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이 놈아! 말을 붙여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붙이냐? 그런데 한 분은 왜 빼먹어? 아재한테 네 말이 정말인지 지금 가서 조사하라고 할까? 건설 하는 사람들이야 한 눈에 알 수 있잖아.”
수리가 어깨를 들썩하며 ‘그렇게 하시던가’ 란 제스처를 취하면서 물어본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요.”
그때 뒤에서 딱딱 부딪히는 망치 같은 소리가 나 수리가 고개를 뒤로 돌려 쳐다본다. 김성태다.
“이 개 새끼!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거짓말을 해. 경찰 양반! 저 새끼 이거 감방에 쳐 넣으세요. 회사도 지금 불법으로 운용하고 있는 아주 나쁜 놈입니다. 내가 정식으로 고발을 하겠습니다. 새끼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어디서 까불고 있어.”
김성태 아킬레스가 파열됐듯이 이런 막말은 수리의 아킬레스에 메스를 대는 말과 같았다. 치밀어 오는 분노를 따라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경찰이 긴장해 수리를 보고 있었다. 수리 가슴 속에서는 충동이 요동치고 있었다. 저 목발을 저 새끼 아가리에 쑤셔 넣어버리고 싶다는 생각과 그 후에 벌어질 조사들. 당연히 자격증을 빌려준 어르신들의 참고인 조사. 젊은 놈 한번 도와 준 죄로 평생 처음 경찰서에 올 불운. 수리는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의 전 과정을 경찰이 꿰뚫고 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수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하는 짓이 개 망나니 짓이면 개새끼 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수리는 개새끼 소리를 들을 짓을 단 한번도 한적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가끔 개새끼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소리를 듣게 된 건 개새끼 소리를 들을만한 짓을 해서가 아니고 개새끼 소리를 부르짖은 그들이 개새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글을 쓰듯, 그들도 그들만의 언어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수리는 자기도 개새끼란 사실을 깨닫는다. 혼자만 깨끗한 척 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개새끼들이 담합해 해양수산부의 인가를 받은 집단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냈던 건, 개새끼들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제 발로 찾아간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강요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원망도 할 수가 없다. 씁쓸한 미소에는 내 꿈이 저런 개새끼 집단에 들어가고 싶었던 거였나? 더러운 법 속에 스스로 몸을 던져놓고 뜻대로 되지 않으니 원망이나 하는 나는 개새끼가 틀림없구나. 급기야 내가 이 업계의 선두주자였으면 협회의 수장이 돼, 내 밥그릇에 손을 대는 놈들에게 저놈보다 더 심한 텃세를 부려 매장까지 했으리란 확신의 웃음이 입가로 흐르고 있었다.
또다시 들끓는 충동. 충동의 실행 방법과 결과와 계기는 똑 같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전의 충동은 제 몸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면서 어르신들을 걱정하는 가식이었고, 지금은 훗날에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이 터줏대감들의 텃세 아래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종놈으로 여생까지 보내야 하는 비극을 초래하지 않겠다는, 오지랖 넓은 의협심의 차이였다. 실행 방법은 사회적 이슈거리였다. 그러려면 터줏대감인 김성태가 지금까지 행해온 대로 정부를 위해 앞장 서야 했다. 자기 목발도 자기 목도 수리에게 내놔야 했다.
이 나라는 자극적인 사고가 없으면 절대 달라지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수리 손이 민첩하게 김성태 목발도 갔지만 수리 손보다 경찰 손이 먼저 수리 귀로 갔다.
“너! 담배 태우지?”
“어~ 씨! 이거 놔요. 내가 미쳤어요? 형님! 월급 올려 준다면 하루에 수천 갑은 피울 수 있지만 허공에 날린 돈이라 안 피워요.”
“자식이! 말이 많네. 따라와.”
“어이! 경찰 양반! 당신 조사하다 말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저 새끼 감싸줬다간 당신도 감방에 쳐 넣어버릴 테니 처신 똑 바로 해.”
