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와 리사의 경기를 보던 메즈는 경기가 마무리되기 전에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딱히 급한 용무가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경기장에 더 있어봤자 얻을게 없었다.
메즈가 판단하기에 승패는 이미 정해졌었고, 경기가 끝나고, 반드 선생이 만들어 준 쉴드가 없어지면 이런저런 피곤한 일이 많아질게 분명해보였다.
기숙사로 오는 길에 마주친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경기장 주변은 물론이고, 기숙사 복도나 로비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방금 전까지 울리던 그 함성이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도 되는 듯, 메즈의 방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메즈는 신발을 벗고, 방 중앙에 놓인 쇼파에 기대어 앉았다.
방금 전 두 사람의 경기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레바테인'이랬던가. "
메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리사의 초월력의 상징인 화염의 대검이었다.
관중을 압도하는 화려함과 경기장을 통째로 날려버릴만한 화력
거기다가 순간 아리스의 품으로 파고드는 예리한 돌진력과 유연함
리사는 메즈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한 상대였다.
마지막에 아리스에게 날린 화염 결정의 연쇄폭발은 메즈가 생각해도 아찔한 화력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아리스였던게 문제였다.
아리스의 이 빠진 녹슨 검. '스쿠렙프'
그리고 리사의 폭발을 베어낸 듯 바닥에 남은 무수히 많은 날카로운 상처
폭발의 순간 아리스가 한 행동은 단순히, 낡고 부서진 칼집에서 아리스가 천천히 검을 뽑는 것뿐이었다.
단지 그 뿐
그걸로 리사의 회심의 연쇄폭발이 막힌 것이다.
하지만 메즈는 아리스의 그 동작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남들이 보기엔 단순히 칼을 뽑는 동작일 뿐이겠지만 메즈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검을 뽑는 동작에서 칼집의 상처를 통해 발생한 무수히 많은 바람의 칼날들이
제각기 사방으로 흩어지며 아리스 주변으로 날아 들어오는 모든 폭발을 베어냈다.
- 위이이잉
고요한 침묵을 깨고 진동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 위이이이잉
진동은 한번으로 멈추지 않고 여러 번 계속 울렸다.
아마도 전화인 모양이었다.
메즈는 핸드폰을 꺼냈다.
메즈의 핸드폰의 번호를 아는 사람. 그리고 이렇게 진동을 울릴 사람은 딱 한사람밖에 없었다.
- 아리스
그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적혀 있었다.
"에휴..."
아리스가 전화를 한 목적이 안 봐도 뻔했다.
"여보세요"
메즈의 낮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갔다.
"여보세요? 메즈? "
"지금 어디야?"
"어디냐고!!"
"어?"
"나한테 할 말 없어?"
"뭐라고 할 말 없냐고!!"
아리스의 따발총 같은 잔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웬만한 래퍼들 저리가라 할 말 속도였다.
아마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 지금 방인데……."
"뭐? 방이라고? 지금?"
"그래.."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아리스의 목소리가 잠깐의 공백이 생겼다.
"여보세요? 아리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메즈가 다시 한 번 불러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 삑!! 띠링~!
공백을 깨고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방금 난 소리는 핸드폰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응?"
메즈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난 곳은 쇼파를 등지고 있는 현관문 방향
그곳에 굳게 닫혀 있어야 할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볼이 아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아리스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
메즈가 멋쩍은 표정으로 핸드폰의 종료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메즈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안녕 아리스."
메즈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째서 아리스가 자기 방 현관문 키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에 관해 굉장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리스는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메즈 왜 끝까지 안보고 가버린거야? 경기 본다고 약속 했잖아!"
쇼파로 다가온 아리스의 입이 오리만큼이나 튀어나와 있었다.
메즈가 약속을 안 지킨 대에 아리스는 지금 엄청나게 불만이 많았다.
"난 분명 약속 지켰다고, 번지수 잘못 찾았어."
메즈는 의외로 침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당했다.
메즈가 아리스와 한 약속은 '경기를 보러 오는 것' 이었다.
경기장에 분명 갔었던 이상 약속을 어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메즈는 당당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짓말! 경기 끝까지 안보고 가버렸잖아! 메즈 누가 이긴지도 모르지?"
하지만 메즈와 아리스는 약간의 의견차를 가지고 있었다.
'경기장에 와서 끝까지 보는 것' 아리스는 메즈와의 약속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봤을 때 메즈는 약속을 어긴 게 된다.
"진정하고, 내 말을 좀 들어봐바. 난 분명 경기장에 갔었어. 그치? "
메즈의 말에 아리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선생님이 휘슬을 불기 전에 나온 건 사실이지만 경기는 분명 똑똑히 지켜봤다고,
리사의 라바테인이 만든 폭발을 멋지게 막아내면서 이겼잖아? 그렇지?"
메즈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보냈다.
아리스의 기분을 풀어줄 때는 말도 말이지만 표정이 상당히 중요하단 사실을 아는 메즈였다.
말을 마친 메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리스의 뚱~한 얼굴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놓여 있었다.
메즈의 손이 아리스에게 점점 다가갔다.
그리고
메즈의 손이 아리스의 오른쪽 뺨에 닿았다.
- 쓰담..쓰담..
"리사한테 한방 크게 먹었던데..아프지는 않고? "
메즈의 손에 닿은 아리스의 눈이 휘동그래졌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메즈에게 들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성이 이런 말을 해준다면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게 의도된 행동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메즈뿐이지만 말이다.
"메즈……."
아리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방금 전 쓰담쓰담으로 엄청나게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 여기두~ 여기두 쿵 해쪄~ 여기도 쓰다듬어줘~"
아리스는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머리도 쓰다듬어 줬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네~네~ 암~ 그럼요 "
메즈는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오늘 사건은 이걸로 끝!
이라고 메즈가 마음을 놓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메즈의 안도는 다음 아리스의 한마디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