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괜찮아…?」
전날 답답함에 바람을 쐬러 나간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는지
감기는 더욱 심해져 결국 학교를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꼼짝없이 침대와 하나가 돼야만 했다.
부모님은 아침 일찍 일을 가셔 집에 없었기에 겨우 몸을 일으켜 전화로 담임선생님에게 결석을 허락 받았다.
「아프지 마…오빠.」
지독한 감기인 탓에 일어나 밥조차 먹지 못하는 오빠가 동생으로서는 생각보다 큰 충격인지
평소보다 빠르게 학교를 나갈 준비를 하고 내 옆에서 울먹이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
마음한편으로는 아픈 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
학교 다녀오면 멀쩡해져 있을 거다.」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은 결국 눈물을 쏟아냈고
필사적으로 동생을 안심시키고 학교를 보낸 후에야지친 몸을 침대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먹었던 약이 슬슬 약기운이 도는지 졸음이 몰려왔고,
‘동생이 무사히 학교에 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무렵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나는 그 무거워짐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대 밑에 깔린 전기장판에 의해 내 몸은 점점 뜨거워졌고
그에 따라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해질 무렵 나는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약은 상당히 효과가 들었는지 몸은 이전보다 개운했고 축 처진 몸은 이전보다
움직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몸을 일으키자 약간의 현기증이 밀려왔고 방을 빠져나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컵 한가득 물을 따라 마시고 있을 무렵,
‘딩-동’
익숙한 초인종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고 컵을 내려놓고 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계바늘은 오후 4시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생은 부모님과 함께 돌아올 것이기에 이 시간에
집을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며 인터폰을 확인했다.
정사각형의 인터폰 화면 안에는 정은비와 정은하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
헛것을 보고 있다고 판단한 나는 멍청하게 눈을 손으로 문질러봤지만
여전히 정사각형 화면에는 정은비와 정은하가 있었고
정은비는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인터폰을 부실 기세로 노려봤다.
다시 한 번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윤달님! 나야 정은비 병문안 왔어 문 좀 열어줄래?」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 왔냐.」
「물론 선생님한테 물어봤지…, 아! 언니도 같이 왔어.」
이미 손님의 정체는 알고 있었지만 수화기로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져봤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은비의 목소리는 상당히 신이 난 듯 높은 톤이었다.
날씨가 추운지 정은비는 손에 입김을 불어 넣었고
그 모습을 본 나로선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야만 했다.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정은비는 누구보다 빠르게 집안으로 들어왔고
정은하 역시 따라 들어왔다.
「안 그래도 어제 언니한테 감기 걸렸다는 얘기를 들었어,
어제 우연히 만났다며?」
정은비는 우리 집 내부를 빠르게 스캔하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집안을 훑어봤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집 거실에 딸린 긴 소파에 앉자
정은하 역시 영혼 없는 걸음걸이로 정은비를 따라 옆에 앉았다.
「결석을 할 줄은 몰랐는데… 몸은 좀 어때?」
「약 먹고 한 숨 잤더니 생각보다 좋아졌어.」
「아~ 다행이네 걱정했거든, 와 보길 잘했네.」
손님 접대용 차와 간식을 꺼내오자 정은비는 자신의 방문목적을 말했고
나름 고마움을 느끼긴 했지만 그것보다 내겐 궁금증 해소가 더 시급했다.
「어제 알게 된 건데…,
정은비 너 역시 어렸을 적부터 나와 알고 지낸 사이인…가?」
「…응, 유감스럽게도 넌 아직도 기억이 안나나 보네?」
짧은 단발머리를 손으로 꼬아 머릿결을 만지며 입술을 삐쭉이는 정은비는
상당한 귀여움을 연출했다.
아니, 이게 아니지.
「그러면…, 저번 주에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한 건…가?」
「나는 너를 보자마자 알아봤는데…, 너 역시 우리를 기억 할 줄 알았지.
근데 새까맣게 잊어먹었더라고…, 그래서 심술을 부려봤어.」
「그건 미안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 기억이 별로 없다,
너희 둘은 내 입장에선 타인 그 자체였지.」
「아~ 타인이라니 너무하네, 우리가 얼마나 친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항상 셋이서 붙어 다녀서 3남매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말야….」
「어렸을 때라면, 언제부터…?」
「음……, 유치원에서 처음 만났고 초등학교 2학년까지 같은 반 이였지.」
정확하게 사고로 인해 기억이 사라진 초등학교 2학년까지
나와 정은비,정은하는 단짝일 정도의 친분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잠깐만, 어제 본 초등학교 졸업앨범에는 너희가 없었는데?」
갑자기 정은비의 표정이 미세하게 어두워졌다.
잠시 정은하를 흘겨보곤 말 못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정적이 흘렀고
미소를 짓고 있지만, 정은비 특유의 미소는 사라진 채로 말문을 열었다.
「응…, 전학을 갔지 2학년 때…….」
「이사?」
「아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어…,
이사라고도 할 수 있겠네…….」
「……?」
아리송한 대답에 의문을 표현해봤지만 정은비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머쓱함에 찻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그 정적을 더 이상 못 견디겠는지 정은비는 땡깡을 부리 듯 말했다.
「그만! 이런 어두운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고!」
아직 궁금한 게 몇 가지는 더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과거여행을 포기해야만했다.
그 이후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날정도로 의미 없는 형식적인 대화가 오가고 난 뒤
정은비와 정은하는 ‘내일 봐’라는 인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고
거실로 돌아와 찻잔과 간식을 치우던 나는 거실 소파 앞에 떨어진 작은 목걸이를 발견했다.
