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다.
아무리 멀리 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의 공간.
무(無)의 공간 속에 몸이 두둥실 떠다니는 느낌이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조차도 알 수 없다.
‘여긴......’
진운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눈앞으로 수많은 기억들이 스쳤다.
소소정에서 건달패를 혼내주던 기억.
밤새 술상을 나르고 아침이면 이모들과 함께 잠들던 추억.
소소정 입구에서 자신을 거둬주던 소미.
기루의 이모들, 그리고 루화누이.
루화는 그 예쁜 얼굴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살아남겠다 약속 하거라.’
루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그제야 진운은 경옥 목걸이를 쥐어주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 너머에는 적을 막아선 아버지와 형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야트막한 담장에 홀로 높게 솟은 대문. 넓은 연무장에 도열한 무인들.
이가장의 전경이다. 그렇게 그의 가문이 멸문하고.
그 뒤는 관군을 피해 도망치던 나날이었다. 어린 발걸음으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그리고 기억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산속의 작은 사당이었다.
깊은 어둠 속, 그의 눈앞에 일곱 개의 촛불이 떠올랐다. 그 가운데는 백우선을 든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갈량이다.
제갈량은 백우선을 천천히 부치며 말했다.
‘쯧쯔...... 회혼의 술법은 촌각의 시간밖에 되돌리지 못함이니. 아이야, 어서 눈을 뜨거라.’
진운은 그 말을 듣고서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회혼의 술(術)......아! 무후사!’
그의 세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사라졌던 신체의 감각 또한 돌아오고 있었다. 온몸에 격통이 느껴졌다.
‘크으윽!’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갑작스레 휘둘러진 대도. 자신의 죽음.
진운은 황급히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갔다.
분명 목이 잘린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멀쩡하다.
과연 그것이 실제로 경험한 기억인지, 예지몽을 꾼 것인지.
시간의 배열이 모호했다.
그때였다.
그는 갑자기 머리채를 움켜쥐는 우악스런 손길에 저절로 비명을 흘렸다.
“끄으으으!”
희미하게 뜬 눈 사이로 오살도의 얼굴이 비쳐들었다.
오살도는 오른뺨에 난 상처를 씰룩이며 스산하게 말했다.
“갈 땐 가더라도 얼굴에 상처 하나정도는 괜찮잖아?”
들어봤던 말이었다.
진운은 재빨리 기억을 헤집었다.
그는 오살도를 막아서다 발길질을 당했다.
그의 육신은 몇 대를 맞았는지도 모를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머리채를 잡힌 건 바로 그 뒤. 오살도는 그의 얼굴 근처에다 대도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다음은 루화의 목소리였다.
“안돼요! 한번만 봐주셔요! 제가... 제가 따라갈게요.”
그러자 진운의 머리채를 쥐었던 힘이 풀렸다.
“흐흐흐. 진작 그럴 것이지 이년이.”
“죄송합니다. 나리...... 죄송합니다. 흑흑흑.”
진운은 애원하고 있는 루화를 봤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빌고 있었다.
“그래. 이 몸을 귀찮게 만들었으니 이를 어찌 할 테냐?”
“하라는 것은 뭐든지 할게요. 나리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진운이는...... 우리 진운이만은 살려주세요. 쟤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발 진운이는 살려주세요.”
‘꼭, 살아남겠다 약속하거라.’
그의 목숨을 구걸하는 루화의 목소리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섞여들었다.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녀들의 염원이었다.
진운은 호흡을 추슬렀다. 그의 머릿속은 아직 혼란스러웠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크윽. 일어나야해’
그는 애써 상체를 일으켰다.
오살도는 그런 진운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저 새끼가 진운이란 말이지?”
같은 말을 두 번째 듣는 기시감.
확실했다. 진운의 기억은 현실이 되고 있었다.
다음은 루화였다.
“네! 그 아이만 살려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어요.”
진운은 기억을 되짚었다.
다음은 오살도의 웃음이었나?
아니나 다를까, 오살도가 웃으며 말했다.
“큭큭크... 좋다. 저놈 사지는 멀쩡하게 해주지.”
같다.
그가 겪은 죽음의 기억과 똑같았다.
‘다음...... 다음은!?’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루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 그는 드디어 미래를 기억해냈다.
‘단!’
“단!”
그의 마음속 외침과 오살도의 말은 거의 동시였다. 분명 오살도는 다음번에 그의 목을 내려칠 터였다. 진운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현실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모가지는......”
“으아아아아!”
오살도가 도를 내려치려는 찰나 진운은 몸을 날려 그에게 덤벼들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오살도의 옆구리로 파고든 진운은 어깨로 그를 밀쳐 넘어뜨렸다.
두 사람은 한데 엉켜 바닥을 뒹굴었다.
