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집에 오는 길에 추위에 의해 주머니에 손을 넣자
허윤이 준 작은 우정이 주머니에 들어있단 걸 뒤 늦게 깨달았다.
문득 정은비에게 이거라도 줄 걸…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 생각을 고치고 집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화이트데이는 사실상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편의점에는 아직 상당수의 사탕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손에 잡히는 대로 부모님 것과 동생, 그리고 정은비와 정은하의 것 까지
총 5개의 사탕상자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교복달님. 어디가?」
「잠깐 나갔다올게. 엄마 곧 온다고 했으니까
저녁은 그때 같이 먹어.」
집에 도착한 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은비에게서 연락이 왔고
방에서 나와 현관문으로 향하자,
내게서 받은 사탕을 먹으며 TV를 보던 동생이 따라오며 물었다.
「아무나 문 열어 주지 말고, 밖에 혼자 나가지 말고. 알았지?」
「응, 빨리 와야 해?」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현관문을 나섰다.
진달래 공원에 도착하자 추운날씨에 대항이라도 하려는 듯
중무장을 한 정은비의 모습이 보였고 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오래 기다렸냐.」
「얼어 죽는 줄 알았어! 빨리 가자.」
말 끝나기 무섭게 정은비는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정은비의 걸음속도에 맞춰 따라 걸었다.
이 근처는 원래 사람이 없는 편이기도 하지만,
추운 날씨까지 더해져 사람 한명 찾아 볼 수 없었기에
정은비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나와 정은비의 걸음소리만 울렸고
일정한 리듬에 맞춰 발에서부터 울리던 소리에 불협화음을 집어 넣어봤다.
「정은하의 선물상대는 알아냈냐.」
「아니 전혀…, 사탕에 관해서는 완전 묵비권이야.
근데… 그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내 손에 들린 봉투의 정체가 문득 궁금한지 정은비는 시선을 내 손으로 옮겼고
나는 이때다 싶어 봉투 안에 들어있는 사탕상자를 하나 꺼내서 정은비에게 건네줬다.
「…이거, 사탕이야?」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산건데, 조금 성의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이해해라.」
「아냐, 성의가 없다니 고마워! 잘 먹을게.」
겨울의 한기마저 녹일 것 같은 미소에 문득 사람들이
왜 매년마다 제과회사의 상술에 놀아나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건 꽤나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 말고도 손님이 한명 더 있어.
바로 위층에 사는 사람인데, 자주 놀러 오거든.
지금쯤 집에 도착했을 거 같은데…」
「손님? 정말로 내가 가도 괜찮겠냐.」
「괜찮을 거야, 별로 그런 거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라서….」
이것저것 중무장을 한 정은비였지만 추위에는 저항력이 낮은지
발걸음 속도를 높였고 나 역시 발걸음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
*
「…….」
「안녕? 자주 만나네.」
정은비의 집에 도착하자 정은하와 정은비가 얘기한 손님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은비가 얘기한 손님의 정체는 불과 며칠 전,
나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장기부 부장이자, 자칭 알파시간대의 시간의 관리자 이슬비였고
시간의 중재자라는 정은하와 시간의 관리자라는 이슬비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서로…, 아는 사이?」
정은비는 놀란 얼굴로 나와 이슬비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어머, 달님이 왔어? 오랜만이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아주머니가 반갑게 나를 맞아 주셨고
서 있지 말고 들어오라는 말에 인사를 하며 어물쩍 대답을 피하려 했지만
정은비는 나와 이슬비의 사이가 궁금한지 재차 물었다.
「뭐야? 슬비 언니랑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특별활동을 가입했는데, 거기 부장이더라고.」
「그래? 신기하네. 일단 음식 준비가 덜 된 것 같은데…
잠깐 앉아서 기다릴래?」
내가 알았다고 대답하자 정은비는 거실로 뛰어갔고
거실에는 아주머니를 포함해 아저씨와 정은하까지 온 가족이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꽤나 음식의 양이 많은지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뭔가 도와줄 거라도 있을까, 생각하고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이슬비의 의해서 저지당했다.
「잠깐 얘기 좀 하지?」
이슬비는 가장 안쪽에 보이는 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문을 열고 들어갔고
안 그래도 이슬비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었기에, 이슬비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분명히 저번에 알아듣게 설명한 거 같은데.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설명 좀 해줄래?」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슬비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그 이후로 거리를 두고 있긴 한데…,
오늘은 불가항력이었다면 믿어 줄 수 있겠냐.」
「어이가 없네, 생각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건가.」
사실 어느 누가 그런 비현실적인 얘기를 듣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겠냐. …라고는 차마 얘기 하지 못했다.
「화요일 날, 너에게 했던 말들은 설명이 아니라 경고였어.
당장 오늘이라도 너는 베타시간대로 넘어 갈 수 있다고,
너는 시간의 흐름이 불안정할뿐더러,
정은하의 힘은 지금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라니까.」
이슬비는 현재 상황이 상당히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기자 상당히 짜증스런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집으로 보내고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최대한 빠르게 먹고 돌아가.」
이슬비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나를 지나쳐 방문으로 향했고
나는 어제 미처 특별활동을 가지 못해 하지 못했던 질문을 꺼냈다.
「잠깐만.」
「…?」
「닉 선생님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
「…어떤?」
「그쪽이 화요일 날 말했던…, ‘닉’은 ‘닉 선생님’이 맞나?」
「그래, 맞아.
그가 ‘이곳’에 왔을 때, 나는 관리자가 아니었지만
이전 관리자에게서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
「뭔가… 이상하지 않냐.」
「뭐가?」
「닉 선생님은 분명… 베타시간대에서 이곳으로 우연히 넘어 온 거잖아?」
「그렇지…, 아!」
이슬비는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내 말을 끊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는 있었겠네.
