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많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본 형제인 형, 오랜만에 본 형은 전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반가웠다.
한동안 앉은 채 서류들을 보던 형이 말을 건넨다.
"그저 먹고 마시며 지내라 그러다 가끔 연회도 열며 즐겨라 원래 너와 같은 황제 폐하의 자제들은 그렇게 지내는 것이다"
말을 건네는 내내 알 수 없는 서류 쪽에 있던 시선이 나를 향한 채 말을 잇는다.
"그러다 내가 보위에 오르면 적당한 영지를 하사하여 남은 인생 걱정 없이 지내도록 해주겠다 그나마 이 또한 너와 내가 같은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나의 호의이니"
형제라 해서 다정함을 바래진 않았다 남들의 부러움과 시기 속의 이 황궁은 아마 제국 내에서 가장 삭막할 테니.
"..."
형은 나의 침묵을 무시한 채 말을 잇는다.
"내게 대적하지 말아라 또한 의심받을 짓도 하지 말아라 공부? 안 해도 좋다. 그저 네게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사고 치지 말거라 어머니께서 슬퍼하실 테니 알았느냐"
아까와는 달리 대답을 바라는 말투에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는 나는 형이 바라는 말을 내뱉는다.
"네..."
"그래 그거면 되었다 이만 나가보거라."
역시나 하는 형의 축객령에 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 문을 나섰고 한동안 형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2.
그 뒤 한동안 아니 이젠 키도 한 뼘 이상 더 자라고 목소리도 굵어졌으니 많은 시간 동안 형의 말마따나 놀고 마시며 지냈다.
물론 아직 나이가 어려 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술 또한 마시지는 못했다.
그저 형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자 취미로 독서를 하였다.
아니 반항이랄 것도 없었다.
이 넓은 황궁에서 갈 곳은 몇 없고 만날 수 있는 사람 또한 한 손에 꼽히니.
"황자 님~~~"
익숙한 목소리.
"... 황자 님?..... 사샤 황자 님!"
누군가 내 몸을 흔들어 깨운다. 그제서야 눈을 슬그머니 뜨며 눈앞에 다급한 모습의 소녀를 보며 말을 건넨다.
"타티아나... 지금 나 책 읽는 거 안 보여??"
그 말에 눈앞의 소녀, 타티아나가 한심하다는 말투로 쏘아붙인다.
"대체 아까까지의 어느 모습이 독서로 볼 수 있죠?"
"왜? 눈앞의 책을 두고 있었잖아? 못 믿겠어? 줄거리라도 읊어볼까?"
"어휴... 제가 또 기억력이 나빠 황자 님의 독서 습관을 까먹었었네요."
타티 아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간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황후 마마님이 찾으세요."
"어머님이?"
"네 그것도 황자 저하의 에르미타 궁전으로 직접 오셨어요"
그 말에 나는 주섬주섬 주변의 책들을 챙기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 타티아나"
"네?"
그러며 나는 두꺼운 책 세 권을 타타아나에게 줬다.
"나는 빨리 가봐야 하니깐 이 책들은 잘 부탁해"
"윽..."
책들을 넘겨받은 타티아나가 휘청거린다.
"그럼 난 가볼게 수고~~"
그러고는 궁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리는 소음은 가볍게 무시한 채.
"황자 님~~~~! 이렇게 레이디에게 짐을 넘기는 건 신사답지 못한데요~~~~!"
3.
내 집, 내 궁전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하고 반가운 모습의 민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마마마"
내 말에 어머니인 엘리자베타 황후가 손을 내밀며 대답해주신다.
"황자~"
그 말에 나 또한 내밀어진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이리 황자께서 어미를 찾아오지 않는데 안녕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이 황자가 못나 어마마마께 근심만 준듯합니다."
그 말에 어머니가 웃으시며 답하신다.
"아닙니다. 황자 어미가 그저 농을 한 겁니다."
"아닙니다. 어마마마.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호호호. 이 어미는 그 말뿐이라도 좋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과 함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으셨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황자."
"그저 놀ㄱ.. 아니 독서나 하며 지냈습니다..."
순간 말실수에 당황하며 얼버무리듯 대답한다.
그 모습을 보시고 어머니는 웃으시며 또 농을 던지듯이 말을 하신다.
"황자께서는 이 어미께 오실 시간만 없으신 거 같습니다."
그 말에 말끝을 흐리며 대답한다.
"죄.. 송합니다...."
농담을 하듯 얘기하시지만 못내 그 점이 서운하신 것 같았다.
그저 변명하듯 말하자면 이궁에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황자라 하더라도 황위 계승권이 있는 황자의 행보는 하나하나 관심을 받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며 가십거리 소재로 쓰이고 또 이러한 소재들은 정치판에 올라와 쓰이게 돼 조심했던 것뿐이다.
"호호호 황자가 이리 거짓 없이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니 이 어미가 농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호호호"
"어마마마....."
