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재판 일이 잘 마무리되고 며칠 뒤, 늦은 저녁에 형님의 부름을 받아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공동 묘소로 갔다.
황궁 내의 공동 묘소에 도착한 뒤 어머니가 잠들어 계신 곳으로 가니 형님께서 이미 도착해 혼자 계시고 있었다.
"폐하. 어찌 이런 곳에 근위 기사도 없이 혼자 계십니까?"
내 말에 어머니의 묘비를 보고 있던 형님이 뒤돌아섰다.
"왔구나. 사샤. 걱정할 거 없다. 황궁 안이지 않느냐. 더구나 이곳 주위에 알게 모르게 근위 기사들이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형님의 말처럼 공동 묘소 주위로 근위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감지했지만 황제라는 자리는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바로 곁에는 근위 기사단장이 있거나 하다못해 부단장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적인 만남에선 폐하라는 경칭을 거두라 했는데도 여전하구나."
"어찌 신하 된 자로서 황제 폐하께 사사로이 경칭을
거두겠습니까?"
"신하... 신하라..."
형님께선 그렇게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시며 다시 뒤돌아서며 어머니의 묘비로 시선을 돌렸다.
"디트리히 후작과 네 성과 영지에 관해서 논의했다. 그리고 논의 결과로 네게 티베리우스라는 성을 하사하고 헤르 키니 아 숲과 그 일대에 있는 직할령을 하사하기로 결정했다."
"네? 허나 그렇게 되면 바트렌 시가 포함됩니다."
바트렌 시는 바실레우스 제국이 왕국이었던 시절 수도로 제국이 북부를 통일한 뒤 수도를 이전한 뒤에도 상징적인 의미가 큰 곳이라 대대로 황제의 직할령으로 남아있던 곳이었다.
또한 왕국이었던 시절의 수도였다고는 하나 한나라의 수도였단 만큼 그 크기가 그 어떤 대도시보다 꿇리지 않았으며 그 크기만큼 인구도 많은 도시였다.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있겠느냐."
"하나 너무 과합니다."
"직할령에 대한 사안은 내 권한이다. 허니 네가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다. 또한 헤르키니아 숲의 몬스터에 대비해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13,15군단에 대한 지휘권도 네가 가지게 될 것이다."
직할령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황제의 권한이라 해도 상징적인 의미가 큰 바트렌 시가 황족에게 넘겨진다면 대신들이 반발할 건 불을 보듯 뻔했다.
더구나 일부이긴 하지만 중앙군에 대한 지휘권까지 가진다면 단순히 반발로만 끝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폐하. 중앙군의 지휘권을 어찌 제가 가질 수 있겠습니까."
"몬스터들이 들끓는 헤르키니아 숲을 방비하기 위해선 두 군단 이상의 중앙군이 주둔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네게 지휘권을 주지 않아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괜히 쓸데없는 알력싸움을 만들 수 있다."
물론 형님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지만 그렇다면 다른 영지를 받으면 될일 굳이 논란이 될 영지를 수여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폐하께서 제게 바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형님께서는 살짝 고개만을 돌려 대답했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이상 하리 마치 촉이 좋았지. 그럼 내가 너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 같으냐?"
"이유는 짐작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혹은 모두의 시선을 제게 돌리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역시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하더라도 혹시나 변하셨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나 싶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 그건 네가 알 필요가 없다."
"..... 그렇다면 혹시나 있을 일에 대비해 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힘? 무슨 힘을 바라느냐."
"사람. 사람을 원합니다."
형님은 잠시 고민하시더니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57.
다음날 아침, 평상시와 같이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뒤 정원에서 타티아나가 타준 차를 마시며 독서를 하고 있었다.
"전하,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타티아나와 함께 디트리히 후작을 포함한 몇몇 일행들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전하. 말씀하셨던 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후작. 그리고 오랜만이군요. 트로츠키 경."
"충! 제국과 황제 폐하께 영광을!"
"충! 제국과 황제 폐하께 영광을!"
내인사에 맞춰 트로츠키 경이 주먹을 쥔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경례를 하였고 이어서 뒤에 있는 일행들도 트로츠키 경과같이 경례를 하며 구호를 외쳤다.
"카일, 카론, 레프, 펠릭스 경들도 오랜만입니다."
"네. 전하. 이렇게 저희들을 기억해주시니 영광이옵니다."
다들 알키비아데스 학원으로 입학하기 위해 알키비아데스 시까지 호위를 맡아주웠던 근위병들로서 비록 함께 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큰 인상을 주웠던 이들이었다.
"전하. 이들 외에 부탁하셨던 에르히라는 인물은 아직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후작께서 죄송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네. 또한 황제 폐하께서 저도 전하의 곁에 남아 전하를 보필하라 하셨습니다."
"네? 허나 그러실 필요까지는..."
"그게 더 폐하께 도움이 되신다고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디트리히 후작은 형님을 황자 시절부터 보필했던 측근이다.
그런 후작 또한 내 곁에 있다면 확실히 형님이 원하시는 만큼의 시선을 끌 수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 늙은이가 전하를 잘 보필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습니다. 허허허."
