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오르쉬 지역의 상황은..."
몸은 정무실의 의자 위에 있지만 마음은 저 먼 다른 세계의 평원 위에 있다. 눈은 길게 늘어선 귀족들을 보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들개와 그녀의 모습이다. 귓가에는 아로닌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지만, 실제로 들리는 것은 들개를 쫓던 그녀의 목소리다.
당시 상황은 아주 나빴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힘이 센 것도 아니고 달리기가 빠른 것도 아닌, 아주 평범한 인간. 그래서 굶주린 들개 한마리조차 이길 수 없는 아주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도망치지를 않았다. 배고픔으로 눈이 돌아간 들개에게서 어린아이를 구하겠다고 돌멩이 몇개를 주워든채 달려들던 그녀는 좋게 말하면 용감했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무모했다. 돌팔매질을 당한 들개는 그 지저분하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그녀를 향해 드러냈다.
"어느정도 진정이 된 것으로 보이며..."
화난 짐승을 진정시키기에는 이미 녀석은 너무 많이 자극받았다. 사람조차 제때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운 더운 대륙의 오지. 앙상히 드러난 갈비뼈만큼 날선 녀석의 이빨은 이미 사람이고 무엇이고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들개는 그녀를 향해 뛰어올랐다.
"다만 서쪽 지역에는 아직 공격적인 세력이 남아있어..."
반사적으로 날린 마력탄의 공격이 들개에게 명중하자 짐승은 시커멓게 그을린채 털썩 추락하고 말았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서 쓰러진 들개를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즉 나를 보았다.
"디노?"
"너 미쳤어? 저놈들한테 물리면 그냥 끝이야!"
"알아, 그래서 파드를..."
"그럼 넌? 걔는 구했다쳐도 넌 어쩌려고?"
"아하하... 그, 그러게."
"그러게? 너 진짜..."
그녀는 늘 그랬다. 곤란한 일이 있으면 그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었지. 그 웃음소리가 사라질즈음 그녀가 내 눈치를 보더니 슬쩍 나를 불렀다.
"디노, 하지만..."
그녀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이 죽는걸 보고만 있을수는 없잖아."
"사람이 죽는걸 보고만 있을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채희우, 그 사람도 아주 비슷한 표정으로 내게 그랬다.
"...전하?"
갑자기 불쑥 끼어든 아로닌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잠시 옛 생각에 빠져있던 디노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고, 멍했던 그의 눈동자에 겨우 현실감이 돌아왔다. 아로닌이 걱정 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디노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빌어먹을, 왜 이러지.
디노는 한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듯이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조금 늦게 대답한다.
"괜찮아. 계속 해."
**
북쪽 숲에서 알로시네를 만나고 온지도 벌써 3일이 지났고, 그동안 희우는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한량처럼 지냈다. 참석해야할 공식 일정도 없었고, 디노는 뭐가 그리 바쁜지 거의 얼굴도 못봤다. 아예 못 만난건 아니었지만 그가 잠깐 들러서 나눈 대화라고는 별일 없었냐는 가벼운 안부인사뿐, 그마저도 무슨 의무적으로 묻는 것처럼 던지고 말아서 무어라 잡담 한마디 덧붙일 겨를도 없었다.
처음에는 정말 바쁜가보다 싶었지만 두번째는 뭔가 이상하다 싶었고, 세번째에 달하자 슬슬 짜증이 난다. 뭐야? 갑자기 왜저래? 평소엔 별 실없는 소리도 잘만 하더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러는게 이상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무슨 말실수라도 했었나 싶어 지난 나날들을 곰곰히 복기해봤지만 딱히 짚히는 것이 없다. 하도 고민했더니 이젠 정말 내가 뭘 잘못하긴 했는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대체 뭐지. 가슴 속에 벌레라도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지럽고 찜찜한 기분이 불쾌하다. 그나마 어렴풋이 짐작해보자면 그가 갑자기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마 그 때가 아니었나 싶다. 알로시네를 만나고 온 다음날 아침. 방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분싸해진 그 시점.
"완전 귀속 때문인가...?"
그러고보니 그 때 방을 나서던 디노의 표정은 참으로 이상했다. 화가 났다기에는 너무 차분했고, 삐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침울하고. 별 거 아니겠지 하기에는 이미 나흘째 분위기가 쎄하고, 거기다 여태까지 디노가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도 없다.
