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을 따돌린 대비 김씨와 강상궁은 더 큰 문제에 봉착했다.
도성을 빠져 나가야하는데, 군사들이 문 앞에서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출입자들을 검문하느라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강상궁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갓 돌 지난 아이를 등에 업고 여인 둘이서만 도성 밖을 나가려 한다면, 의심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금세 자신들을 쫓는 내금위 군사들이 쫓아와 정체가 탄로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줄이 줄어들수록, 대비의 속도 점점 타들어갔다.
이윽고 그들의 검문 차례가 되었다.
그 때였다.
어느새 대비의 사촌 오라비인 이몽룡이 나타나 군사들에게 호패를 내밀었다.
호패를 확인한 군사가 물었다.
“어디에 가시는 길입니까?”
“홍문관 수찬으로 지내다, 얼마 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식솔들을 데리고 아버님이 계신 남원으로 가는 중이라네.”
눈치 빠른 강상궁은 얼른 쓰개치마를 벗어 아기를 보였다.
군사는 그들이 완벽한 한 가족임을 확인하자, 순순히 보내주었다.
그들은 도성 밖을 완전히 벗어난 후에야 한숨을 돌렸다.
“오라버니, 어찌 된 일입니까? 어찌 알고...”
“대비마마도 참... 궁 안에 소인이 심어 둔 사람이 한 둘 인줄 아십니까? 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제 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버님 댁엔 이미 감시하는 자들이 붙었을 테니, 남원에 계신 제 아버님께 의탁하시려 할 것이라 예상해서, 남원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을 지키고 있었지요.”
“아무튼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아녀자 둘이 먼 길을 떠나는 것이 불안했는데. 어서 남원으로 가시지요. 오라버니.”
“안됩니다. 그곳에도 곧 사람이 붙을 것입니다.”
“그럼 어찌합니까?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의지할 곳 없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제가 거처할 곳을 정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남원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궁에서 도망쳐 나온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젯밤에 상선이 다급히 찾아와, 강상궁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합니다.”
몽룡이 강상궁을 쳐다보았다.
“뭐라 하던가?”
“오늘 주상전하께서 대군 아기씨를 뒤주에 가두고, 대비 마마는 유폐시키실 것이라 하셨답니다.”
갑자기 대비 김씨가 울음을 터트렸다.
“제 한 몸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으나, 어린 자식을 죽일 수 없어 도망친 것입니다.”
몽룡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자신을 관직에서 쫓아낸 배후가 상선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주상을 위해 대비의 외척을 쳐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비와 대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상선이 미리 알려줬다니, 뭔가 수상하고 찜찜한 낌새가 느껴졌다.
*****
궁궐 편전 앞에서는 상선이 최원을 맞이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편전 안에서 주상의 격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냘픈 여인 단 두 사람을 못 찾고 있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게다가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까지 데리고 있지 않더냐! 당장 잡아오너라! 내 눈 앞에 대비를 내어 놓으란 말이다!”
밖에서 주상의 고성을 들은 원은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 저자거리에서 만난 대비는 친정에 다녀오려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도망친 것이라니.
그들의 안위도 걱정됐지만, 이번 일로 인해 주상의 불안증이 폭발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이처럼 원이 복잡한 심경에 휩싸여있는데, 곁에 있던 상선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새벽부터 내금위장을 저리 다그치고 계십니다. 대전은 물론이고 궁궐 내 모든 내관과 궁녀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있습니다만, 대비마마께서 도망치셨다는 비밀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아마 곧 도성 안에 입을 가진 자들이라면 모두 다 한 마디씩 떠들어 댈 것입니다.”
그의 말에 최원이 상선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상선부터 모범을 보이시는 게 순서 아니겠는지요.”
상선이 무안한 표정으로 고갤 숙이는데, 마침 안에서 내금위장이 물러나왔다.
상선은 마지못해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전하, 좌포청 최원 종사관이 들었사옵니다.”
“들라 이르라.”
“드시지요.”
최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상선의 표정이 갑자기 비웃음과 냉소가 뒤섞인 묘한 미소로 바뀌었다.
편전에 든 최원은 주상에게 예를 갖추고 앉았다.
주상은 인사도 받지 않고 다급하게 말했다.
“내 자네에게 긴히 부탁할 일이 있어 입궐하라 했네.”
“부탁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명만 내리옵소서. 받잡겠습니다.”
“은밀히 대비 마마와 의령대군의 뒤를 쫓게.”
“?!”
“왜? 자네도 그들 편인가? 자격이 없는 나를 부정하고 적장자인 의령대군을 옹립하려는 무리 말 일세!!”
“그 무슨 당치 않으신 말씀이십니까. 더구나 자격이 없으시다니요. 지난 전란 시,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 모집과 군량미 구축을 하시는 등 만백성이 감복해 마지않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원의 말을 듣고 주상이 헛웃음을 쳤다.
“전장에서 수많은 적과 맞서 싸웠다는 자네도 아직 순진하군.”
“....”