"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작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벌써부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손님들을 모셔놓고 서있게만 했군요. 다들 앉으세요."
내 말에 그동안 서있던 일행들이 다들 타티아나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착석했다.
"대공 전하께 하사될 성과 영지에 대한 공표는 이틀 뒤에 이루어질 겁니다. 또한 대공 전하가 받으실 영지로 출발하실 날짜 또한 이틀 뒤 고요."
"그렇군요. 한데 공표가 이루어질 때 제가 없어도 될까요?"
"송구스럽지만 오히려 없으셔야 진행이 원활히 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또한 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신 트로츠키 경은 이미 13군단의 군단장의 자리에 임명이 되었습니다."
"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트로츠키 경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고 또 자신이 군단장의 자리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몰랐는지 놀란 반응을 하며 반문했다.
"트로츠키 경의 반응을 보아하니 경은 모르고 있었던 듯하군요."
"예. 혹시나 이야기가 퍼질까 싶어 숨기고 있었습니다."
"저... 후작 각하. 군단장이라뇨? 어찌 제가 그런 자리에..."
"말 그대로일세 자네는 현재 헤르 키니 아 숲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13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네. 이미 전 13군단장에게도 연락이 갔고 자네가 가면 바로 인수인계가 이루어질걸세."
"좋군요. 확실히 군단장에 대한 인사이동이 먼저 이루어지면 잡음이 덜 하겠군요."
트로츠키 경은 후작의 설명과 내 반응에도 자신에게 처한 상황이 놀랍고 이해가 안 가는 듯 입만 뻐끔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5군단장의 자리가 문제군요."
"그건 천천히 하도록 하죠. 한 번에 두 군단장의 자리가 바뀌게 되면 의심하는 이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 전하."
"그래도 역시나 사람이 부족하군요. 혹시 후작께서 추천해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혹 원하시는 사람이 있으신지요."
"저는 그저 능력이 있는 자면 좋겠습니다."
"능력 있는 자라....."
후작은 내 말을 곱씹으며 타티아나가 타온 차를 들이켰다.
"사실 제가 추천할만한 인물이라 해봤자 한 명뿐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 전하께 말을 해야 할지....."
"능력이 있는 자입니까?"
"능력만으로 본다면 견줄 자가 몇 없는 자이긴 합니다."
"한데...?"
"한데 5년 전, 현재의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는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크라우 대공을 지지했던 인물이라 주요 요직에서 좌천당하고 현재는 황궁 내의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크라우 대공이라 하면 혹시 삼황자 저하셨던...?"
"예.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까지는 삼황자 저하셨죠."
"폐하가 아니라 반역자를 지지한 인물을 제게 추천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후작께서 어떠한 이유로 그랬을지는 몰라도 위험한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내일 이후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형님의 반대편에 있었던 인물을 휘하에 두게 된다면 자칫 형님과 대립각이 벌어지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될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신이 생각이 짧아 그러했던 것이니 의미를 두지 말아주시옵소서."
하지만 그 인물에게 강한 흥미가 생겼다.
"그 인물, 누구입니까?"
"아벨 드 니콜로, 제 하나뿐인 제자입니다."
"...??!? 아벨 드 니콜로..."
들어본 이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혹시 그 사람 책도 썼나요?"
"네? 아뇨.. 아니... 소신은 모르겠습니다."
후작의 대답에 후작 일행이 오기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후작에게 내밀어 주었다.
후작은 영문은 모르겠지만 내밀어진 책을 받은 뒤 책의 제목과 저자를 보고 놀란 표정을 하며 책을 펼쳐 빠르게 읽어보곤 내게 시선을 돌렸다.
"어떤가요? 후작이 말한 인물과 이 책의 저자 같은 인물일 것 같나요?"
"예..."
후작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이 책을 읽고 저자에게 흥미를 느꼈는데 잘 됐군요."
후작에게 다시 건네받은 책의 표지에는 어떻게 보면 특별해 보이지 않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제왕학
각국의 군주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 서열을 가진 왕족들 그리고 귀족들에게 기본 시 되는 학문이자 동명으로 된 책으로 저자는 달라도 같은 이름으로 적힌 책의 종류만 하더라도 수십 종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왕학이 표현은 달라도 공통적으로 군주의 도덕과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아벨 드 니콜로 저자의 제왕학에선 군주는 도덕과 종교에 구애받지 않는 걸 강조하며 통치에 있어서 효율과 현실적인 감각을 요구하고 있었다.
"책에서부터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확실히 능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전하. 이 아이는 전하의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전하께 위협을 끼칠 수 있는 아이입니다."
"네. 아마 몇몇은 저를 크라우 대공처럼 반역자로 몰려고 할 수도 있죠."
"한데 어째서...?"
"하지만 곁에 둠으로써 단순히 시선만 끄는 것뿐만 아니라 저들의 생각에 혼선을 줄 수도 있죠."
"......"
"후작, 아벨 드 니콜로 이분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세요."
"... 예."
후작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고 그때까지도 대화의 내용을 이해 못 한 트로츠키 경 일행은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