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인연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혹 인연을 믿고 있는가?
이번에 하게 될 이야기는 위의 주제와 매우 큰 연관성을 띠고 있다.
사실 나 자신은 인연에 큰 관심이 없는 편으로,
인연이란 것을 생각해 볼 법한 사건이 없기에 생각하고 말고도 없이
인연에 대해 모른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판단에 맡기려 한다.
이 이야기는 멀지 않은 과거에 겪은 이야기로서 정은하와 함께 하교를 했던, 소나기가 내린 그 날.
그 날을 계기로 나는 결국 지독한 감기에 걸렸고
주말, 집에만 틀어박혀있으면 나을 병도 불치병이 된다는 부모님의 말에
안 그래도 답답함을 느끼던 내가 바람의 쐬러 나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1년 365일 내내 내릴 것 같던 비는 언제 왔었냐는 듯 사라졌지만
비가 온 여파로 인해 추위는 집 밖에 나온 걸 바로 후회하게 될 정도로 강력했다
나는 재빠르게 목적지를 정하고 발걸음을 옮겼고
도착지는 중학교 시절부터 자주 가던 ‘진달래 공원’이였다.
동네와는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는 공원이 하나있었는데
그 덕분에 주말에도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 한명 없는 한적한 분위기를 연출 해내는 곳으로,
그 한적한 분위기를 싫어하지 않는 나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밖의 추위의 강도를 봤을 때 오래 있을 순 없을 것 같아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묘한 냄새가 공기를 타고 후각을 건드렸고
몸 상태가 안 좋아짐에 따라 분명 식욕이 없었는데 무언가에 이끌리 듯
나도 모르게 내 후각을 자극한 범인을 찾아 시선을 돌렸고
그와 동시에 작은 분식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적 몇 번인가 와 본 기억이 있는 곳으로, 할머니와 아들이 운영하는
작지만 따뜻했던 장소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아이들이 돈이 있건 없건 배고픈 얼굴로 그 주변을 지나가면
주인할머니는 언제나 커다란 종이컵에 먹거리를 가득 담아주셨고,
나 역시나 많이 얻어 먹어본 동네꼬마아이였다.
초등학교 이후 직접 와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름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작은 궁금증을 간직한 채 분식집 문을 열었다.
분식집 안으로 들어서자 내 시야에 들어온 분식집 풍경은
작고 소소했던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다.
구식 철제 의자와 기둥이 네 개 달린 동그란 작은 의자들과 오래된 세월을 대변하는듯한
모서리가 많이 긁히고 떨어진 테이블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벽에는 어렸을 적 재밌게 봤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의 브로마이드가 붙여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분식집의 모습 그대로였다.
단 하나를 제외하곤…….
「어…, 안녕……?」
「…….」
분식집 구석 쪽 테이블에 앉은 정은하와 눈이 마주친 나는
생각 이상으로 당황했지만 일단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상당히 어색하게
인사를 시도해 봤지만 별 다른 미동 없이 정은하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나기가 오던 날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의 강한 충격을 받은 나는
그 당시 마땅한 대처법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꼴사납게 도망치듯 집에 왔었다.
그 사건을 설마 내 주변인이 아닌 정은하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
물어볼게 산더미 같이 있었지만, 나는 죄 지은 사람마냥 출입문 바로 앞 쪽에 앉아
주인할머니에게 간단하게 주문을 했고
주인할머니는 나를 기억하시는지 말을 거셨지만
뒤에 앉아있는 정은하에게 모든 신경이 쏠린 나는 영혼 없는 대답으로
할머니의 추억 여행을 의도치 않게 방해했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음식물을 허겁지겁 입 안으로 쑤셔 넣었고
중간 중간 정은하를 흘겨봤는데 정은하의 테이블엔 음식은커녕 무언가를 먹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해 볼만 했지만 이때의 나는 그 상황에 의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고
테이블의 모든 음식을 해치운 뒤 주인할머니에게 돈을 지불하고 분식집을
도망치 듯 뛰쳐나왔다
*
윤달님이 분식집을 나간 뒤 정은하가 의자를 정리하며 나갈 준비를 했고
그 모습을 본 주인할머니가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물었다.
「은하 학생, 기다린다던 사람이 달님이였어?」
「…네 맞아요.」
「그런데 왜 그냥 보냈어? 서로 만나기로 한 거 아니야?」
「…….」
정은하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아래로 내려 인사를 하고 분식집을 빠져나왔다.
*
꼴사납게 분식집을 빠져나온 뒤,
왜 나는 정은하에게서 도망쳤는지 아직까지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우주초등학교 버스 추락사고’
정은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나와는 분명 깊은 연관성이 있다.
빗길에 초등학교 학생들을 태운버스가 도로를 벗어나 절벽 아래로 추락해
단 한명을 제외하고 전부 사망한 끔찍한 사고로 당시 뉴스에도 오랜 시간 나올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나는 충격으로 상당히 많이 힘들어했었고
다행히 부모님과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상생활을 다시 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나는 태어난 이후부터 사고가 생기기 전, 2학년까지의 기억이 사라졌다.
지금은 생활하는데 큰 문제가 없기에 자연스레 기억에서 흐려지고 있었는데
설마 이 사고가 정은하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타이밍이었는지
그 후 5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정은하에게는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샌가 분식집과 문방구들이 옹기종기 모인 학교근처를 지나
아파트와 빌라들이 불균형하게 자리 잡은 단지에 들어섰다.
