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눈앞에 익숙한 정원이 보였다.
내 궁전, 에르미타 궁과 그곳에 있는 정원이었다.
오랜만에 본 정원은 여전했고 언제나처럼 하나의 테이블이 자리해 있었고 테이블의 한자리에는 이미 누군가 자리해있었다.
"어서 와 앉아."
나였다.
아니 내 모습을 한 누군가였다.
그 누군가의 모습에 놀라 내 손과 몸을 확인하듯 보며 좀 전까지 지독한 악몽을 뒤로하고 꿈에서 깬 줄 알았던 난 아직 꿈에서 덜 깬 것이지 혼란에 빠지게 됐다.
"똑똑한듯싶으면서도 어리바리하네. 계약하러 왔잖아 나랑."
그 말에 악몽인 줄 알았던, 실은 현실이었던 곳에서 겪은 일련의 일들이 떠올랐다.
"너.. 가?"
"맞아. 그 존재지. 그러니 자리에 앉지? 올려다보기 거북하네 익숙지 않아서."
계속되는 권유 아닌 권유의 말에 자리에 앉았다.
"차줄까?"
"아니..."
현실도 아닌 공간에서의 차가 의미가 있겠냐 싶어 거절을 표했다.
"그래? 흠.. 이 벌꿀차라는 거 맛있던데.."
"난 차나 마시자고 온 게 아니야."
"그래. 계약.. 넌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건 말했어 밖에 있는 놈과."
"그거 말고 그건 그 녀석과의 계약이잖아. 뭐 원하는 거 있어? 말만 해."
원하는 것.
표현을 한 적은 별로 없지만 바라던 건 많이 있었다.
하지만 힘들다.
되지 않을 일이다.
"... 없어."
"거짓말."
눈앞의 나를 모방한 존재의 눈이 붉게 빛나며 눈동자가 여러 눈동자들로 나뉘기 시작했다.
각각의 눈동자들은 나누어지기 시작하더니 끝내 7쌍의 크고 작은 눈동자로 나뉘었고 각각의 눈동자가 붉은빛을 뽐내듯 강하게 빛냈다.
"그 반대로 많은 걸 원하지.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아들, 형의 관심, 이 세리아와의 사랑...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지. 안 그래?"
".... 맞아. 근데 그 모두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가능하다면?"
"....."
"참으로 흥미로워 너란 존재는. 너 이외에도 많은 녀석들을 봤지. 대부분 권력, 재물, 명예부터 단순히 살고자 하는 욕망까지 다양한 걸 원했지만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 그런데 너는 다르더군 소박한듯싶지만 이루어지기 어렵고 또 그 과정에서 어떠한 것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더군."
"그래서?"
"그래서 선택했다. 너를."
"넌... 누구야...?"
"난 아지-슈마 후(azhi-sumahhu). 앙그라 마이누(Angra Mainnu)의 지배자이자 별을 삼키는 자.
너희 필멸자들에게 탐의 화신이라 불리는 존재."
"아지-슈마 후....."
"네가 꿈꿔왔던 것 진정으로 원해?"
"원한다면... 넌 내게 무엇을 원하지? 이 몸뚱어리?"
"아니. 지혜"
"지혜?"
"그래. 내가 가진 건 힘뿐이지. 그 어떠한 벽이라도 뚫고 부술 수 있는 힘! 하지만 아무리 강하고 거대한 힘이라도 그저 힘뿐이라면 휩쓸리기 마련, 네게 힘을 주지 아니 내 모든 걸 주지, 넌 내가 된다."
"네가 된다고?"
눈앞의 나 아니 아지-슈마 후는 의자에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이곳에선 내가 더 이상 바라는 건 없다. 그리고 저 밖은 힘만으로는 안되는 세상이지.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게 너다."
"단지... 그뿐이야? 그것 때문에 모든 걸 준다고?"
"이건 대가이기도 하다. 내가 되면서 넌 내 힘과 의지에 휩쓸려 네가 아니게 될 수도 있지. 어때? 나와의 계약."
"...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내겐 선택권이 없어. 하자 그 계약."
말을 끝낸 후 눈앞에 있던 나의 형상을 한 아지-슈마 후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건 아지-슈마 후가 아니라 나란 형상이었다.
"..... 잘 부탁한다........ 그래“
44.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오로지 하나의 달만 떠있어 땅 위를 속속들이 비추는 것이 달의 여신 루나께서 사냥감을 찾는듯했다.
그리고 그런 달빛 아래로는 폐허가 자리해 있었다.
이곳 폐허는 이전에 거대한 크기의 도시였다는 것을 보여주듯 곳곳에 무너지고 부서지다만 건물들이 수두룩했고 버려진지 꽤 된 곳인 듯 잡초가 무성하고 마실 나온 풀벌레 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또한 폐허의 중심에는 신의 심판을 받은 듯 움푹 파인 큰 구덩이가 존재해 있었다.
이러한 모습으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유지해오던 이곳에 귀를 울리는 이 명 소리와 함께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쿠쿠쿵!
굉음과 함께 시작된 땅의 흔들림은 이미 부서질 때로 부서진 잔해들을 한 번 더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한동안 굉음과 함께 흔들림이 지속되며 거대한 구덩이에 달빛의 빛을 게걸스럽게 먹듯 검은 구멍이 자리해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우웅~~우웅~~~
이내 이명과 함께 크기를 키우던 검은 구멍은 성장을 멈추었고 구멍을 통해 두 명의 인영이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저하... 저희 돌아온 거 맞죠?"
"주변 모습이 낯설긴 하지만 맞을 거야."
