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퀴 더!”
베르니스와 미아는 체술 훈련 중이었다. 베르니스와 미아를 포함한 학생들은 교정에 있는 정원을 뛰고 있었다.
테베신학교가 명문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고대어,마법,음악,종교,체술,신탁해석 을 두루 익히게 한다는 점이었다. 베르니스는 3년간 재학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고 거기다가 예지능력까지 있었다. 그러니 루시아 신전에서 목 빠지게 그녀의 졸업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그런 소문은 베르니스의 삶을 더욱 더 윤택하게 만들었다.
“일동 잠시 휴식! 20분 휴식 후 다시 모인다!”
체술 훈련 담당교수인 에두아르도 교수의 외침이 들리자 그들은 뛰는 것을 멈췄다. 다들 헉헉 대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르니스와 미아만이 유일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교내 정원에 있는 작은 분수에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베르니스는 자신의 물병을 가져와서 물을 받았다. 그 때 강아지 마냥 리브로가 둘에게 달려왔다.
“누나들, 소식 들었어?”
“뭔 소식?”
미아가 갸우뚱한 표정으로 리브로를 바라보았다. 베르니스는 어제 발견했었던 ‘고대예언서에 관한 회고록’이라는 책을 찾아볼 생각을 하며 풀밭에 주저앉았다. 물을 마시며 리브로를 바라보았다.
“제국 내 온 사방에 수배전단지가 붙었다니까? 어제 어떤 미친놈이 시몬 공작가를 털었대!”
베르니스가 ‘푸학’ 소리를 내며 마시던 물을 뿜어냈다. 미아가 그런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리브로도 더러운 벌레를 보는 마냥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그게 무슨 소리야? 수배전단지라니?”
베르니스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서야 현실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제 정신이 나간 거 같긴 했다. 영원의 서 정보 좀 얻자고 제국 최고의 검술가 집안을 몰래 침입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다. 아니, 그렇다고 수배전단지까지 돌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내가 진짜 미쳐도 미치긴 했구나...... 아니 그래도 난 훔친 거 없다고!’
리브로가 눈을 빛내며 수배전단지를 보여주었다. 양피지엔 흑백으로 몽타주가 투박하게 그려져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의 얼굴이었다. 이 정도로는 자신을 알아볼 순 없었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일단 진정시켰다.
“확실히 말세는 말세야. 요즘에 아스루아 제도랑 인접한 브리사 산맥에서 마수랑 요정의 출몰이 잦아졌다고도 하고 이런 도둑놈들이 싸돌아다니질 않나”
리브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자 베르니스는 순간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확실히 요즘에 이상 현상이 늘긴 는거 같아. 이렇게 수배전단지가 떠도는 거 보면”
미아까지 동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가 싶었다. 훔친 건 없지만 온 나라가 존경해 마지않는 시몬 공작가를 침입했다는 점 때문에 말이다.
“그나저나 미아누나 ‘신탁의 밤’준비는 잘되고 있는 거야? 듣기로는 요번에 되게 성대하게 한다던데?”
“응 맞아. 레오넬 2세 황제가 즉위한지 얼마 안 돼서 겸사겸사.”
프레하 제국에서 신학교 졸업 후 진로는 거의 정해져있었는데 가장 크게는 2개였다. 첫 번째가 루시아 신전의 수습사제가 되는 것. 두 번째는 명망 있는 귀족가문을 보필하는 사제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신성력과 인성, 실력을 두루 갖춘 인재일수록 첫 번째 진로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봐도 취업전선에 내몰린 사제들을 위한 면접 같단 말이지’
베르니스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만 한 것이 신탁의 밤에서 귀족가문과 사제들이 면 대 면으로 접촉하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신학생들 대부분이 밖으로 나갈 일은 드물었기에 귀족들은 신탁의 밤을 통해 실력 있는 사제들을 판단했다. 그래서 루시아 신전의 부름을 받지 못한 사제들은 신탁의 밤에 목을 맸다.
“근데 신탁의 밤에 뭐하는 거야? 듣기만 듣고 한 번도 본적이 없어”
리브로의 물음에 베르니스가 여상한 태도로 답했다.
“말 그대로 귀족가문의 신탁을 내리는 거지 뭐. 신탁이랑 축복. 특이한 거라면 신에게 바치는 음악회를 하고 나서 신탁의 밤을 진행하는 거.”
“오오 신기하다”
베르니스는 눈을 빛내며 순수한 리브로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신기할 것도 많다. 하긴 나도 요절만 아니면 모든 일들이 다 즐겁긴 하겠다.’
그때 갑자기 휴식을 취하는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교정을 들어서는 한 남자의 모습에 학생들의 모든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수군거림은 확실히 그 남자를 향한 것이었다.
“조슈아 시몬 공작이야!”
“장난 아니다. 진짜 빚어낸 것 같다. 나만 후광 보여?”