오살도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의 왼손을 빼내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비록 형(形)도 식(式)도 없는 막무가내 주먹질 이었지만 내공을 익힌 무인의 주먹은 무시 못 할 위력을 품고 있었다.
진운은 계속되는 충격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크헙!”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진운의 목적은 하나였다.
대도를 봉쇄하는 것.
진운은 오살도의 오른팔을 온몸으로 붙들고 늘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대도를 놓지 않았다.
바닥을 뒹굴며 오살도의 주먹에 맞기를 수십 차례. 그 타격에 진운은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오살도의 오른팔이 자유를 되찾을게 뻔했다.
‘안 돼! 죽는다!’
진운은 마지막 힘을 짜내 벽산의 팔을 자신의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입을 벌려 상대의 손목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큭! 이자식이!”
오살도는 진운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진운은 턱을 더 강하게 다물었다.
진운의 이는 자국을 남기는데 그치지 않았다.
으적!
기어이 그의 송곳니가 오살도의 손목을 파고들었다.
피부를 찢은 치아는 연이어 오살도의 동맥까지 끊어냈다. 이대로 뼈까지 분지를 기세다.
“끄아아아아!”
오살도가 괴성을 질렀다.
그의 오른팔에서 피가 뭉클뭉클 뿜어 나왔다. 이윽고 힘이 풀려버린 손에서 대도가 떨어졌다.
쩔그렁.
“이 새끼가!”
분노한 오살도는 왼손을 휘둘러 진운의 뒤통수를 때렸다.
진운은 아찔한 충격에 눈앞이 흐려졌다.
“크헉!”
그는 물고 있던 오살도의 팔을 놓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피범벅이 된 그의 입이 팔에서 떨어졌다.
오살도는 그제야 상처를 부여잡았다. 팔뚝을 움켜진 손바닥 사이로 피가 줄줄 샜다.
그는 으드득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반면 그에게 뒤통수를 맞은 진운은 아직 고개를 숙인 채였다.
오살도가 그런 진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개 같은 놈이!”
그때였다.
진운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오살도의 눈에다 핏물을 뱉어냈다.
“퉤!”
상대방의 신체를 깨물고, 침을 뱉거나 모래를 뿌려 시야를 가리는 것. 모두 동네 양아치들이나 할 법한 치졸한 술수였다.
허나 치졸한 만큼 효과적이었다.
오살도는 눈을 덮은 핏물에 당황하며 팔을 허우적 거렸다.
“이잇!”
그때를 놓칠 진운이 아니었다.
진운은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오살도의 얼굴에다 자신의 이마를 돌진시켰다.
빡!
진운의 박치기가 작렬했다.
오살도는 고개가 꺾이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의 팔목과 코 주변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크으으으......”
그는 고통과 분노 가득 한 눈으로 자신의 무기를 찾았다. 주변을 훑던 눈이 대도를 발견한 순간, 이미 진운의 손이 먼저 그것을 움켜잡고 있었다.
진운은 대도를 역수로 잡고 쓰러진 오살도의 가슴팍을 내려찍었다.
오살도는 대경하며 양손으로 칼날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힘줄마저 상한 그의 오른손이 제 기능을 할 리 없었다.
왼쪽 손아귀의 힘만으로 진운의 무게가 실린 칼을 막아낼 수는 없는 법. 이윽고 대도는 그의 손가락마저 잘라내고 가슴팍을 찔러 들어갔다.
푸욱
늑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칼끝이 오살도의 폐부를 뚫었다.
“커헉!”
오살도는 두 눈을 흡뜨고는 양 팔을 버둥거렸다. 힘이라곤 전혀 실리지 않은 허망한 몸부림이었다.
“크흐... 끄르르르......”
오살도의 입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핏물을 게워냈다. 이내 진운을 노려보던 두 눈이 뒤집히며 육신의 움직임이 멎었다.
진운은 오살도의 몸이 정지한 걸 확인한 후에야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대도를 움켜쥐었던 손에도 힘이 빠졌다.
그는 털썩 주저앉아 주변을 살폈다.
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창졸간에 겪은 죽음과 살인.
보통사람은 평생가도 경험하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속이 메스꺼웠다.
“우웨에에에엑! 컥커... 켁! 웨에에엑!”
그는 위장에 담긴 모든 것을 토했다.
“궤엑... 꺼어허억......”
더 이상 토할 것이 없어 헛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때쯤, 진운은 온갖 타액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닦았다.
소매에 시뻘건 핏물이 번져 나왔다.
오살도의 팔뚝을 깨물 때 묻어버린 피였다.
그것을 본 진운의 몸이 굳었다.
한계를 넘어선 몸, 죽음을 엿본 기억, 살인을 한 충격.
열여섯, 어린나이로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 해일처럼 진운을 덮쳤다.
