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금 긴장했어. 떨려”
엘리베이터를 겨우 빠져나오고. 1307호를 찾는 건 금방이었다. 현관문부터 대단해 보이는 이 문이 주는 설렘에 시간을 보내다 이제 비밀번호를 누르지만.
0922, 비밀번호를 누르고 손잡이를 돌리자 열린다. 이 문이. 28살 고유미가 살고 있는 ‘내 집’이기도 하고 연예인 ‘고수지’의 집이기도 한 곳. 궁금하다. 이 안이 어떻게 생겼을지.
현관에 발을 들이고, 한 발 걷자 불이 ‘탁’ 켜진다. 불 켜지고 보이는 것들.. 놀라움의 감탄이 흘러나온다. 현관만 들어서도 알 수 있다. 이 집은 혼자 살기에 엄청 넓고 좋은 곳이다.
또 바로 옆 신발장을 보니 상상도 못해 본, 엄청 비싸 보이는 구두와 신발들이 각 잡혀 있고, 그 옆엔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브랜드의 신발들이 줄 세워져 있다.
“내가 갖고 싶던 거! 한국에 아직 안 들어 온 브랜드인데.. 지금이면 들어 왔을 라나”
구두, 운동화를 눈에 담고 더 커진 기대감으로 현관을 통과. 안으로 들어간다. 대리석 깔린 바닥., 곳곳에 값나가 보이는 인테리어가 보이고 제일 가까운 방을 여니 TV에서나 보던 드레스 룸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옷들. 한 쪽엔 상의, 한 쪽엔 하의, 원피스, 중간엔 악세 사리들. 눈을 뗄 수가 없다.
옷 방 구경이 끝나고 다음 방으로 가니 빽빽이 들어 있는 책장이 보인다. 가끔 만화책도 끼어 있는 걸 보니 웃음이 난다. 28살의 나도 여전하구나 싶어서.
옷 방과는 다르게 어지럽혀져 있는 책상 위, 그 중 새 것처럼 깨끗한 몇 개의 대본들 사이. 찢기기 직전, 다 낡은 대본을 든다.
“내가 쓰던 건가”
내 글씨다. 내가 쓴 건가. ‘발음 더 세게’, ‘호흡 중요’, ‘대사보다 감정에 충실히’. 대본을 넘기는데 글이 계속 보인다. 얼마 전까지 오디션 보던 대본들에 적었던 거와 비슷한 글들이다.
나.. 여전하구나, 정말.
“우리 아버지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가져오세요. 그 전에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생각이 틀렸..틀려..ㅅ..틀ㄹ.. 안 된다 안 돼..”
분명 내가 한 걸 텐데. 입에 붙지를 않는다. 아니 몇 일전까지 오디션을 보며 그렇게 발음 연습을 했었는데, 이게 읽혀지지 않으니 괜히 속상하다. 23살의 나로서도, 28살이 되어버린 나로서도.. 2배로 속상해진다.
대본을 놓고 거실로 가는 길. 간간이 내 사진이 보여 참, 민망하다. 28살 배우 ‘고수지’의 사진들. 보니 대부분 팬들이 선물 해 준 모양이다. 사진을 구경하며 들어 온 거실, 부엌.
이건 내 집이 아니다. 내 집이.. 이렇게 고급스러울 리가, 이렇게 예쁠 리가.. 이렇게 깨끗할 리가!!
‘방 안 치울래?!’
‘너희 집엔 놀러 안 갈래...’
‘자취하면 청소하는 거 귀찮아 질걸. 너 어떡할래?!’
주변인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여전하게 들리는 데.. 이 집은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테리어에 책상 위를 제외하곤 어질러진 곳도 하나 없다. 23살의 내가 미래에 살고 싶던 집을 생각했을 때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 이상하긴 해도 이 나름 마음에 들고 지금은 좋기만 하다. 이대로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아도 좋다 할 만큼 예쁘게 되어 있으니까.
쇼파도 크고 TV도 크고 자취방의 3배씩 되는 크기다. 3배 넘는 것도 있고.. 자취방에 없던 것도 있으니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지만.
“아.. 배고픈데..”
