌아가자 무평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2인실이라니. 드디어 무당파는 포기한 게냐?”
“저도 잠은 자야죠! 해가 졌는데 어떻게 산엘 올라갑니까?”
“에잉. 왜 자꾸 무당파에 집착하는 게야? 거길 안가면 누가 죽기라도 한다든?”
무평이 아무렇게나 뱉은 말에 진운은 갑자기 침울해져 대답했다.
“아마...... 그럴지도.”
“뭐이?”
“기루에 있던 이모들이요. 오살도라는 놈이 루화누님을 잡아가려는 걸, 제가 그만 죽여 버렸거든요. 그래서 대흥방이 기루에다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 말에 진운을 보는 무평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평이 말했다.
“그래서 무당파에다 보호해 달라고 하겠다?”
“네. 원래는 큰 이모가 저라도 살리려고 무당파로 보낸 거지만......”
“큰 이모라......”
“소미이모요. 소소정의 주인이에요.”
순간 심각해진 분위기에 덩달아서 험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하던 무평이 입을 열었다.
“소미라는 년이 생각은 잘 했다만 네 생각은 틀렸다.”
“네? 어째서요?”
“대흥방 무사놈. 네가 죽였다면서?”
“거야 오살도가 루화누님을 잡아가려니까 어쩔 수 없이......”
“그건 알바 아니고, 결국엔 그 오살도라는 작자와 네가 치정싸움하다 벌어진 일 아니냐. 네놈이 사람 죽인 일에 복수하러 오는 걸 무당파가 무슨 명분으로 막는단 말이야? 무당파가 무슨 해결사냐? 해달라는 대로 해주게? 관아에 가도 네 편은 안 들어줄 게다.”
“그게... 그런 일이 아닌데......”
“그리고 무당산까지 쫓아온 걸로 봐선 그 기루도 애 진즉에 털렸을 게야.”
진운은 무평의 설명을 듣자 낯빛이 창백해졌다.
추격에서 도망치고, 죽었다 살아나고.
하루 종일 정신없이 보내느라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자신이 무당산으로 향하는 걸 알고 찾아 왔겠는가.
무평의 말대로 대흥방의 무사들이 소소정의 기녀들을 겁박해 알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진운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 가봐야겠어요.”
가족을 잃는 경험은 한번이면 족했다. 5년 전에도 자신만 도망쳤다. 이번에도 그럴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진운을 무평이 만류했다.
“아서라. 네가 지금 거길 간다고 뭘 하겠느냐?”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라. 무공도 모르는 기녀 십 수 명이 죽어버리면 그땐 무당은 물론 관에서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 그놈들이 제정신이라면 그런 살겁은 일으키지 못해. 더구나 네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고 갔는데 뭐 때문에 기녀들을 건드릴까. 그놈들 목표는 너지 기녀들이 아니다.”
“......”
무평의 말을 들은 진운은 행낭을 챙기려던 손을 멈췄다.
그의 손은 떨고 있었다. 그것이 기녀들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인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준비된 음식이 나왔다.
“백육(白肉)과 마파두부 나왔습니다요.”
음식을 내려놓고 가려는 객잔주인을 무평이 불러 세웠다.
“이봐 주인장.”
“예. 따로 주문하실 거라도?”
“여기 술 있나?”
“물론이죠. 백건아와 황주가 있는데, 어떤 걸로 드릴까요?”
“쎈걸로.”
“예~ 백건아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주인장은 금세 사라졌다 술병을 들고 돌아왔다.
과연 쎈 술인지 싸한 주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 냄새에 진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쩐 일인지 떨림도 멎은 그의 멍한 눈이 술병을 응시했다.
그러자 무평이 술병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떠냐? 한잔 할테냐?”
진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평은 천천히 잔에 술을 따랐다.
쪼로록
액체가 잔을 채우는 소리와 함께 술 향기가 진해졌다.
백건아.
진운이 기루 생활을 하며 익히 봐 왔던 싸구려 화주였다. 지난 5년간 익숙하게 맡아왔던 냄새였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마셔본 일이 없었다. 이모들이 나중에 크면 알려 주겠다고 못 마시게 했던 까닭이다.
그는 백건아의 독한 술 냄새에서 이모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음씨 좋은 큰 이모 소미, 말 많은 홍진, 작은 체구지만 똑 부러지는 소란......
그리고
‘루화누이’
동그란 잔속에 담긴 술 위에 루화의 얼굴이 동동 떠있는 것 같았다.
진운은 잔을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
이윽고 술잔 속 루화의 얼굴이 입에 닿자 그는 가득 채워진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입술을 적시고 혀를 지나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그의 첫 술은 짜릿하고 강렬했다.
마치 루화와의 첫 입맞춤처럼.
* * *
“그뤠서...... 저는 끅...... 어떠케 해야죠?”
“크어~ 음? 뭐가 말이냐?”
큰 덩치에 앳된 얼굴의 소년, 작은 체구에 강퍅하게 생긴 노인. 진운과 무평이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두 사람이었다.
특히 진운은 혀가 꼬여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을 만큼 취해 있었다. 두 눈 또한 술기운에 절어 한껏 풀린 상태였다.
진운은 꼬인 혀로 주절주절 말했다.
“아뉘이... 흐끅. 이제 뭐르 해야 댈까요?”
진운이 던진 말에 무평은 눈을 번뜩였다. 술기운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놈을 입문시키려면 지금이 기회다!’