이전 관리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닉은 ‘이곳’에서 살길 원했고, 그에 따라 원래 ‘이곳’에 존재했던 ‘닉’은
베타시간대로 넘어 갔다고 들었어.」
「베타시간대로…?」
「그래, 닉은 어려서부터 가정사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졌거든.
‘이곳’에서도 그건 크게 변함이 없었고
베타시간대로 넘겨준 닉을 ‘그쪽’의 관계자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키워준다는 조건하에
서로 시간대를 옮겼어.」
「…어이가 없군. ‘이곳’에 존재했던 ‘닉’의 의사는 상관없는 거냐.」
「의사라고 해봐야…, 당시 4살 정도라고 들었는데…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어.
내가 관리자였다면 나는 당연히 닉 선생님을 베타시간대로 돌려보냈을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면?」
「글쎄…,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베타시간대의 ‘닉’이 지금 생활을 만족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에 오고 싶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 않을 거라… 생각되는데.」
「…….」
나는 더 이상의 추궁은 할 수 없었다.
분명 어떤 선택이 ‘그곳’의 ‘닉’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줬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니었기에, 그것에 만족했다.
「금요일 날 특별활동에 오지 않은 것도…, 닉 선생님 때문이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정곡을 찌르는 이슬비의 말에 나는 부자연스럽게 둘러댔고
그 모습이 이슬비에겐 어떤 모습으로 보여 졌을지는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가 관리자가 되고, 그 사람과는 그래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적어도, 네가 걱정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이슬비는 그 말을 끝으로 거실을 향해 나갔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
내 마지막 말이 이슬비에게 들렸는지는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수요일 날 닉 선생님에게서 느낀 내 감정은 매우 위험단계로
어찌 보면 이건 이유 없는 거부, 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때의 나는 닉 선생님을 온 몸으로 거부했었고,
이슬비의 얘기로 어느 정도 반감이 사라지긴 했지만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
무의식중에 시선을 돌리자 책상에 올려져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네모난 액자에 담긴 필름 사진으로 보였는데
그 사진 속에는 버스 안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두 명, 총 세 명이 담겨 있었다.
여자아이 두 명은 정은비와 정은하로 추정돼 보였고,
남자아이는 누가 봐도 나 자신으로 밖에 안 보였다.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왔다면 당연히 사진 한 장쯤은 있을 법 하긴 하지만
내 신경을 건드린 건 필름 사진 오른쪽 하단에 적힌 날짜였다.
「2001년 4월 17일….」
이 날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날로.
분명 우주초등학교 버스 추락사고가 있던 당시의 날짜였다.
이 사진은 적어도 버스 추락사고 당시 나와 정은비, 그리고 정은하는
함께 버스를 타고 있었다고 말해 주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이 사실이 조금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사고 이전의 기억은 남아 있진 않았기에 이 사진을 같이 찍은 기억은 없지만
적어도 사고 이후 들은 얘기로는 생존자는 단 한 명, 나 혼자였던 걸로 알고 있었다.
그때.
「뭐해? 빨리 나와.」
방문이 열리며 이슬비가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액자를 책상에 내려놓고 방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
정은비네 가족과 나, 그리고 이슬비.
여섯 명이서 함께한 저녁식사는 분명 맛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난 정은하에게 밥을 먹기 직전 사탕을 건네줬었고,
정은하는 내 사탕을 받아들고 놀란 눈빛으로 내게 포장이 되어 있는 사탕을 건네줬었다.
정은비는 놀란 눈치였고 이슬비는 별 관심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 여러 가지 대화가 오가며 식사를 끝내고 정은비의 집을 나와서 집에 도착한 뒤,
침대에 누워 정은비와 정은하가 준 사탕을 먹으며 내일은 일요일이니
동생과 장기를 한판 하고 조금 쌀쌀하지만 공원이라도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분명 그때 잠이 들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잠이 들었었다.
체감상으로는 내가 침대에 누워있던 시간이 불과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분명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이상하게도 내 시야에는 우주 초등학교가 보였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안녕하세요?」
저번 주, 자신을 선연화 라고 소개했던 베타시간대의 관리자가 눈에 들어왔고
‘이곳’에 있는 선연화는 당연히 3학년 3반 장기부에 있었던 부원 선연화 선배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고
그 와 동시에 ‘이곳’이 베타시간대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명의 인물이 더 있었는데.
「안녕? 금요일 날은 왜 안 나왔니?」
이슬비의 말대로 라면 ‘이 사람’은 적어도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당시 느꼈던.
그 당시의 오싹함을 넘어 무서움을 느꼈던 그 날이 떠올랐고
닉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잠깐만.」
내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온 몸으로 표출하자 닉 선생은 옆에 있던 관리자를 의식했는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일단은 얘기를 좀 들어보는 게 어때.
너에게 소개 해줄 사람이 있거든.」
「……?」
「너와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사람이 있어.
나에게 적대감을 표하는 건 그와 얘기를 끝내고 난 후 라고 생각하는데 어때?」
「헛소리 하지 마라. 사람을 강제로 여기까지 불러 놓고…」
「그건 아니지, 너를 보낸 건 이슬비 학생인 걸.」
문득 이슬비가 카페에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근데 왜 저번 주에 사고를 당했어야 할 네가, 여기에 앉아서 나와 얘기를 하고 있을까?
「…….」
「너에게도 그리 나쁜 얘기는 아닐 수도 있어. 어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닉 선생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내가 따라 걷자,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선연화는 내 눈치를 보며 같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