김성태 새끼손가락이 경찰 눈을 찌르고 있었다.
“자식이! 너 때문에 나도 같은 놈 됐잖아. 그러니 친구던 누구던 잘 가려서 만나야 하는데 어찌 너 같은 놈을 만나 내가 같은 놈이 되냐? 그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화장실 좀 다녀 올 테니. 어르신은 잘 아시잖습니까! 생리현상은 천지신명의 뜻이라 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면 돈(豚) 자나 견(犬) 자니라. 그리고 그 쓸데없는 상상은 하지 마세요. 이 깡패새끼를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으니. 제 뒷조사하면 바로 나올 것 같아 미리 말씀 드린 것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수리가 경찰 뒤를 따라 나가는 그 시간에 TS건설 직원들이 이건호의 지시대로 주변 성형 외과를 샅샅이 뒤져 김성태가 모집한 남정네들을 찾아 김성태의 사주로 벌인 짓이라는 자술서를 받아내 경찰서로 가고 있었다.
그때 순희는 경호와 같이 수리 집에 있었다. 수리 어머니가 경호에게 물었다.
“뭘 찾는 데 저렇게 오래 걸려? 수리는 어디 가고?”
순희도 들릴 정도로 크게 물었지만 대답할 의무를 경호에게 넘긴 것처럼 사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형님이 형수님에게 얘기하면 안다고 같이 가라고 해서 왔는데 벌써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못 찾는 거보니 모르는 것 같습니다.”
경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순희는 수리가 말한 대로 번지수는 잘 찾아갔지만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 본질을 잊은 것 같았다. 사진과 일기장에 빠진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충실하게 지시를 따르고 있는 건 분명했다.
메모장과 사진첩에서 사도유화란 제목의 페이지를 폈지만 업무 내용은 하나도 없고 양운영기사의 4949 탱크로리만 나와 있었다. 양운영의 얼굴을 하루에도 서너 번씩 보기 때문에 자세히 볼 필요가 없어 다음으로 넘겼다. 사진에 나온 풍경은 수리와 몇 번 가본 고구마 밭이 있는 동산 골로 가는 철길 다리 아래였다. 사진 아래에 적힌 날짜가 처음 만난 날과 비슷했다. 사진에 적힌 날짜의 메모장만 보면 될 일을, 그때와 비슷한 날의 앞뒤까지 펼치기 시작했다.
‘이 놈의 사진 때문에 차에 받쳐 비명횡사 할 뻔 했다. 미안하단 말도 없이 앙칼지게 지랄을 하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했다. 하여튼 예쁜 것들은 꼭 얼굴 값을 한단 말이야. 어이 18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 순희는 일기장이나 다름없는 메모장에 서서히 빠져들다 결국에는 낱낱이 조사에 들어갔다. 그때 경호는 집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논 길에 서서 열심히 어딘가에 계속 전화를 하고 있었다.
수리 어머니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노크를 했지만 메모장에만 몰두해 있는 순희는 전혀 알아 차리지를 못하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쳐다보고 있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가 차는지 콧방귀를 툭툭 치면서 페이지를 광속으로 넘기다가 끝내는 벌컥 화까지 내면서 구시렁거리기만 하지 4949 탱크로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이게 뭐야! 전부 선인장 일지잖아. 내 이야기는 어떻게 하나도 없어. 어떻게 데이트한 날짜도 없어. 정말 기가 막히네. 사랑 같은 말은 사치리라고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순희 라는 이름 한번 부르지 않고 허구한날 안주임님! 안주임님 하더니 이유가 다 있었네. 완전 업무용이었어. 영악한 놈.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도망갈 놈. 에이 씨! 혹시 이 18년이라고 적은 사람이 나 아냐?”