허탈함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을 진운에게 슬쩍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무평은 넌지시 말했다.
“왜? 복수가 하고싶으냐?”
“끄~ 아니아니죠... 아직 괜차늘 끅! 거라면서요.”
“그렇지! 괜찮지. 괜찮구 말구.”
“복수는 의미가 없어요...... 히끅! 다 죽고 나면 늦어......”
“클클. 네 말이 옳다!”
“그러니까! 끅! 안 죽게 해야죠.”
“어떻게 말이냐?”
무평의 의미심장한 물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운은 고개를 저으며 허망한 말을 내뱉었다.
“몰라요... 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평은 순간 걱정이 들었다.
‘이놈 이거 기억이나 하려나?’
그런 걱정은 한 켠에 접어두고 지금부터가 본론이었다.
“너 무공을 배워볼테냐?”
“네?”
진운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은 관심이 있는 눈치다.
“무공말이다. 무공!”
“저도 알아요. 무공! 무가에서 끅! 자랐거든요......”
‘무가의 핏줄!’
무평은 술기운이 확 깨버렸다. 그냥 재능있는 고아인줄 알았더니 무가의 자손이란다.
무가가 괜히 무가이겠는가.
몇 세대를 이어간 무림의 가문에는 재능 있는 자들이 즐비했다. 사대세가 같은 큰 가문이 아니어도 각 지역의 이름난 무가에는 저마다 고수를 한명씩 품고 있었다.
때문에 무평은 자신이 파악한 진운의 재능이 진짜라고 확신했다.
열여섯 나이에 벌써 저 정도 체격. 무공을 익히기 좋은 근골에 투로를 파악하는 눈썰미까지.
‘헌데 망한 무가라면... 진씨라면 보자... 강서의 진가장? 아니야 거긴 안 망했을 텐데? 아니 이거저거 따질 때가 아니지 지금!’
“진운아. 진운아! 너 무공을 배운적이 있느냐?”
급한 것은 그것이었다.
중양심공이 조화를 중시하는 무공이라 하나 다른 심법들과 충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다른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 가르치기 좋은 무공은 아니란 얘기다.
다급한 무평의 말에 진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끅! 무공은 안 배웠죠.”
“휴......”
무평이 가슴을 쓸어내릴 때 진운이 한마디를 더 했다.
“그냥 호흡만 배어써요.”
“뭐... 뭣!!”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호흡법이라니. 그게 심법이고 무공인 것을 이 아이는 모른단 말인가!
‘분명 내력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무평은 다시 진운에게 물었다.
“무공을 아니 배웠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요! 무공이 아니라 끅! 호흐법예요.”
그러더니 진운은 갑자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스읍~ 후 스읍~ 후...... 헤... 잘 안되네.”
만취한 정신으로 그게 잘 될 리 없었다. 한 두 번 시도해보다 잘 되지 않자 진운은 감은 눈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급한쪽은 무평이었다.
“어허 이놈아! 정신차려봐!”
무평은 진운의 고개를 억지로 세우고는 그의 명치에 손을 얹었다.
진운이 배운 심법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제발 상충되는 내공이 아니어야 할텐......’
무평은 진운의 내부를 살피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단전이 텅 비어 있었다.
비어있다 못해 깨끗했다.
그리고 넓었다.
아무런 내력도 가지지 않은 단전이 이리도 넓을 수 있나 싶었다. 혈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잘 닦인 도로마냥 넓고 깨끗해 무평의 내력이 혈도 구석구석을 살피는 데도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마치 벌모세수(伐毛洗髓:털을 깎고 골수를 씻어냄. 막대한 내공으로 타인의 혈도를 틔워주는 것)라도 받은 것 같았다.
무평은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이거다! 이놈은 무조건 잡아야해!’
그는 진운의 몸에서 손을 떼자마자 입을 열었다.
“너 내 제자가 되라.”
“왜요?”
“내게 무공을 배우면 네 이모들을 지킬 수도 있고 복수도 할 수 있다.”
“에이 복수는 안돼요. 끅!”
“그래. 복수할 일이 안 생기게 해주마.”
“흐음.......”
진운은 눈을 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턱을 괴고 가만히 있는 것이 자는 게 아닌 가 의심될 정도였다.
점차 숨소리마저 규칙적으로 변하자 답답해진 무평이 소리를 질렀다.
“아 이놈아 할 거야 말거야!”
“할게요.”
무평이 소리치길 기다렸다는 듯 진운은 눈을 번쩍 뜨고 대답했다. 그러자 되려 당황한 쪽은 무평이었다.
“으응? 진짜 배우겠다는 거지?”
“아. 한다구요. 제자.”
“으응. 확실히 배우기로 한 거다. 남아일언중천금이야.”
확답을 묻는 무평의 말에 진운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그럼 저 들어가서 자도 되죠?”
“어험. 그럼그럼!”
무평이 대답하자마자 진운은 졸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 한 걸음을 내 딛는 순간, 진운은 세상이 핑글 도는 기분을 경험했다.
“어?”
쿠당탕
술기운을 버티지 못한 진운의 몸이 객잔 바닥에 고꾸라졌다. 잔뜩 취한 진운은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지 그대로 기절하듯 수마에 빠졌다.
“드르렁......”
그를 보던 무평은 이마를 짚고 앓는 소리를 냈다.
“어이구... 저놈 저거 내일 가서 기억 안 난다고 딴소리 하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