타티아나는 마경에서 다시 우리들이 살던 세계로 돌아온 것이 감격스러운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지?"
"그러게요..."
"일단 저 위로 올라가 보자."
그렇게 타티아나와 함께 구덩이를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거라곤 무너진 건물 잔해들과 갈라지고 파여진 도로의 모습들뿐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발길 또한 틈 해진지 오래된 듯 잡초와 수풀이 무성했다.
이렇듯 본 적이 없는 풍경이었지만 이곳의 모습들이 눈에 익었다.
"여기..... 학원인 것 같아."
"네? 설마....."
"그래 알키비아데스 학원."
"그럼... 그때의 일 때문에 이렇게 됐을까요?"
"아마도..."
알키비아데스 학원뿐만 아니라 알키비아데스 시 전체가 폐허 도시가 되어있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무너지고 부서져있었으며 잡초 또한 무성한 것이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지 오래인듯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아무도 없죠? 다들 무사한 걸까요?"
"이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어. 인명 피해도 있었을 테고 왕국 쪽에서든 제국 쪽에서든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폐쇄 조치를 취했겠지."
"그럼... 저흰 어떻게 하죠?"
"일단 시를 벗어나 제국 쪽으로 가자."
"네. 저하."
그나마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도시 외곽 부분의 흔적들로 위치와 방향을 가늠해 제국 측 요새도시가 있는 북부로 걸음을 옮겼다.
45.
나와 타티아나는 도시 외곽을 벗어난 이후로도 북쪽을 향해 계속 걸었다.
그렇게 걷는 와중에 작은 진동과 함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일단의 기마병들이 나타나 어느새 주위를 둘러싼 채 포위망을 펼치고 기마 상태에서 총을 겨눴다.
"엎드려!"
나와 타티아나에게 겨눠진 총구를 보며 손을 올리고 말을 건넸다.
"나는 바실레우스 제국의 오황자, 사샤 B 바실 레우스다. 이곳에서 벌어진 사고에서 살아남아 제국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을 터라."
"입 닥치고 엎드려!"
"군복을 보아하니 라바일 왕국 군인 듯한데. 후회할 짓 하지 말고 길을 터라. 라바일 왕국 군에 의해 제국의 황자가 사살당한다면 단순히 외교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전쟁이다. 병사는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위엄 있는 말투와 논리적인 설명에 흔들리는지 대부분의 병사들이 상관인듯한 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정신 차리지 못해?!! 현 제국에는 황자가 하나뿐이다. 되지도 않는 거짓말에 흔들리지 마!"
"뭐?!!?"
제국의 황자가 하나뿐이라는 말에 잠시 놀라 반문했다.
"다음은 없다! 엎드리지 않으면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바로 사살할 테니 엎드려!"
"저하....!"
아무리 봐도 제국의 황자가 하나뿐이라 외친 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황자가 하나... 제국에 내전이 벌어졌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나를 제외한 네 명의 황자가 모두? 아니... 멀쩡하신 아바마마를 두고 내전이라니 그 누구도 벌리지 않을 일이야... 하지만 황자가 하나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이젠 그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이 안에 가히 신에 필적하는 힘을 담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다못해 이 상황에 불안을 느끼며 겁을 먹은 타티아나에게조차 지금의 상황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두
포위를 당한 채 대치 상황이 계속되어가는 도중 병사들 너머로 잇따른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새로 합류한 일단의 무리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포위를 한 병사들의 상관인듯한 자가 목소리의 주인에게 달려가 보고를 했다.
"금역에서 나온 자들인듯한데 그중 한 명이 제국의 황자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뭐? 제국의 황자가 뜬금없이 먼 이곳에는 왜?"
"아직 그건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오황자라 주장하고 있어 우선 체포를 하...."
"뭐??!?"
여성은 병사의 보고에 놀란 목소리로 말을 끊고 반문했다.
"다시 한번 말해봐 뭐라고?"
"그것이 우선 체포를 한 뒤..."
"아니 그전에."
"오황자라 주장하고 있어....."
여성은 그 말을 듣고 말에서 내려 포위망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여성은 기사 출신인 듯 상체에 갑옷을 착용한 상태였고 짧은 단발머리에 여성임에도 많은 전투에 참여한 듯 목과 뺨에도 상흔이 존재했다.
".....그대가..오황자라 주장했다고?"
"그렇다."
"..... 제국에는 한 명의 황자밖에 없다."
"그렇다더군 혹시 제국에 내전이 벌어졌었나?"
"아니..."
"후... 나는 그대들과 실랑이할 여유가 없다. 다치기 싫으면 길을 열도록."
"우리도 우리의 입장이 있다. 금역에서 나온 자라면 조사를 안 할 수가 없다. 이건 제국과도 합의가 된 사안이야. 대신 강압적으로 조사를 안 하도록 하지. 궁금한 점도 있을 테니 우리가 그 물음에 답도 해주고 또한 제국에도 사람을 보내 알려주도록 하겠다. 어떤가?"
확실히 궁금한 점이 많기는 했다.
또한 현 상황에 이들을 무시하고 강행돌파를 했을 시 후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가늠할 수가 없었고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은 상황에서 제국으로 가봤자 똑같은 상황에 처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더구나 저들을 따른다 해도 나와 타티아나에겐 신변의 안전에 대한 것은 문제가 없으니 손해 볼 데 없어 보였다.
잠시 이런저런 계산들을 하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타티아나는 불안한지 내 팔을 잡으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느 정도 계산을 마친 뒤 타티아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 뒤 물음에 답하였다.
"..... 조사에 응하도록 하지. 한데 귀관은 누군가?"
"... 발렌시아 백작이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