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과 언니, 산이 세 사람은 마치 나는 없는 사람인 양, 셋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산의 취업 준비 이야기, 혼자된 언니 이야기, 어머님의 건강 이야기... 그러다 그때까지 하영을 안고 있던 언니가 어머님께 하영을 건네주며 말한다.
“아직 손녀 제대로 못 보셨죠. 하영이 한 번 안아보세요. 제 엄마를 닮아서 이목구비도 또렷하고 참 예뻐요.”
역시 핏줄은 끌리는 법인가. 하영을 품에 안는 어머님의 표정이 밝아지신다. 조금 전까지도 내게는 눈길 한번 안 주시던 분이 손녀는 반가우신가 보다. 약간 섭섭한 마음이 올라오지만 내가 섭섭해할 처지가 아님을 잘 알기에 말없이 하영만 바라보는데, 그런 내 마음을 언니가 눈치챘을까? 언니가 다시 말을 꺼낸다.
“어머니, 이제 이 사람도 어머니 며느리예요. 이렇게 예쁜 손녀도 안겨 드렸는데... 이제 그만 받아주세요. 그리고 산아, 너도 동생이 생겼으니 자주 찾아뵙고 동생도 잘 돌봐 줘야 한다.”
“네. 그럴게요.”
어머님은 하영에게 말씀하신다.
“그래. 엄마처럼 예쁘게 건강하게 잘 자라거라.”
그러고 보니 어머님도 딸이 없으시다. 그래서 며느리를 딸처럼 여기셨을 것이다. 언니도 딸이 없다. 다행이다. 딸이어서. 사랑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설거지를 끝낸 그가 커피를 한 잔 타서 들고 내 옆에 앉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들 하세요?”
그는 아들에게 요즘 어떤 책을 읽는지 묻고는 말한다.
“너도 이제 곧 직장생활하는 성인이 될 거야.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번다고 해서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란다. 어른이 되려면 사물과 사람, 세상과 우주 만물의 내면을 볼 줄 아는 통찰이 필요한 법이다. 법학, 철학, 물리학, 종교학 등 가리지 말고 읽고 보고 배워서 너만의 통찰력을 키워라. 그리고 지금 선택한 직장을 너무 크게 생각하지는 말아라. 넌 아직 어리고 가능성은 무한하니까. 미래를 넓게, 멀리 보고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해.”
언니가 여기서 그의 말을 자른다.
“오늘은 하영이 첫돌을 축하하는 자리니 수업은 다음 시간에 해요.”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며 웃는다.
“하영이가 크면 이 사람이 좋은 친구이자 선생님이 되어줄 거예요. 다 좋은데 가끔 도가 넘칠 때가 있어요. 적당할 때 끊어주는 법. 배우게 될 거예요.”
“네. 고마워요. 언니.”
난 혼자 생각했다. ‘저도 겪어봐서 대충은 알아요.’
그의 등장으로 약간 기세가 오른 나도 가끔 대화에 끼어들어 말을 보탠다. 그렇게 대화는 무르익어가고 시간이 흘러 저녁이 다가오자 어머님께서 말씀하신다.
“난 피곤해서 이만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저녁 드시고 가세요. 어머니. 준비 다 해 뒀어요.”
내가 붙잡자, 그때까지 한 번도 내 말에 답을 않으시던 어머님은 처음으로 내 말에 대꾸하신다.
“집에 가서 먹어야겠다. 피곤하구나. 이건 하영이 옷 사입히는데 보태거라.”
어머님은 손가방에서 반으로 접은 봉투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시고는 돌아서신다. 그는 어머님을 모셔다드리겠다고 같이 따라나선다. 곧이어 언니와 산이도 가 보겠다며 일어선다. 나는 현관에 서서 언니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언니, 너무 미안해요. 꼭, 이 말.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죄스러워 드릴 말씀이 없네요.”
내가 눈물을 글썽이자 언니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녀는 어느새 내게 말을 놓고 있다. 나를 받아들인다는 뜻일까?
“또 왜 그래. 하영 엄마 잘못 아냐. 난 하영 엄마 미워하지 않아. 그러니 그런 생각 말고 하영이 잘 키우고 행복하게 잘 살아. 그리고 우리 그이가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야. 잘 보듬어주고. 하영이 데리고 거제로 가끔 놀러도 오고 그래. 난 일 때문에 바빠서 여기까지 오기 힘들어.”
“네. 언니. 고마워요. 산이도 고맙고. 가끔 놀러와 하영이도 오빠가 있어 좋아할 거야.”
“네. 시간 되면 자주 올게요.”
잠시 후, 닫히던 문을 밀고 언니가 혼자 다시 들어선다.
“나, 잠깐 할 말이 있어서.”
“네, 말씀하세요.”
“난 말이야 비록 법적으론 이혼했지만, 그이가 정말 날 떠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산이 아빠인 것도 여전하고, 그래서 난 산이 아빠를 늘 부르던 대로 ‘여보, 당신’이라고 불렀으면 해. 사람들 앞에서도 ‘남편’이라 부를 거고. 자기 생각은 어때?”
“네. 편하게 하세요.”
“아니. 하영 엄마는 호칭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아까 들으니까 ‘하늘씨’라고 부르던데, 계속 그렇게 부를 거야?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여보, 남편’이라고 부르면 이상하잖아. 남들 보기도 그렇고...”
“그렇겠죠. 전 그냥 평소처럼 이름 부르는 게 좋아요. 하영 아빠도 저를 ‘미영씨’라고 부르거든요. 아직 한 번도 ‘여보, 당신’ 이렇게 불러본 적 없어요. 하늘씨한테 ‘여보. 당신’은 언니뿐이에요. 모르셨어요? ... 얼마 전 하늘씨 휴대폰 만져본 적 있어요. 단축번호 1번 ‘아내’ 저는 4번 ‘미영씨’더라구요. 하늘씨를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마음 쉽게 변하는 사람 아니라는 거.”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부부간의 호칭을 하고 싶은데, 혹시 나 때문에 못 하는 건 아닐까, 해서야. 그러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조심할게.”
