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득뽀득- 접시를 닦던 여욱이 슬금슬금 옆으로 게걸음을 쳤다.
허리를 숙이고 선반 안을 정리하던 준영은 툭- 엉덩이에 누군가의 다리가 닿는 느낌을 받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범인은 멀뚱멀뚱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여욱이었다.
준영이 인상을 찡그리고 물었다.
“뭐냐?”
“응?”
“방금 내 엉덩이 건드린 거 너냐?”
“아.. 그거 네 엉덩이었어? 난 또 하도 푹신해서 방석인줄..”
“뭐? 야 너 그거 성희롱이거든!”
“쉿! 매장에선 조용해야지.”
두 번째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댄 여욱은 단호하게 말했다.
적반하장인 여욱을 보고 화난 준영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거렸다.
“아. 알았어. 미안해. 박하완 눈치 보다가 그렇게 됐어.”
“사장님이 왜?”
여욱은 턱 끝으로 창밖을 응시하며 휴-한숨쉬는 하완을 가리켰다.
“오늘 작업장 갔다 오고 나서부터 계속 저래. 아주 땅이 꺼지겠어.”
“사장님. 무슨 일 있으신가?”
“글쎄.. 그것보다도 여울이 빨리 끝내줬대. 아 부러워..”
“누나한테 여울이는.. 사장님도 왜 이름으로 부르냐? 버릇없게.”
“언제는 뭐 버릇 있게 봤냐? 서준영씨?”
장난치듯 여욱을 보고 준영은 휴-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사장님 말고 내가 나온다. 언제 철들래?”
“나 곧 군대가..”
“아..”
뚱- 입이 나온 여욱을 준영은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봤다.
“잘됐다 야. 가서 철 들면 되겠네. 언제 가는데?”
“한달 후. 영장 나왔어.”
“아, 진짜?”
뭔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별로 친한 친구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면 서운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 출근 이번 주 까지만 하기로 했어. 나도 군대 가기 전 좀 놀아 야지.”
여욱은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그만둬서 더 좋은 것 같았다.
배시시 웃는 게 꼭 바보 같았다.
“잘됐다. 뭐. 너 없어도 여긴 잘 돌아가겠지. 그리고 여울 언니가 워낙 잘하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는 준영의 속마음은 정 반대였다.
군대 영원히 안 갈것처럼 일하던 여욱이 갑자기 간다고 하니 아쉬움이 배로 증가했다.
“여울 누나? 아마 여기 안 있을 걸? 프랜차이즈 사업 시작되면 서울로 가겠지. 박하완이 왜 주여울 밀어주겠냐? 서울에 아삭파이 생기면 믿을 사람이 필요하니까 보내려고 밀어주겠지.”
“정말?”
준영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만약 여울이 간다면 너무 허전할 것 같았다.
이제야 정 들었는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울이 역시 하완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 짝사랑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로서의 질투심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부러워 하지마. 만약 네가 가면 적응 못할걸? 서울에 가족도, 친구도 없잖아. 누나는 대학을 서울에서 나왔으니까. 서울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준영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여욱이 말했다.
“내가 가서 슬프진 않고?”
능글맞은 여욱의 말에 무색한 준영은 괜히 여욱의 등짝을 짝-하고 때렸다.
“안 슬퍼! 빨리 가!”
여욱과 준영이 서로 틱틱 거리며 장난을 쳤다.
창밖을 보며 한숨 쉬던 하완은 이미 나간 지 오래였다.
빵빵- 터미널 밖을 나온 하완을 기다리는 건 빨간차를 탄 수정이었다.
수장의 경적 소리를 듣고 하완이 옆자리에 탔다.
“너 인거 알고 있거든?”
“네가 나한테 별 관심 없어서 모를까봐.”
“차가 빨간색인데 어떻게 몰라. 누가 봐도 눈에 튀는데.”
“그래? 빨간 차라서 기억하는 거야? 나여서가 아니고?”
“...”
대답 없는 하완을 수정이 귀엽게 봤다.
당황하면 항상 표정이 굳는 하완을 우쭈쭈 해주고 싶은 욕심을 꿀 눌렀다.
“어디 가는 거야?”
“가 보면 알아.”
빨간 차는 도로에서 미끄러지듯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말없는 하완을 위해 수정은 음악을 켰다.
lately i've been, i've been losing sleep
dreaming about the things that we could be
but baby, i've been, i've beem prayin' hard..
보컬의 굵고 남성스러운 목소리가 수정의 귀를 간질였다.
리듬을 타는 수정은 흥이 나 보였다.
반면 하완은 쿵쿵- 뛰는 음악에도 불구하고 손을 팔을 턱에 괸 채무표정이었다.
차는 도심에서 멀어지며, 쭉 뻗은 도로와 높은 산들이 보였다.
“어디 가는 거야?”