아니, 근데 그것도 참 이상하다. 만약 방패가 없어져서 문제라면 대놓고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할 것이지, 자기를 그렇게 생각해주는지 몰랐다면서 돌려까는건 또 뭐야? 그리고 애초에 그것도 내가 디노를 보호하려고 해서 그런거랬잖아? 이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다. 누가 위험했을때 도와주려는게 그렇게 잘못된건가? 싸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그건 당연한거 아닌가? 그러고보니 파티때는 도와줘서 고맙다고까지 해놓고 지금은 왜?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이렇다할 답이 나오지 않고, 마음 속의 간질간질한 기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할수만 있다면 갈비뼈를 열어 손으로 벅벅 긁고 싶은 이 느낌. 아, 뭐야 이게. 희우는 결국 정체모를 이상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털썩 엎어지고 말았다.
"으, 짜증나..."
뭔가 다른 것에라도 집중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희우는서재에서 가져온 책 중 하나를 펼쳐본다-그러고보니 가져온 뒤 며칠동안 건들지도 않았다-. 마계의 역사, 한권으로 끝내봐요. 표지가 두툼한 것이 왠지 엄청나게 재미없을것 같이 생겼지만 의외로 제목이 발랄하다. 그래, 어디보자. 희우는 두꺼운 책장을 넘기고 첫페이지를 폈다.
수만년전, 마를로 드 엔스카르트가 각각 작은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던 마족들을 규합하여 왕국을 만들었고, 이 때 그가 사용한 것이 블랙드래곤의 뼈로 만든 창과 터틀리오의 등껍질로 만든 방패이다... 마족들은 왜 이렇게 무언가의 신체 일부로 뭘 만드는걸 좋아하지? 아무튼 다음. 그가 마계를 제패하고 왕국을 건설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솔네티 페일라와 예카리나 타이로민이었는데, 솔네티는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로서 마를로가 옳은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음, 페일라라는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누구더라...
"페일라의 후손 아로닌..."
낯설지 않은 이름을 찾아 기억을 더듬던 희우가 금새 답을 찾아낸다. 맞다, 아로닌의 성이 페일라였지. 그렇다면 책에 나오는 이 예언자라는 마족이 아로닌의 조상쯤 되는걸까?
"...그럼 아로닌도 예언자야?"
새로운 가설을 접하게 되자 뭔가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걱정이 하나 슬그머니 떠오른다. 만약 아로닌이 진짜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내 정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예언이랑 독심술은 상관이 없는걸까. 생각해보니 독심술은 디노가 하는거잖아? 그럼 딱히 관계 없나? 긴가민가하면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보니 이번엔 예카리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예카리나는 마를로를 도와 마족의 세력을 넓혔고, 그러던 도중 이들 사이에 연정이 싹트게 되어 마를로와 예카리나는 반려의 연을 맺는다. 둘은 반려의 연을 맺은 다음날 크루시엔타 대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마침내 슐레이나들을 몰아내고 마왕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아, 모르는 고유명사가 너무 많다. 하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전장에서 싹튼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거군.
"흠... 로맨틱하네."
"...뭐가요?"
"엄마야!"
갑자기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희우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눈 앞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디노가 서 있다.
"까, 깜짝이야. 언제 왔어요?"
"방금요."
디노가 딱잘라 말하자 머쓱해진 희우가 슬그머니 책을 밀어내며 물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왠일이래. 아까까지만 해도 속으로 잘근잘근 씹었지만 막상 또 마주치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희우는 어색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어렵게 말을 짜낸다.
"어...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요새 바빠보이던데..."
"바쁘죠. 앞으로 며칠간은 성에 없을것 같아요. 그 얘기해주려고 잠깐 들른거에요."
"성에 없다니... 갑자기 왜요?"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요."
희우는 무슨 일인지 정확히 얘기하지 않고 대충 둘러대는 디노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지금껏 한번도 이런 식으로 얼버무린적이 없었는데. 그러나 그는 이미 작별인사를 고하고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요.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로나나 아로닌한테 부탁하고..."
"어디가는데요?"
희우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운 강세가 실려있다. 하지만 디노는 여전히 비슷한 태도로 일관할 뿐이다.