어렸을 적 집 담벼락들이 모이고 모여 달동네를 만들어 내어
동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점점 사라져가는 옛 기억을 떠올리기엔 최적의 장소였지만
어릴 적 아이들이 뛰어 놀며 담벼락을 오가며 서로 웃고 떠들던 달동네는
이제는 남아 있지 않고,
부서진 연탄과 아이들의 낙서가 가득했던 담장은 차가운 시멘트벽이 우중충하게 솟아
화려하지만 냉랭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때,
빌라주차장 구석진 곳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동물을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평소라면 별 생각 없이 지나갔을 텐데
어느 샌가 내 발걸음은 주차장 아래로 향하고 있었고,
작은 고양이는 도망갈 법도 한데 가까이 다가가도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며
‘냐-’
라는 앙증맞은 소리를 내며 나를 보고 있었다.
흰색 털을 가진 고양이였지만 먼지로 상당히 얼룩진 작은 고양이는 무릎을 구부리고
자세히 보려 상체를 숙이자 오른발로 고개를 비비적거렸고
그 모습에 귀여움을 느껴 우유라도 사와야겠다고 생각하고 근처 슈퍼에 들러
대충 손에 잡히는 작은 우유를 산 뒤 주차장으로 달려간 나는
또 한 번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쪼그려 앉은 채 고양이의 머리를 쓰담아 주던 정은하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또 다시 어색한 인사를 해야만 했다
「어…, 고양이 좋아…하나봐……?」
「……응.」
겨우 말문을 열은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양이와 정은하에게 다가간 뒤
고양이를 보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그와 동시에 정은하의 고개도 위 아래로 살짝 흔들렸다.
혹시나 고양이가 놀라지는 않을까, 정은하는 최대한 고양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고
아주 미세하게 작은 미소가 보였다.
정은하에 대한 경계심이 아주 조금은 풀리는 순간이었다.
분명 나와 비슷한 속도로 여기에 왔다는 건 나와 동시에 분식집을 나왔다는 건데…
문득 정은하에게 나를 따라 왔냐고 물어보려다가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는 걸 깨닫고 급하게 생각난 질문을 던졌다
「정은비는? 혼자 나온…건가?」
정은하의 고개가 위 아래로 흔들렸다.
「아…그래, 나는 저번에 비를 맞고 지독하게 강한 감기에 걸렸어
조금 답답해서 바람을 쐬러 나왔는데 쌀쌀하네…….」
「…….」
「아까 분식집에서 인사를 못한 건 미안, 조금 당황해서…」
정은하의 고개가 다시 위 아래로 흔들렸다
「우리 집에도 요만한 고양이가 있는데…,
우리 집 고양이와는 다르게 얌전하네…….」
「…….」
집 밖을 나선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강력한 어색함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 맘을 알아준 건지(?) 갑자기 새끼고양이가 정은하의 손에서 벗어나
어색하게 폴짝거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고양이가 주차장을 나가자 정은하 역시 일어나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갈게’라고 짧게 인사를 한 뒤 걸음을 옮겼다.
고양이를 주기 위해 사온 우유가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정은하가 사라진 뒤 다시 공원을 향해 걸었고,
머릿속엔 감기에 의한 두통이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머릿속은 폭주상태였다.
‘기시감’
정은하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이 묘한 기분,
정은하 자체는 분명 어색하지만 내가 사는 익숙한 동네에 들어있는 정은하와
작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정은하, 어릴 적 갔던 분식집의 정은하…,
오늘 느낀 기분은 어색함보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닿을 것 같지만 닿지 않는 어릴 적 기억,
내 머릿속을 폭주상태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정은하 그 자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기억속의 정은하,
하지만 나는 정은하를 알지 못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소나기가 내리던 그날도 혹시 나와 알고 있는 사이인가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고
초등학교 시절 졸업앨범을 찾아봐도 정은비와 정은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진달래 공원에 도착한 뒤 나는 잠시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대로 공원을 가로질러 공원 끝자락에 있는
언덕을 향해 올라갔고 정상이 가까워 질 때쯤 최종 목적지인 직사각형 모양의 등받이가 달린
의자가 보였다.
의자엔 누군가가 앉아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낀 건지 의자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자
나는 또 다시 강한 충격과 함께 기시감을 느꼈다.
빨간색 목도리와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짧은 검은 코트 그리고 빨간색의 작은 운동화를 신고
진달래 공원 언덕에 서있는 정은하의 모습은 기억 저편의 한순간을 떠 올리게 했다.
오늘 느낀 묘한 느낌의 정체는 과거의 정은하와 현재의 정은하의 모습이
혼선을 빗으며 생긴 게 확실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무엇엔가 확신에 차 있었다.
그 확신을 더해주는 것은 나와 정은하의 과거 일부분 일 것이다.
오늘 하루 만난 정은하는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했고
나는 저번 소나기가 오는 날 마음속에서만 간직한 질문을 던졌다.
「정은하, 너는… 나를 알고 있지?」
정은하의 고개가 위 아래로 흔들렸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정은하의 고개가 위 아래로 다시 흔들렸다.
「나 역시 너를 알고…있는 건……가?」
정은하의 고개가 위 아래로 또 다시 흔들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응.」
지독하게 강한 감기에 걸린 주말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해 보겠다,
당신은 인연을 믿고 있는가?
이 이야기에 대한 당신의 판단은 어떠한가?
어딘가에서 들은 얘기를 빌리자면 악연도 인연이라고
나와 정은하가 악연인지 아닐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정은하는 위험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 혹은 먼 미래에,
내 기억 저편에 있는 오늘 나를 괴롭혔던 과거 정은하와의 인연 역시 알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멀어져도 결국은 돌고 돌아서,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인연이 아닐까
이 세상은 그런 식으로 인연이 돌고 돌아 만들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 한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