그는 순간 정신을 놓고 말았다.
* * *
늦은 밤.
진운은 슬며시 눈을 떴다.
속이 허전했다.
“일어났니?”
그의 옆엔 소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참동안 그를 간호했는지 얼굴이 초췌했다.
진운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으...음...... 큰이모. 가게는요?”
진운은 깨어나면서부터 가게를 물었다. 기루가 한창 성업 중이어야 할 한밤인데 지나치게 조용한 탓이다.
소미는 쓰게 웃으며 얘기했다.
“오늘은 문을 닫았단다.”
당연한 일이었다. 낮에 그런 사단이 났는데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시체를 치우고 피를 닦는 일 만으로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터. 진운은 그녀들이 겪었을 충격이 눈에 선했다.
“이모들은......?”
진운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상체를 절반도 세우지 못하고 온몸을 쑤시는 통증에 다시 몸을 뉘어야 했다.
“크으윽.”
“지금은 좀 더 쉬렴.”
소미는 손바닥으로 진운의 이마를 덮었다.
진운은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다시 수마에 빠졌다.
“으으음...”
소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진운을 보며 낮의 일을 떠올렸다.
피가 낭자하는 처절한 싸움 끝에 오살도가 죽고 진운이 기절하자 그녀는 황급히 문을 닫아걸고 기녀들을 불러 모았다.
충격적이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놀란 기녀들을 수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미의 침착한 지휘아래 기녀들은 내부를 정리했다.
기절한 진운을 들어 옮기고 바닥을 닦았다.
허나 산전수전 다 겪어본 퇴기들이라 해도 피범벅인 시체를 치울 때는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술 냄새와 분 냄새 진득하던 기루에는 혈향이 가득했다. 비위가 약한 몇몇은 구역질까지 해댔다.
가뜩이나 나이도 어린 루화는 정리가 끝난 뒤에도 성치 않아 보였다.
눈 밑이 퀭하고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것이 딱해보였지만 소미는 루화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루화야. 방금 죽은 그 자. 널 어떻게 알고 온 거야?”
“......”
루화는 눈을 멍하게 뜬 채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루화의 뺨을 찰싹 때렸다.
“정신차려 루화야!”
루화의 멍한 눈이 초점을 찾아갔다.
“... 큰언니......”
“말해 봐 루화야. 누구니? 그 남자.”
루화는 오살도를 떠올리고는 다시 몸을 떨었다. 퀭한 동공이 흔들렸다.
소미는 그런 루화의 뺨을 한 번 더 때렸다.
“정신차려!”
소미는 벌벌 떠는 루화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 남자, 네 과거와 연관 있던 사람이지? 진운이가 사람을 죽였어. 우린 정보가 필요해. 소소정에서 과거는 묻지 않기로 했다지만..... 이번엔 알려줘야겠어. 그 남자. 누구니?”
“그 남자는......”
루화는 양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몸을 움츠렸다. 말을 꺼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대흥방의 무인이에요. 별호는 오살도. 사람들은 그를 벽산 부단주라고 불렀어요. 안륙에서는 유명한 자에요.”
“그 자가 왜 너를 찾아온 거니? 아니 너는 왜 도망쳐온 거야?”
“그는 여인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어요. 그가 기루에 올 때마다 그를 상대하는 기녀들은 피멍이 들고, 뼈가 부러졌죠. 저는 다행이 손톱이 뽑히는 정도로 끝났지만......”
루화는 말을 흐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 무서운 건, 큰 돈을 주고 기녀를 데려갈 때에요. 마음에 드는 기녀가 생기면 가둬놓고 죽을 때 까지 괴롭힌다고 했어요. 그가 기녀를 데려간 날이면 그의 집에서 불에 그을리거나 토막 난 시체가 나왔대요.”
“그럼, 은자 열냥을 주고 샀다는 게......”
“네. 다음이 제 차례였어요.”
루화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던 소미가 분개하며 말했다.
“관은 어째서 저런 살인마를 잡지 않고...!”
“대흥방이니까요.”
“......!”
대흥방.
호북 안륙에 위치한 사파의 무리다.
대흥방은 장강의 수채 몇 군데와도 연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어찌 관아를 구워삶았는지 대놓고 패악질을 하는데도 관군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질이 나쁜 쪽으로는 호북에서 유명한 방파였다.
“아무리 그래도 양민을 살해하다니! 여긴 무당파가......”
소미는 호북 제일의 성산, 무당을 얘기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사마외도를 가만두지 않는 무당이라지만 무당파는 도관이다.
도관이 기루를 보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후우......”
소미는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부단주라고 했었지?”
“네.”
“분명, 낮은 직책이 아닐 텐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진운은 목숨을 걸고 그녀들을 지켜주었건만 소미는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