“능력보다 태생이 인생의 구 할은 결정짓는다는 것을 진정 모른단 말인가?”
“오해이십니다. 대비 마마와 두 분께서 허심탄회하게...”
원의 말을 자르는 대신, 주상은 서탁 아래에 있던 물건을 올려놓았다.
그것은 나무토막 위에 嫡長承繼(적장승계 : 정실부인이 낳은 장자가 승계함)라 적혀있는 것이었다.
글귀를 확인한 원도 놀라 용안을 바라보았다.
“대비마마께서 남겨두고 떠나신 거라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역모, 모반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겠는가!!”
최원은 할 말을 잃고는 그저 어두운 낯빛으로 나무토막만 쳐다볼 뿐이었다.
*****
심청은 배씨 부인 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집 앞을 기웃거리기만 했다.
배씨 부인이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을 꾸몄는지 궁금하고 억울해서, 당장에라도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니, 그 보다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무서운 진실을 알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런 이유로 망설이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계집종 둘이 밖으로 나왔다.
심청은 그들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까 싶어 황급히 돌아섰다.
계집종들은 청을 그냥 지나쳐가며 자기들끼리 잡담을 했다.
“마님 정성도 대단하지 않아?”
“그러게. 아무리 용하다고 해도 여기서 지리산이 어딘데, 거기까지 가시냔 말이야.”
심청은 배씨 부인이 지리산에 갔다는 말에 계집종들 뒤를 조심스레 쫓아가며 귀를 기울였다.
“내말이! 종복 아재가 갔다오겠다는데도 굳이 직접 가야 하신다고 하셨대.”
“마님 정성을 봐서라도 대감마님께서 금방 쾌차하셔야 할 텐데...”
“암, 얼른 일어나셔야지. 우리 마님 같은 분이 어디계시다고. 그 정성을 봐서라도 꼭 일어나셔야지.”
“근데, 그 의원이 그리 용하다며?”
“명의도 그런 명의가 없다잖아. 이곳 한양까지 소문난걸 보면 모르겠어? 못 고치는 명이 없어서 그 이름만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엄청나대.”
“이름이 뭔데? 응? 그 의원 이름이 뭐야?”
“억삼이라나 뭐라나. 지리산 근처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대.”
심청은 ‘억삼’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계집종들을 쫓아가던 걸음을 돌려, 곧바로 지리산으로 향했다.
*****
억삼의 초가집은 울창한 나무들이 요새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찾기는 물론 접근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 초가집에서 억삼과 한 손에 한약첩을 든 배씨 부인이 밖으로 나왔다.
배씨 부인은 억삼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재와 명의라고 해도 정성이 부족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배씨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억삼은 짐짓 점잖게 당부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으니, 이제 대감님의 건강은 마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이제 곧 해가 질 터이니 제가 길을 안내하지요.”
“아.. 아닙니다. 이런 신세까지 질 수 없지요.”
“산길이 워낙 험해서 아녀자 혼자 내려가기 쉽지 않아 그럽니다. 어서 가시지요.”
억삼의 말에 배씨 부인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따라 나섰다.
그러자 억삼은 배씨 부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혼잣말로 궁시렁거렸다.
“이래서 빈말을 못한다니까. 사람이 두 번은 사양을 해야지. 어떻게 달랑 한 번 됐다 하고선 냉큼 따라나선담. 아, 귀찮아....”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억삼은 금세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닙니다. 어서 가시지요.”
억삼은 또 다시 들릴 듯 말 듯 툴툴거리며 앞장섰다.
*****
지리산 초입 마을.
쉬지 않고 지리산까지 온 탓에 심청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심청이 각설이 패거리 같은 몰골로 마을 입구를 기웃거리자, 마을 사람들이 경계하듯 힐끔거렸다.
하지만 심청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는 한 아낙네의 앞을 막아섰다.
“여기 억삼이라는 용한 의원이 산다는데, 거기가 어딥니까?”
아낙이 청을 무시하고 가려고하자, 청은 아낙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낙이 잡힌 손을 빼내려고 버둥거리는데, 심청은 그 손을 더욱 꽉 잡으며 겁을 주듯 눈을 부라렸다.
그 모습에 더욱 겁을 먹는 아낙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을 뒤쪽 산을 가리켰다.
잠시 후, 청은 그 산 속에 있었다.
안 그래도 거지와 다를 바 없던 심청의 몰골이, 산 속을 헤매는 동안 점점 더 흐트러졌다.
가시덤불에 긁힌 듯 얼굴에는 상처가 나고, 옷도 여기저기 찢겼다.
심청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가득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눈빛만은 매서웠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밤새 산 속에서 어떤 변고가 생길지 몰랐다.
한 번 죽은 목숨, 또 죽을까 무서운 게 아니었다.
어렵게 잡은 부활의 기회를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아, 청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때였다.
백 보 정도 앞에서 순간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했다.
청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그 불빛을 향해 달려가는데, 그만 발을 삐끗했다.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심청은, 결국 제 몸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비탈길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