얇은 끈으로 묶여진 검은색의 동그란 형태를 유지한 목걸이는
집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고
정은비,정은하의 것으로 판단한 나는 다음 날 가져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목걸이를 주워들자
어제 정은하를 보며 느낀 알 수 없는 강한 기시감과 불안감이 몰려왔다.
목걸이의 양 쪽에는 작은 버튼이 있었는데
양 쪽의 버튼을 누르자 뚜껑 열리듯 목걸이의 윗부분이 들렸고
목걸이의 내부에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가 박혀있었다.
마치 고대 이집트벽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문자로,
나와는 연관이 단 하나도 없어 보이는 물건이었지만
불안했던 감정은 곧 궁금증으로 변했고 방에서 옷을 입고 집밖을 뛰쳐나왔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정은비와 정은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생각해보니 나는 정은하와 정은비 자매의 집 위치를 알지 못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주변을 떠돌아다녔지만,
별 다른 수확은 없었고 결국 근처 의자에 몸을 맡기고 포기해야만 했다.
「잠깐……, 실례할게.」
멍하니 앉아있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무의식에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서있었고, 이내 의자에 앉았다.
차가운 인상에 어울리는 붉은색 머리와 온 몸을 검은색 정장느낌의 옷으로 치장한
여자는 나름 섬뜩한 느낌조차 들게 만들었고
앉자마자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를 찾고 있나봐? 아니면 물건인가?」
「…그쪽이 상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의아함을 표현하기도 전에 여자는 말을 걸어왔고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대뜸 반말을 하자, 나는 불편함을 어필했고
그 여자는 별 신경 안 쓴다는 눈치로 말을 이었다.
「까칠하네…, 나름 도와주려고 온 건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배우며 자라 왔어서….」
여자는 미소를 띠며,
「딱딱하기는…, 이런 성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
더 이상 얘기를 진행하다간 생각보다 피곤해질 것 같기에
의자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려했지만 이 여자는 아직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찾고 있는 사람…정은비,정은하……, 아냐?」
그녀가 던진 말은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했고
뒤를 돌아보자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정체모를 여자는 의자에 앉으라는 듯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날을 새우고 남을 대하면
들어올 복도 빠져 나간다는 말은 안 배웠나?」
「당신 누구야…?」
「그래, 나를 처음 봤을 때 그 질문을 먼저 했어야지」
「당신 누구냐고.」
질문에 엉뚱한 대답이 계속 돌아오자 나는 직접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했고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성격하고는…, 네가 화를 낼 입장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녀는 내가 말을 하려하자, 재빠르게 말문을 틀어막고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정반하장도 정도껏 해야지…, 오히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고 나야.」
「……?」
「이렇게 될 거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래도 맘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지금까지 지낸 것처럼 모르면 모르는 채로 살아가면 되는데,
덕분에 모든 게 생각보다 많이 틀어졌잖아.」
「……?」
「다시는 정은비와 정은하의 주변에서 알짱거리지 마,
너희는 서로 모르는 척 살아 가는 게 너희에게도 이득이야.」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자 얼음장보다 차가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그려졌다.
「그 애들이 먼저 접근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밀어내, 아니 그냥 네가 이 주변에서 사라지는 건 어때?」
「이봐, 정도껏….」
「내 말 명심해 너희는 서로 상극일 정도로 연이 좋지 않아,
서로를 위해서라도 너희는 떨어져 있어야만 해. 이해했어?」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는데.」
「정은비와 정은하의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내가 사라져야 할 이유를 이해 못하겠다고.」
정체 모를 여자는 한숨을 내쉬고 나를 한심하다는 듯 노려봤다.
「내가 이유를 말해줘도 넌 이해할 수 없겠지,
네가 그 이유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넌 그러지 못해.」
말이 끝나자마자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다 멈추고 다시 말했다.
「아까 내가 누구냐고 물어봤지?
내 이름은 이슬비야, 아까 내가 한 말들 잘 생각해봐.」
그 말을 끝으로 자기를 이슬비라고 소개한 여자는 순식간에
아파트 인파들과 하나가 되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슬비라는 여자가 한 말들은
당최 무슨 소리를 하지건지 하나도 이해를 할 수 없는 건 고사하고
요즘 정은비와 정은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도 이름을 들을 정도의 유명인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이슬비…….
나는 분명 어디선가 이슬비라는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다.
언제,어디서,누구에게? 라고 물어온다면
정확하진 않지만 최근, 어느 곳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곳에서,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는 사람에게 이슬비라는 이름을 들었다고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아…….」
너무나도 많은 것이 머릿속에 뒤엉켰고 마치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혼란스러움이 무한의 궤적을 그리며 나를 괴롭혔다.
18살,
18년을 살아오며 나름 평범했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은
보기보다 평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은비와 정은하가 나타나자마자 끊임없이 사건들이 생기는 기분이었고
그것에 대한 나의 대처방안은 너무나도 무력하여
물 밀 듯 들어오는 위험요소를 감당하지 못한 채 나는 한동안 의자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마저도 쉽게 허락할 수 없는지
차디찬 바람에 의해 몸에 한기가 돌기 시작했고
결국 모든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고
그 와 동시에 감기에 의한 것인지, 다른 무엇에 의한 건지 알 수 없는 두통이 몰려왔고
나는 더 이상의 생각을 그만두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