광속으로 페이지만 넘어가고 있었다. 오로지 일기장 어딘가에 숨어있을 본인 이름을 찾는 데만 몰두하느라 여기 온 이유와 수리가 지금 처한 상황은 까맣게 잊고 ‘세상에나 어쩌면 이럴 수가?’만 되풀이하면서 다시 첫 장부터 허둥대면서 순희 이름만 찾고 있었다.
일기장에 이름조차 오르지 못할 년. 일기장이 족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사랑하는 것처럼 대했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 배신당한 기분이 들더라도 말도, 생각도, 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지만 왠지 노리개 감만 됐다는 기분. 오로지 분노뿐이었다.
남들 다하는 핑크 빛 사랑놀이도 없이 데이트라고 해 봤자 퇴근 길에 논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길로 드라이브 다니는 짓,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울산 근교의 어두침침한 바닷가나 산길로 덜덜거리는 차를 몰고 올라가 산꼭대기인지 밤하늘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별만 보는 짓, 멀리 여행 간다는 게 고작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줄줄이 산들과 기억에서도 사라져버린 전국 노래자랑 사회자처럼 전국방방곡곡의 산야들만 구경가는 짓, 이게 데이트 전부인 이런 남자가 어디가 좋아서 귀신에 홀린 듯이 쫓아 다녔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더 가관인 건 소중한 손을 함부로 잡을 수 없다며 손도 한번 잡지 않은 짓. 비 오는 날 미끄러질 뻔 할 때도 손도 내밀지 않은 짓. 혼자서 호랑나비 춤을 추다가 중심을 잡을 때야 딱 한번 엉거주춤 등에 손만 얹은 짓. 이런 놈과 멀리 여행을 간 본 들 뭐 했겠는가? 밤새도록 혹시라도 괴한이 습격할까 두려워 돌돌 떨면서 각방에서 잤다.
허긴 그건 꼭 이놈 잘못만은 아니다. 그건 인정한다.
처음 여행 갔을 때 각방 써야 한다며 앙탈을 부린 건 본인이었기 때문에 할말은 없다. 그렇다고 그날 후로 계속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줄기차게 그는 손도 잡지 않았다. 지금에야 순희는 일기장에서 초라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종이가 아까웠다. 볼펜이 아까웠다. 그게 수리의 마음이란 걸 훤히 드러내놓은 일기장이었다.
이 방에 거울이 없는 줄 알면서도 벽을 두리번거리며 본다. 여자가 확실한 건 직장에서 받은 무시로 당연히 알고 있지만 매력도 없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언뜻 들어서였다.
일기장에 이름이 없는 게 왠지 족보에 이름이 올려지지 않은 것 같은 비참한 기분. 순희는 이런 마음이었다. 곧 그녀는 그의 깊은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란 걸 바로 깨닫는다. 올해가 지나면 나쁜 죄질이나 다름없는, 점점 가치를 떨어뜨리게 하는 나이 하나가 더 추가된다. 어깨에 힘주고 튕기던 시절이 ‘아~~ 옛날이여~~’가 된다.
삼십 년 세월 속에 좋아해 본적 없는 남자가 없었다는 말은 거짓이고 세상 남자에 대한 모독이다. 단지 내색만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손도 한번 잡아보지 못한 놈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다는 미래. 서글프다. 울화통도 터진다. 당연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욕도 나온다.
뭐가 좋아서 같이 싸돌아 다녔지?
그것도 고개 빳빳이 들고 ‘나도 애인 있소’라며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놈처럼 으스대기만 한 놈 옆에 액세서리로 붙어 다녔단 말인가? 눈을 꽉 감고, 그런 기억들을 깔끔히 털어내면 없어질 줄 알고, 발악하듯이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 왜 이러지? 뒷목이 왜 꼼짝도 하지 않지? 너무 세게 돌렸나? 어! 뒷목이 기절해버렸나?
“형수님! 찾았어요?”
경호가 순희의 분노한 심정을 당연히 이해하지 못하고 닦달, 재촉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희는 경호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흔드는 바람에 뒷덜미에 담이 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