어머니의 농담과 함께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난다는 말에 잠시 심각하게 자아성찰에 빠져본다.
아직 어리다 할 수 있고 황권이나 정치에 뜻도 없지만 어디 이 궁과 자신의 신분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휘둘려지고 음모에 빠질 수도 있는데 이러한 점은 큰 단점이 될지언정 장점은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의 이러한 점으로 인해 어머니가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나요 황자?"
"아! 아닙니다 어마마마 그저 어마마마가 소자에게 따로 용건이 있어서 오신건 아니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순간 어머니를 앞에두고 생각에 빠져있다가 얼버무리듯 말을했다.
"호호. 맞습니다. 황자. 내 황자에게 용건이 있어 왔는데 반가움에 그만 실없는 소리만 늘어놨군요"
그 말과 함께 어머니는 둘둘말려 금색인주로 봉인된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입학서 예요"
"입학서요?"
"예 입학서 맞습니다"
그 말에 놀라 종이에 찍힌 봉인 문양을 보았다.
"알키비아데스 학원....."
알키비아데스... 바실레우스 제국과 라바일 왕국의 국경에 위치하며 폭이 넓은 편은 아니지만 수심이 깊은 시노프 강이 관통하는 지역, 약 5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나라의 최전위 요새도시가 강을 사이로 북쪽과 남쪽에 새워져 있었고 전쟁이 본격적으로 확대되지 않았을 때에도 국지전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곳이었다.
그랬던 분쟁지역에 약 50년 전 당시 대주교의 신분으로 양쪽 요새를 오가며 봉사활동을 했던 현 루엘 성국의 성왕의 중재와 전 전대 바실레우스 제국황제 그리고 전대 라바일 왕국 국왕의 결단으로 인해 성국 관할의 중립도시로 바뀌었고 전대 제국의 황제가 그유지를 이어 도시 내에 국적과 상관없이 입학할 수 있는 학원을 새운 것이 현 알키비아데스 학원의 유래였다.
보통의 황자와 황녀 그리고 대다수의 제국 귀족의 자제들은 제국 수도에 있는 황립 크세노폰 학원을 졸업하는 것 과는 달리 나의 형인 미하일 일황자 또한 이곳 알키비아데스 학원을 졸업하였고 일황자가 재학하였을 당시 라바일 왕국의 왕태자도 재학 중에 있어 제국 대부분의 귀족들은 알키비아데스 학원을 입학한 일황자의 행보는 다분히 외교적,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추측하지만 일황자의 속내는 본인만 알고 그 뒤 재학중 특별한 일이 없어 잠시나마 가쉽거리 소재로만 쓰였었다.
"어마마마 이러실 필요까지 없습니다. 저는 딱히 공부에 뜻이 없고 이곳을 왕래하는 선생님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수학(修學)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분히 교육 때문에 그런게 아닙니다 황자. 또한 일황자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일황자와 얘기가 끝난 내용입니다."
"형님..아니 일황자 저하와 얘기가 끝났다고요?"
순간 형님에 대한 호칭을 바꾸는 나를 보며 잠시나마 서글픈 눈빛을 보냈던 어머니는 그 눈빛을 거두며 말을 이으셨다.
"그래요 황자. 더구나 황자의 나이가 이제 열여섯입니다. 그 나이 동안 이 궁안에서만 지내며 만나본 또래라곤 시녀인 타티아나뿐이지 않습니까? 이 어미는 이리 생활하는 황자를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어마마마......"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뭉클해져 갔다.
"또한 황자....일황자..형을 너무 매정한 사람으로만 보지마세요 그리고 그런 형의 눈치를 보며 지레짐작해서 숨지도 피하지도 말고 차라리 당당히 행동하고 잘못하면 꾸지람을 받으세요."
"....."
가슴이 답답했다.
할 말은 있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진심이 전해져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져서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다.
7살이 되던 해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형에게 조언 아닌 조언, 경고 아닌 경고의 말을 들은 그날은 내 인생이라는 아직도 쓰이고 있는 미완의 책에서 책갈피가 꽂혀진 페이지의 한 부분처럼 항상 읽혀 왔다.
생각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의 시작은 그 페이지였다.
물론 남들이 사춘기라 부르는 시절 무렵 그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려, 그날의 페이지를 찢어보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의 나에 대한 불확신 때문에 문신처럼 각인된 그날의 형과 책상, 의자, 잉크 냄새는 지울 수가 없었다.
"황자....."
어머니가 가만히 있는 내 손을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이어진 어머니의 말에 참았던 눈물이 튀어나왔다.
7살이 되던 해, 트라우마가 돼버린 그날, 형에 대한 서러움에, 억울함에 잠도 설친 채 침대 위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날의 눈물은 자신이 평생 흘릴 눈물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고 슬픔은 미소 뒤로 감추었다.
하지만 이토록 다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그때의 생각은 생각이 아닌 나에 대한 다짐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