“아니에요. 아직은 저도, 하늘씨도 지금이 편해요. ‘여보, 당신’은 제 스타일도 아니고요. 그리고 하늘씨도 언니를 아내로 인정하고 있잖아요.”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하영 엄마 손 좀 보자.”
그녀는 내 왼손을 살며시 붙잡더니 혼잣말하듯 말한다.
“으이그, 이 무심한 사람. 바쁘고 정신없었던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녀는 자기 왼손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서 내 왼손 약지에 끼워준다. 내가 깜짝 놀라며 말렸지만, 그녀는 힘으로 끼워버린다.
“대충 맞네. 이건 강하늘씨가 아내에게 준 결혼반지야. 이제 내가 이 반지의 주인이 아니니 주인 손에 넘겨줄게. 남편이 준 거니까 잘 간직하고 있어. 아내 노릇, 엄마 노릇, 제대로 못 하면 다시 뺏으러 올 거야. 그리고 이거”
언니는 핸드백에서 반지케이스를 꺼내더니 내게 쥐여준다.
“이건 그이 거야. 액세서리 싫어해서 잘 안 끼고 다니니까. 잘 보관하고”
그리고는 묘한 표정으로 문 뒤로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라 말도 못 하고 눈물만 맺힌다.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너무나도 미안하고 고마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그는 결혼반지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해주려고 한 적도 없고, 내가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알 것 같다. 그는 혼인신고는 두 번 했을지언정, 두 개의 결혼반지는 만들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모두 돌아가고 나와 하영만 남았다. 긴장이 풀리고 피곤이 몰려든다. 눈물이 조금씩 흘렀으나 기분은 좋았다. 한고비를 넘긴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하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했던가. 그의 가족들은 모두 그를 닮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주고 배려와 인정이 가득한 좋은 사람들, 사랑스러운 분들이었다. 머리채를 몇 번을 잡았어도 시원치 않을 나를 오히려 따뜻이 품어주고 가신 그의 가족들에게 감사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향기가 남았다.
나중에 살펴보니 언니가 주고 간 결혼반지는 반짝이는 새 반지의 아름다움은 없지만 투박하고 묵직한 20년 치 혼인 내공이 기(氣)처럼 서려 있어, 은은한 아름다움과 품격이 느껴졌다.
2부. 그녀의 이야기 끝.
에필로그 –미영- (10개월 후) 2018. 8. 12
거제시 옥포동 OO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니, 노래가 흘러나온다. 잠시 후, 산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나야, 작은 엄마.”
‘띠리릭’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산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하영에게 팔을 뻗으며 인사한다.
“어쩐 일이세요? 연락도 없이.”
하영은 ‘아빠. 아빠.’하며 산의 품에 안긴다.
“잘 지냈지. 엄마는?”
내가 묻는데 안방에서 언니가 나오며 똑같이 묻는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혼자 온 거야? 그이는?”
나는 쇼핑백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답한다.
“자거나 책보고 있겠죠.”
“왜? 같이 오지 않고.”
“날도 더운데 하루걸러 잔업에 특근에, 피곤해 보여서요. 내가 언니네 간다고 하면 따라나설 게 분명해서, 친정 다녀온다고 하고 둘이서 왔어요. 시외버스 타고.”
“밥은?”
“점심 먹어야죠. 언니 몸보신 시켜 주려고 장어랑 소고기 좀 사 왔어요.”
내가 쇼핑백에서 장어와 갈비를 꺼내 흔들어 보이자. 언니는 손사래를 친다.
“몸보신은 무슨.”
산이는 하영을 안고 뱅글뱅글 돌며 말한다.
“엄마는 챙겨주는 사람 있어 좋겠어요~ 하영아, 오늘 고기 먹는다. 고기, 고기”
“고이, 고이. 아빠 고이. 까르르~”
하영이 따라 하며 웃어댄다. 산이는 늦둥이 동생 하영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한다. 마치 딸을 보살피는 아빠처럼, 한 번 품에 안으면 좀처럼 내려 놓지 않는다. 하영도 산이를 ‘아빠’라 부르며 잘 따른다. 어쩌면 하영은 그와 산이를 둘 다 ‘아빠’라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아빠와 오빠가 붕어빵만큼이나 닮았으니. 외모도 목소리도 행동도.
하영을 언니에게 맡기고 나는 산이와 함께 점심 식사를 준비한다. 산이도 아빠에게 주방일을 배웠다고 했는데 요리도 제법 잘한다. 난 고기를 굽고 있는 산이에게 물었다.
“넌 아들이면 좋겠니? 딸이면 좋겠니?”
“아들요.”
“왜?”
“여동생은 하영이 있잖아요.”
잠시 후 직장 일을 물었다.
“회사 일은 어떠니?”
“음... 아직 신입이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어리바리하고 배우고 있어요.”
“군대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특례신청 안 하고 자원입대하려고요.”
“왜?”
“그냥. 경험해 보고 싶어요...”
“그래, 아빠랑 잘 상의 해봐.”
“네.”
잠시 후, 점심을 먹으며 언니에게 합가 문제를 묻는다.
“어머님도 언니 임신한 거 아시고는 합치는 것도 좋겠다고 하시던데...”
내 말에 언니는 깜짝 놀라며
“어머님이 아신다고? 말씀드린 적 없는데 어떻게...”
순간 언니는 산이를 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이는 장어 살을 발라 하영에게 먹이며 딴청을 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