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소주 한잔하며 물어 볼래?”
뜬금없는 소리에 연어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시원하게 대답을 해준다.
“응! 그래! 좋지! 잠시 기다려. 먼저 퇴근한다 하고 올게”
“외근 나간다고 해야지”
“알았어.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아직도 대장질 하려고 해. 기분 나쁘게 이래라 저래라 해”
투덜대기는 하지만 기분 나쁜 말투가 아닌 어리광이 섞인 투정처럼 들리게 했다.
“참! 봉투부터 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들어갔다가 엘리베이터도 아직 오지 않았는데 바로 튀어나왔다.
“이래서 월급쟁이 사장들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다는 거야. 책임감이라고는 개 코딱지만큼도 없어. 주인 의식을 가지란 말이야. 이 월급쟁이 사장아”
“자른다. 까불면”
소주 한잔하기에 너무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둘만이 대화할 수 있는 한적한 자리를 잡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한 시간 정도만 지나면 퇴근한 사람들로 북적일 시간이었다.
“자! 한잔해! 너도 알지만 내가 빙빙 돌려 말하는 거 싫어하잖아. 네가 궁금한 게 회장님하고 어떻게 아느냐? 또 있어? 보험 얘기는 벌써 했고”
수리가 연어 잔에 소주를 한잔 따르며 소주 병을 건네주고는 빈 잔을 들고 있다. 항상 그랬듯이 연어가 소주잔을 채워준다. 수리는 절대 자작을 하지 않는다는 걸 연어는 잘 알고 있었다.
“회장님하고 어떤 사이인지? 뭐! 별단 건 없어”
수리는 벌써 각오가 돼 있는 것 같았다. 소주를 연거푸 서너 잔을 들이키고는 숨을 고르고 있다. 연어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여 수리 앞에 있는 빈 잔을 채우고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인데 회장님 보는 앞에서 살인을 했어. 놀라지 마! 죽이려고 한 살인은 아니었으니까”
손가락 낀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입술을 한번 눌렀다가 눈을 지긋이 감고, 그때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내에서 소매치기가 회장님 가방을 낚아 채 가더라. 너도 잘 알지만 내가 한 싸움 하잖아. 그래서 뛰어가서 그 놈의 등을 차고 쓰러지고 나도 쓰러지고 그렇게 구르다가 보니까 놈이라 긴 그렇고 그 사람 심장에 칼이 꽂혀 있었어. 살아 숨쉬던 말똥말똥하던 눈이 내 눈 앞에서 힘을 잃어가다가 감는 걸 봤어. 그걸로 끝이야. 그 다음 이야기는 필요 없고 그 후로 방황하다가 대학가고 군대 갔다 와서 너 만나고 그게 다야. 아 참! 회장님이 정신 치료를 받으라는 걸 안 받았어. 그래서 회장님이 나를 더 각별히 챙겼고 그런 인연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어”
연어는 소주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잔을 매만지기만 했다.
“가끔씩 그 사람 눈이 떠올라. 꿈에서도. 그 사람도 운이 없고 나도 운이 없지만 나는 그래도 살아 있잖아. 그 사람 눈이 그냥 안쓰럽고 생각하면 눈물밖에 나지 않아. 처음에 고통스러워 하더니 눈을 감을 땐 참 순하더라. 그런데 섬찟한 건 가끔씩 ‘빙 의’도 떠 올려. 말만 들어도 섬찟하지. 누군가가 화를 내게 하는 언행을 하면 내가 감정을 조절하는 게 아니고 그 눈이 끌고 가는 것 같았어. 나는 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뭔가 자극적인 일은 내가 아닌 그의 눈이 모든 흐름을 연출하고 나는 그냥 따라가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내가 하고 있는 업에서도 마찬가지야. 이 일을 하다 보면 정말 어쩌다 한번 고동우 같은 도둑놈들이 나타나. 수량이 많고 적고의 차이지 도둑질은 도둑질이잖아. 그런 도둑질이 내 눈에는 바로 들어오더라. 도둑질도 해 본 놈이 가장 잘 안다는 말이 있듯이 아마 그때 그 사람의 노하우가 내한테 전이된 게 아닌가 생각을 해. 학교 다닐 때도 아영이나 경일이가 어떤 마음인지 바로 쏙 들어오더라. 사회 생활 하면서도 주위에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얼굴만 봐도 바로 아는 거 있지. 신기하잖아”
이 말에 섭섭한 기분이 들었는지 원망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남의 마음을 잘 읽으면서 내 마음은 왜 몰랐어?”