수정은 잠시 뜸들이다 말했다.
“너도 아는 곳이야.”
“그니까 어딘데?”
꼭대기부터 아래까지 무덤으로 가득한 산이 보였다.
“여기..”
손을 턱에서 푼 하완이 말했다.
“너.. 여기!”
하완의 말에 힘이 있었다.
무언가 들켜버린 것 같은 분노였다.
“다시 올 때 됐잖아.”
말은 당당하게 했지만 수정은 눈치가 보였다.
“차 세워. 빨리!”
“못 세워. 여기 도로 한복판이야.”
“그래도 세워. 나 내릴 거야!”
“안 돼. 여기 택시도 안와.”
하완의 분노에 핸들에 올린 수정의 손이 떨렸다.
“미.. 미안.. 네가 싫어할 줄 몰랐어.”
“하..”
한숨과 함께 하완의 손이 이마에 올려졌다.
“기어이 신경을 건드리는 구나. 네가.”
“그게 아니라..뒤 좀 볼래?”
뒷 자석을 본 하완은 꽃다발을 발견했다.
잿빛이 도는 수국과 흰 수국이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꽃다발이었다.
옆에는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딸기케이크가 있었다.
전혀 감동하지 않은 얼굴의 하완이 수정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너 정말 고집불통이구나.”
“미.. 미안해.. 난 네가 좋아할 줄 알고.”
“...”
두 사람은 하완의 친어머니가 계신 공동묘지로 향하고 있었다.
***
하완과 수정이 하완의 친어머니가 게신 무덤 앞에 있었다.
수정은 잘 말려진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차마 뽑지 못했다.
머뭇거리다가 수국 꽃다발을 옆에 두었다.
하완이 그런 수정을 보고 말했다.
“우리 엄마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꽃이야. 나 다시 올 때, 꽃이 시든 게 싫어서 제대로 말린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지지난 달 생일에 꽂아놨어.”
“이번 달이 생일 아니셔?”
“어른들은 보통 음력생신 챙기시잖아.”
“아.. 난 양력생신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알았네. 진짜 미안..”
“괜찮아. 네가 우리 엄마 생각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수정의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 교수님 생일을 한번 챙겨드린 적이 있었거든. 그때, 엄청 좋아하셔서. 지금은 비록 안 계시지만..챙겨드리고 싶었어.”
내내 딱딱하게 굳어있던 하완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고맙네. 엄마와 그런 추억도 있고. 좀 부럽다.”
“왜? 넌 더 많이 챙겨드렸을 텐데..”
“난 아들이라서 그런 게 별로 없었어. 설마 완치한 엄마가 재발하셔서 돌아가실 줄도 몰랐고.”
하완의 말에 수정은 더 미안해졌다.
하완은 무덤 앞에 딸기 케익을 내 밀었다.
“엄마 부럽다. 생일 두 번이나 챙겨 받고. 엄마 제자인 수정이 왔어요.”
“교수님 저 왔어요. 교수님 애제자 수정이!”
누그러진 하완에게 용기를 얻은 수정이 애교 있게 말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말없이 하완의 친 어머니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딸기 케익을 챙겨서 천천히 내려왔다.
***
공동묘지 앞, 화장실 앞에서 하완이 반짝반짝 빛나는 에나멜 코팅 된 미니 백을 들고 서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수정이 민망한 얼굴로 하완 옆으로 왔다.
“괜찮다니까. 꼭 들어주네..”
“생전에 엄마가 여자가 화장실 가면 가방 들어주는 거라고 하셔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면 가방 두기가 애매하다고.”
“착한 아들이었네..”
두 사람은 차로 걸어갔다.
수정의 빨간 차가 공동묘지를 빠져 나갔다.
하완은 공동묘지가 아주 멀어지기 전까지 창밖을 내다봤다.
“하완아.”
상념에 젖은 듯한 하완이 대답하지 않았다.
“하완아. 무슨 생각해?”
“어?”
하완이 수정을 쳐다봤다.
“너 무슨 생각 하냐고? 궁금해서.”
“아무 생각도 안해.”
“그래?”
“응.”
“넌 참 비밀스러워.”
“내가?”
“응.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사실 좋았어. 교수님 집 놀러갔다가 그 과수원에 반하고, 두 번째로 반한 게 너였지. 하지만 넌 도통 속을 알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스쳐지나가더라. 그래서 궁금했어. 네가 어떤 애인지.”
“그래? 난 너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하완의 말에 수정이 웃으며 말했다.
“참 영혼없이 말해.”
“내가 좀 그래.”
“그게 좋았어. 근데 넌 내가 생각한느 것보다 더 비밀스러운 애인 것 같아. 그리고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건 확실히 알겠어. 너 여울씨 좋아하지?”
하완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나 여울씨 좋아해.”
핸들을 잡는 수정의 손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