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터덜터덜하니 무겁다. 시무룩한 얼굴로 복도를 걷던 희우는 가슴 속에 품어왔던 한숨 한덩어리를 밖으로 토해낸다. 풀어헤쳤던 머리를 질끈 묶는 손길은 유난히 주눅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게 벌써 몇번째 탈락이더라. 희우는 어느 순간부터 그 횟수를 세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으면서도 괜히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그녀는 복도를 걸어나오며 벽에 붙은 글씨를 괜시리 쳐다본다. '오디션'이라는 세 글자를 쫓아다닌 것이 벌써 4년. 배우가 되겠다며 패기있게 서울로 올라왔지만 이제는 가족과 친구들조차 어떻게 됐냐고 먼저 묻지 않는다.
"집에 가야지..."
휴대전화를 보니 시간이 어느새 3시 반. 어제 이 시간이라면 원래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갈 시간이었지만, 그마저도 오디션 시간때문에 어제 막 때려친터라 이젠 갈 곳도 없다. 힘없이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레 휴대전화를 꺼내 구인공고를 뒤적이는 손짓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아주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디보자, 이건 전에 지원했다가 떨어진거고, 저건 집에서 너무 멀고, 요건 또 빡세기로 소문난 데네. 취업난이 심각하다고 하더니 아르바이트마저 이럴줄이야.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스크롤하는 엄지손가락에는 영혼이 없다. 식당, 카페, 패스트푸드, 영화관, 콜센터.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지만 단순하고 노동 대비 보람이 적은 일들을 전전하기엔 이미 지쳐있었다. 난 연기를 하고 싶은데. 돈을 많이 벌겠다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연기를 하고 싶을 뿐인데, 내가 설 무대는 정말 이 세상엔 없는걸까.
고민스럽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그녀가 구인공고 대신 메신저로 화면을 바꾼다. 노란색 배경 위에 자신의 보낸 마지막 메시지가 보였다. 선배, 잘 지내요? 혹시 거기 사람 안 구해요? 그렇지만 그게 끝일뿐, 거기에 답장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며칠 전 극단에서 일하는 지인들에게 민망함을 무릅쓰고 연락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허탈함뿐이라니. 창피함에 괜히 연락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 왜 이리 팍팍하냐..."
결국 휴대전화 대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희우의 목소리가 씁쓸하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애써 일자리 걱정에서 벗어났더니 고새 또 이어지는게 끼니 걱정이다. 이젠 한숨조차 쉴 여력도 없어서 그냥 멍하니 창문에 머리를 툭하고 기대는데, 마침 띵동하는 메신저 알람이 들려온다. 그러자 금새 화색을 되찾은 희우가 후다닥 주머니에서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그렇지만 화면을 본 얼굴에 금새 실망감이 드리운다.
[희우씨, 이번달에도 월세 밀리면 곤란합니다. 다음주까지 입금 부탁드려요.]
아, 최악이다. 희우는 순간 휴대전화를 집어던질뻔한 제 손을 억지로, 아주 힘겹게 억눌렀다. 참자, 채희우. 가뜩이나 돈도 없는데 휴대폰까지 부숴먹으면 쓰겠니? 다행히도 아직 이성과 인내심이 멀쩡했는지, 희우의 손은 죄 없는 휴대전화를 다시 고이 잡아들고는 지겨운 구인공고 앱을 켰다.
"지겹다..."
혼잣말과 함께 다시 스크롤을 굴리는 손가락은 권태와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영혼없는 검은 눈이 휙휙 화면을 넘겨본다. 버거왕에서 크루 구합니다, 막도날드 알바 모집, 또봐유편의점 야간, 영업 없는 즐거운 인바운드... 아 그러셔, 참 즐겁기도 하겠네. 스크롤 한 번에 소리없는 볼멘소리 한 번. 리드미컬하게도 이어지는 구직 활동은 과연 언제 끝날까. 왕비 역할 하실분 구합니다. 왕비? 이건 또 뭐야?
수상하다, 엄청나게 수상해. 그렇지만 호기심은 희우의 손가락보고 그 수상쩍은 공고를 누르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래,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읽어나 보지 뭐. 결국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한 희우가 미심쩍은 얼굴로 글씨를 터치하고 만다.