망설임이 없이 대답을 했다.
“내 눈에는 너처럼 천사 같은 사람은 안 들어와. 도둑놈. 간사한 놈. 줏대 없는 놈. 뭐 이런 나쁜 놈만 들어오지. 아마 그 사람이 그런 방면에 전문가였던 모양이야”
가당치도 않은 말처럼 무시하고 싶었던지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느닷없이 가슴이 뜨끔한 말을 한다.
“그건 오빠가 나쁜 놈이라 나쁜 놈만 주위에 득실거려서 그래. 사람 생명 가지고 억지로 끼어 넣기 하지마. 오빠가 원래 깡패였잖아. 망인을 핑계로 정의로운 척 하지마. 역겨워”
“뭐!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런데 그 사람 눈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아. 지금도”
“그냥 허무하고 소름 끼치네. 그건 아마 오빠가 너무 어릴 때 그런 충격을 받아서가 아닐까? 허긴 그런 일은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여파는 오래 갈 거야”
“그래! 참! 허무하더라. 내가 살인자가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어. 나는 그 칼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발로 등을 걷어찼기 때문에 법은 다르게 평가했을 거야. 참! 동원이 있지. 동원이가 다니던 회사 회장님이 내 대신에 감옥에 갔다 왔어. 친척 형이야. 그런 인연으로 너희 회장님도 동원이 회장님도 그렇게 알게 된 사이야”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숙연해지듯이 연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살기도 느꼈을 것이다.
김경일도 그렇고 고동우도 그렇고 만약에 양아영이 남자였다면 그들과 똑 같은 보복을 이 사람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또 그리고 만약에 지금부터라도 이 사람에게 해가 될 짓을 연어 본인이 하게 된다면 비슷한 유형의 응징을 받을 것만 같았다. 술잔이 떨리고 있었다.
모자라는 듯이, 허허실실 하다가도 선악의 갈림길에서 이 사람이 행한 선을 위장한 악은 아마 그 사람에게서 전이되지 않나 하는 추측도 했다.
그가 행한 잘못이 죽음을 가져 오게 했다는 하나의 경종을 그 사람에게 다시 각인시켜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 그 사람의 심장에 꽂힌 칼을 통해 그 사람의 영혼이 이 사람의 심장으로 들어와 선과 악 사이에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헷갈리는 사람이라고 연어는 단정을 했다. 그러나 그 단정을 인정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사랑하기로 몰래 간직하기로 했다.
이 사람은 지금 그 사건이 있었던 그 이전의 삶을 망각하고 사고 살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연어는 믿고 있었다.
연어가 수리 볼에 손을 대고 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려 하지 마라는 시늉을 하고 있다.
연어 손에 느껴진 수리 볼은 전혀 차갑지 않았다.
뜨거운 심장에 볼 끝으로 온건만 같이 연어는 느끼고 있었다.
하나의 심장이 아닌 둘 같기도 했다.
연어 손 끝엔 하나의 심장을 도려 파내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스며든 칼질 같기도 했다.
원래 이 사람의 타고난 심성은 모르지만 최소한은 그 사건 이전의 이 사람 심성으로 되돌려주고 싶어하는 심정의 애절한 눈빛이 수리에게 전해졌다.
이런 센스 없는 놈.
그때 수리가 연어를 노려본다.
똥 씹은 인상이었다. 연어가 예상한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진심이 아니란 걸 연어는 잘 알고 있었다.
“야! 손 떼. 낯 간지럽게 뭐 하는 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