구경도 힘이 있어야 더 하는 거.. 살짝 고파오는 배에 냉장고를 여는데. 없다. 이 큰 냉장고 안에 먹을 게 하.나.도 없다. 있는 거라곤 엄청난 양의 물과 과일 몇 개, 계란, 닭가슴 살, 대부분 다이어트 식품들이다. 밥반찬 몇 개가 보이긴 하나, 둘러보고 알았다. 이 집엔 일단 쌀이 없다.
“먹을 게 없어..”
도저히 먹을 걸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쇼파에 풀썩 앉는다. 기분이 좋다, 기쁘기도 하고 심적으론 힘들지 않는데, 이상하게 몸이 지친다. 뭐했다고 이러는 지 쇼파에 한 번 앉으니 힘이 빠져 일어나기가 싫다. 쇼파가 침대처럼 포근하니 더..
이렇게 순간 눈이 감기기 직전, 유미의 잠을 방해하는 벨소리가 울린다. ‘쿵..! 쿠루루쿵! 쿠쿠쿵!’ 적응 안 되는 소리다. 노곤한데, 벨소리가 시끄러워 안 받을 수도 없다. 몽롱한 눈으로 핸드폰을 본다. 이젠 진동까지 합해져 더 시끄러운 핸드폰의 액정 속 이름. 그래 너 일 줄 알았다.
“왜?”
‘전화 받는 매너 봐. 이건 똑같네.’
“잠들기 직전이었단 말이야”
‘또 자냐? 쯧쯧.. 나 한 시간 정도 뒤에 도착한다는 말 하려고 전화 했어’
“그래? 알았어.”
전화를 받곤 있지만, 정신은 아직 쇼파 위 잠결 속이다. 빨리 전화를 끊고 자고 싶다.
‘뭐 필요 한 거 있어? 집 구경은 다 했어?’
“넓긴 엄청 넓어. 들어올 때부터 놀랬다니까. 잠이 와서 아직 다 구경 못했지만”
‘그래. 자라 자. 필요한 건 없다는 소리지?’
“...음.. 먹을 거? 냉장고는 큰데 먹을 게 없더라. 매콤한 거, 사와”
알았다는 말과 함께 유현이 전화를 끊자 유미는 눕는다. 다시 누워도 침대만큼 포근한 소파다. 딱 내가 돈 벌면 사고 싶던 그런 촉감이라 더 좋다. 베개도 있고,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은 따스하니 이불이 없어도 낮잠 자기 딱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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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유미와 똑같은 구조의 집. 1507호, 시우의 집이다. 홀로 거실에 앉아 대본을 읽던 시우는 도저히 안 되겠는 지 얼마 안 남은 대본을 덮고 만다. 집에 들어와 대본을 읽기 시작해 ‘아니다’ 하고 대본 보다 ‘아닌데’하고 대본 접기를 반복했으나 이번엔 정말 더 이상 안 읽힐 것 같다.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아 아예 테이블에 덮어 놓는다.
엘리베이터 안, 유미가 떠나지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하지 않은 게 없다. 상황도 유미의 행동도. 다.
“고유미 맞는데. 고유미.”
몇 년을 같이 지냈는데, 못 알아볼까. 엘리베이터 안의 여인은 고유미가 확실하다. 얼굴을 가리고 만난 적도 많으니 모자를 썼다고 몰라볼 수는 없지.
문제는 내가 아는 그 고유미가 맞음에도 내가 아는 고유미가 아닌 거처럼 행동한다는 거. 마지막 ‘죄송합니다’는 귓가에 맴돌아 자꾸 생각에 물꼬를 튼다. 가끔.. 아주 가끔 유미가 장난을 치기도 한다. 정말 힘들 때,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할 때. 모두를 외면하려 한다는 거. 안다고 하진 않았지만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건 처음이라 그걸 뛰어 넘어 이상하다. 거기다
‘7일 뒤에 올 거예요.’
라고 했던 건태의 말. 불과 2일 전이다. 그 말에 며칠은 족히 남았다가 생각하고 연락도 안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것도 혼자 여행 갔다던 사람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시우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분명한 건 없고 궁금증만 남기니 이걸 어찌 푸나.. 거기다 오늘은 원래 시우, 유미, JUN 이렇게 3명이서 오랜만에 놀기로 한 날이 아닌가.
“그래. 직접 물어보면 되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에 시우는 다시 옷을 입는다. 궁금하니까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