내용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왕비 역 하실분 구합니다. 자격요건은 연기에 자신있는 열정적인 20대 여성. 장소는 차후 공지 예정. 면접 통과시 계약금 일시 지급, 지원은 아래 번호로...
"...계약금 일시 지급?"
계약금이 얼마일지는 모르겠지만 솔깃한 얘기다. 거기다 자격요건도 딱이지 않은가. 나 채희우, 열정이라면 따라올 사람 없고 연기에 대한 자신감이라면 차고 넘친다. 거기다 나이는 스물 일곱, 창창한 20대에 누가봐도 확실한 여성이다. 밑져야 본전이지 뭐. 희우는 '읽어나보자'던 생각을 까맣게 잊고 결국 공고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른다. 뚜르르하는 평범한 신호가 몇 번 흐르자 여보세요 하고 젊은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저, 공고보고 연락드렸는데요..."
**
복도를 걷는, 아니 뛴다고 하는 것이 더 가까울 법한 급한 걸음으로 움직이는 남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아로닌은 수천년간 마왕을 보좌해 오며 산전수전은 물론 공중전까지 겪은 경험많은 재상이자 깊은 지혜를 가진 현인이었지만, 얼마 전 마왕이 서거한 이후로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갈색과 금색의 경계쯤에 있는 긴 머리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바쁘게 휘날리고, 본래는 주름 하나 없이 고운 미간에는 깊은 골짜기가 깊게 패여있다. 정무실 앞에 도달하자 바쁜 발걸음은 그제서야 멈춰섰지만, 디노리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자칫하면 여태까지 어렵게 쌓아온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서, 마음 속 떨림이라는 가장 큰 적을 물리치기 위해 심호흡을 한차례 해본다. 그러나 그 노력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여전히 신경질적인 녹색 눈동자가 옆의 시종을 향한다.
"저하께선 아직 안 오셨느냐?"
"그렇습니다."
대체 어쩌자는건지. 정말 도망이라도 가버린 것인가. 아로닌이 차마 속내를 그대로 내비칠 수 없어 속에서 밀려나오는 깊은 한숨을 억지로 눌러삼킨다. 그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정무실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이미 십여명의 마족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대부분은 불만스럽거나 아니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상석 근처에 앉은 흑발 남자가 아로닌에게 아는체를 한다.
"오셨습니까, 재상."
각진 얼굴에서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그는 호쾌한 인상의 남자로, 날카로운 눈매에서 야성미가 도드라진다. 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근육질의 거구에서는 위압감마저 느껴지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서는 반가움보다는 비웃음이 더 진하게 엿보인다. 아로닌이 천연덕스럽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노이르 공."
"왕자께서는 아직이십니까?"
아로닌은 노이르의 질문에 순간 울컥할 뻔 했지만 대신 부드러운 미소로 회답한다. 그는 노이르가 일부러 자신을 떠보려고 물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곧 오실겁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설마 지각이라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꼴이 무례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미 주변에 포진한 노이르의 측근들이 그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고, 아로닌은 그 안에서 외롭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시원하게 웃어댄 노이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마계의 군주가 되기 위한 시험의 마지막 날. 왕자님이 마지막 과제를 잘 해내셨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정반대의 결과라는 것일테지. 아로닌은 노이르의 시커먼 속내를 꿰뚫어보고는 조금 긴 날숨을 내보낸다. 시간은 이제 10분도 남지 않았다. 왕자는 과연 제 시간에 '그것'과 함께 도착할 것인가. 침착함을 꾸며내고 있는 아로닌의 손바닥에서 슬슬 식은땀이 솟기 시작한다. 1분이 지났다. 시간은 이제 9분밖에 남지 않았다. 또 1분이 지났다. 시간은 이제 8분밖에 남지 않았다. 또 다시 1분이 지나간다. 왕자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유는 이제 7분뿐이다. 노이르가 얄밉게 중얼거린다.
"이제 곧 약속한 시간인데, 왕자께선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시는군."
5분. 주머니에서 꺼낸 회중시계가 알려주는 여유는 이제 5분밖에 없다. 아로닌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제발, 이 빌어먹을 왕자님. 설마 진짜 토낀겁니까? 여태까지 죽어라 개고생한게 아깝지도 않으신지요? 반드시 반려를 찾아서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해놓고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건 대체 어느 종족의 예절이랍니까? 자정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온 차원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서 다리 몽둥이라도 분질러놓을테니 그리 아십시오. 아로닌이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말들을 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동안 어느새 시간은 2분. 이제 자정까지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볼 것도 없군. 다들 가십시다. 차기 마왕에 대한 논의나 해야겠소."