"여러군데라 일일히 설명하긴 어려워요."
어랍쇼, 이거 봐라? 희우는 슬슬 약이 올라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무슨 일로 가는데요?"
"그것까진 굳이 희우씨가 알 필요 없어요."
"알 필요가 없다고요? 왜요?"
희우가 발끈해서 묻자 디노의 눈에 잠시 당황스러운 빛이 스치는듯 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한다.
"이건 내 문제니까요. 희우씨는 신경 안써도 돼요."
"마왕님 문제신데 왜 내가 신경을 안써요? 언제는 나보고 왕비 노릇 해달라면서요."
"그거야..."
디노는 갑작스런 몰아침에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린다. 결국 참다 못한 희우가 폭발하고 말았다.
"갑자기 왜 이래요? 내가 뭐 잘못 했어요?"
"무슨 소리에요? 희우씨가 잘못이라니."
"얼마 전부터 완전 남남처럼 굴고 있잖아요. 궁금하고 걱정되니까 물어보는건데 그것도 말 못해줘요?"
디노는 할말을 잃고 애꿎은 관자놀이 근처를 만지작 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털어놓았다.
"마계 순행 겸 체로니가 말했던 그 소문이 어디서 흘러나온건지 알아보려고요. 아무래도 단순한 뒷담화 수준이 아닌것 같아요."
마족이 인간과 함께 손을 잡고 다른 종족들을 없애려한다던 그 소문. 북쪽 숲에서 그 이야기를 함께 들으면서 잘은 모르지만 심각한 문제일것 같다고 짐작하긴 했는데 역시나 그냥 넘길만한 것은 아닌가보다. 희우의 눈썹 끝이 어느새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럼 위험한거 아니에요? 알로시네들처럼 누군가 또 공격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럴지도 모르죠.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당분간은..."
"나도 같이가요."
중간에 쓱 밀고 들어오는 희우의 목소리에 디노가 말을 잃었다. 그렇지만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것은 단순히 말허리를 잘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디노는 당황스러운지 조금 날카로워진 어조로 묻는다.
"희우씨가요?"
"왜요? 내가 가면 안되는거에요?"
"아니... 안된다기보다는 위험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가야죠. 방패가 나한테 있잖아요."
디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는듯 하다가도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희우씨는 대역으로 온건데 위험한걸 알면서도 데려가는건 아닌것 같아요. 지난번에도 큰일날뻔했고..."
"하지만 그게 내가 할 일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없으면 방패도 없는거니까 더 위험하잖아요."
아직 써본적은 없지만 체로니가 그렇다고 했으니 우선 배짱을 부려본다. 디노는 희우의 완강한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답답한 듯 다시 열었다.
"괜히 억지쓰지 말아요. 희우씨 생각해서 그러는거에요."
"나도 지금 그 쪽 생각해서 그러는거에요."
"대체 왜 이러는거에요? 나 말꼬리 잡을 시간 없어요."
"왜 이러냐고요? 좋아요, 말 나온김에 물어보죠. 대체 뭣땜에 그렇게 꿍해 있는거에요?"
"내가 꿍해있다고요?"
"알로시네를 만나고 온 뒤로부터 갑자기 혼자 삐져가지고는 제대로 말도 안하고 있잖아요. 뭐가 문제에요? 방패가 되돌릴수가 없어서 문제인거에요? 아니면 내가 뭐 실수라도 했어요?"
디노는 잔뜩 화가나서 쏘아붙이는 희우를 쳐다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뭔가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채 대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거친 손길이 그가 얼마나 답답해하는지를 대신 보여주고 있었다. 디노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겨우 할말을 찾아내 쏘아붙인다.
"우린 남남 맞잖아요."
"뭐라고요?"
"아까 그랬죠? 내가 완전 남남처럼 굴고 있다고. 그런데 맞잖아요. 뭐가 잘못됐죠?"
희우는 황당한 눈으로 디노를 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지만 이건 분명 뭔가 이상하다. 희우가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진짜 왜 이래요?"
"희우씨는 그냥 왕비인척만 해주면 돼요. 당신은 진짜 내 반려도 아니고, 운명의 상대도 아니니까."
정이 뚝 떨어질 만큼 냉정한 말에 희우가 결국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디노는 그대로 왕비의 방을 나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