“사교계에서 가만히 못 놔둘 상이다 진짜”
남자는 흑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교정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 뒤로 크리스토퍼 교수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순간 베르니스와 시몬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역시나 어제의 그 후광남 이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부티가 좔좔 흐르긴 했지만 공작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녀는 후닥닥 미아와 리브로 뒤로 숨었다. 파워풀한 그녀의 움직임은 오히려 공작의 시선을 끌었다. 조슈아 시몬은 후닥닥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자세히 보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누나 뭐해?”
“베르니스, 왜 그래?”
베르니스는 그들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고 자신의 몸뚱이를 숨기는 것에 급급했다.
‘왜.. 왜 저 사람이.......!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제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베르니스의 힘겨운 노력에도 조슈아 시몬은 미아와 리브로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아가 다시 한번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베르니스?”
“나 쳐다보지 마! 내 이름 부르지도 마!”
그녀가 파닥파닥 손짓하며 속삭였다. 그리고 그들 뒤에 주저앉았다.
“공작이 우리 보는데? 아,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리브로의 실시간 해설에 그녀는 절망감을 느꼈다.
‘오지마 오지마 꺼져!’
베르니스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그녀가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리브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 간다? 교수님이 학교 안내 해주려나봐”
크리스토퍼의 손짓에 공작은 마지못해 그를 따라가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미아와 리브로를 아니, 정확히는 그들 속에 숨어있는 베르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
베르니스는 다시 재개된 체술 훈련엔 역시나 집중을 하지 못했다.
‘훈련 끝나고 바로 기숙사로 튀어야지. 아니야. 외출증을 끊고 하루 종일 프레하 시장을 싸돌아 다닐까.’
수업시간 내내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댔다. 그리고 수시로 교내 종탑에 있는 대형시계를 쳐다보았다. 미아는 베르니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리브로는 ‘말세야 말세’ 하며 휑하니 가버렸다. 이윽고 종이 울리기 전 10분 정도가 남았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에두아르도 교수님”
마지막으로 개인 체술훈련에 대한 당부를 전하고 있는 에두아르도 교수에게 다가오는 시종이 있었다. 그 시종은 분명 크리스토퍼 교수의 시종이었다.
‘설마, 설마’
베르니스는 진심으로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시종의 등장에 에두아르도 교수는 시종을 보았다.
“뭐지?”
“크리스토퍼 교수님이 급히 베르니스 드니로 사제분을 호출하셨습니다.”
“그래? 베르니스 드니로 들었지? 먼저 마무리하고 가도록 해”
불행하게도 에두아르도 교수는 사고가 아주 유연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고갯짓을 하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학생들에게 전달사항을 말했다. 베르니스는 단두대 앞에 고개를 내민 사람마냥 시종을 따라나섰다.
크리스토퍼 교수의 집무실에 다다르기 전까지 그녀는 계속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피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생각했지만 답이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자신의 예지능력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어느 샌가 시종은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들어와요”
크리스토퍼 목소리에 시종은 베르니스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겨보려고 노력하며 들어섰다. 집무실 책상에 크리스토퍼가 앉아있었고 응접용 고급 소파엔 역시나 조슈아 시몬이 앉아있었다. 그는 그물에 걸린 사냥감을 보는 듯 그녀를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와요. 베르니스 사제. 다름이 아니라 신탁의 밤 때문에 불렀습니다. 괜찮지요?”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그녀의 마음의 소리와는 반대로 교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조슈아가 무서울 정도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교수가 민망한 듯 말했다.
"아, 사제로만 남기엔 많이 아까운 미모긴 하지요. 허허허"
교수의 말에 조슈아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그 표정에 그녀는 땅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의미로 쳐다본 게 아닐 겁니다 교수님.....'
서먹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한 크리스토퍼 교수의 말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격이었다. 말똥을 밟은 마냥 얼굴을 구긴 조슈아의 표정을 다리미로 펴주고 싶을 정도였다.
“여기 계신 조슈아 시몬 공작님은 알다시피 제국 내 최고의 명망 있는 귀족입니다. 요번 신탁의 밤에 베르니스 사제를 콕 집어 축복을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교수의 말에 조슈아는 그녀에게 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이 인간은 다 알고 있어......’
“베르니스 사제의 유능함이 제국에 꽤 퍼져있나 봅니다. 사제는 이런 일이 처음일테니 천천히 신탁의 밤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세요. 나는 차를 내오겠습니다”
“교수님!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녀가 이때다 싶어 자기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며 손을 들었다.
“무슨 소린가요! 신탁의 밤에 관련해서 베르니스 사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으시다던데. 천천히 대화하도록 하세요. 공작님, 후원금에 대해선 이따가 얘기하시죠”
교수는 여지껏 보여준 적 없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휑하니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역시나 돈의 힘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가 나가자마자 삽시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정 가운데 앉아있는 공작의 대각선으로 앉았다.
“베르니스 사제,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어젯밤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녀를 보는 조슈아 시몬의 표정엔 여유롭고도 차가운 미소가 떠올라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