삐딱하게 서 있던 노이르가 뒤돌아서자 십여명의 남녀들이 그를 따라 움직인다. 그나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남아있었지만, 그들 역시 착잡하기 짝이없는 표정으로 허망한 듯 아로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로닌이 그들의 시선 대신 애꿎은 회중시계를 노려본다. 이제 1분. 야속한 초침이 쉬지도 않고 움직이며 자정을 향해 달려간다.
"왕자께서 드십니다!"
그러나 그 때 목이 터져라 울린 시종의 목소리가 어수선한 정무실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
반나절 전, 서울의 어느 카페.
"...어떠세요?"
이국적인 외모가 독특해보이는 검은 머리의 남자는 자신을 디노라고 소개했다. 이름과 생김새를 보고 외국인인가 싶었지만 말하는건 완전히 한국인이다. 신기한 것이 거기까지였다면 참 좋았을텐데, 희우는 지금 두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을 들었지만 이 남자의 말이 전혀, 아주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죄송한데 제가 잘 이해가 안돼서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사장님께선..."
"사장님이 아니고 왕자입니다. 곧 마왕이 될 거고요."
그의 말을 들으며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이해는커녕 오히려 남자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미친놈인가? 아니, 미친건 확실한 것 같고, 세상에 알바사이트에 구인공고까지 올려가며 미친짓을 하는 미친놈이 있다니. 그러나 희우는 얼굴에서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미소와 좋은 인상이란 면접의 알파이자 오메가 아닌가. 수많은 아르바이트 면접과 오디션을 전전하며 이제 기본 옵션으로 장착된 접대용 미소는 아마 맘만 먹는다면 자면서도 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희우가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아무튼, 제가 왕비를 연기했으면 하시는거죠?"
"맞아요. 기한은 1년. 1년 안에 반대 세력을 숙청할테니 그동안 제 왕비인척 연기를 해주시면 됩니다. 놈들은 반려자가 없다는 이유로 제가 왕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있으니, 그들만 제거하고 나면 이 연극 역시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말은 이렇지만 희우씨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겁니다. 그건 제 목숨을 걸고 보증하지요."
미친놈이다, 또라이다! 마왕이라니, 숙청이라니. 아, 돌겠네. 여기가 지금 현실이니, 판타지니?
생긴건 멀쩡한 놈이 무슨 영화 속 얘기같은 헛소리만 뻥뻥 해대니 이젠 어이가 없다 못해 저기 중동으로 가출이라도 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우는 상냥한 표정을 유지한 채 디노라는 남자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본다. 날렵한 턱선과 티끌하나 없는 피부에서는 고생 한 번 해본적 없는 부잣집 도련님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오똑한 코와 적당한 크기의 눈은 일부러 맞춤 제작한 듯 완벽한 비율을 자랑한다. 약간 마른 듯 하지만 쭉쭉 뻗은 팔과 목을 보니 아마 키도 꽤 큰 것 같다. 이만하면 어디 내놔도 빠질만한 외모는 아닌데, 대체 어쩌다가 이 불쌍한 사람은 이른 나이에 미쳐버린걸까? 아, 그것까지 내가 알게 뭐야. 얼른 안한다고 말하고 집에나 가야겠다. 희우는 마음을 굳히고 적절한 거절의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근무는 지금 당장 시작합니다. 2시간 뒤 제가 댁까지 데리러 갈테니 마계로 떠날 준비를 해주세요. 숙식은 모두 제공될테니까 간단히 준비하시면 될겁니다."
"네? 지금 당장이요? 그렇지만..."
"계약금 1억은 지금 바로 입금해드리죠. 일이 잘되면 1년 뒤 두배로 보수를 지급해드릴겁니다."
"이, 1억이요?"
방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희우의 얼굴에서 결국 미소가 사라지고 속내가 드러난다. 남자가 당연한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채희우씨. 1년동안 사이좋은 부부로 잘 지내봐요. 아, 계좌번호랑 집 주소 문자보내는거 잊지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