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험악해진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청국장과 공깃밥이 레일을 타고 나왔다.
얼굴을 맞은 메즈는 별다른 리액션을 보이지 않았다. 표정의 변화도 전혀 없었다.
다만, 말없이 레프리의 옆을 지나쳐 음식이 나온 레일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던 사람 어디 갔냐? 사내 녀석이 한대 맞고 쫄아서 꼬리 내리기는
넌 자존심도 없냐?"
말없이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메즈에게 레프리는 온갖 비아냥거림을 다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메즈는 쟁반을 들고는 아리스를 쳐다보았다.
"나 먼저 밥 먹는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평한 목소리와 태평한 문장이었다.
방금 레프리에게 맞은 사실이 마치 없던 일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아리스에게 말을 마친 메즈는 테이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안 끝났어. 임마!"
뒤도 안돌아보고 걸어가는 메즈를 향해 레프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갔다.
아까 한방으로는 화가 덜 풀린 모양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3m쯤 거리가 좁혀졌을 쯤 메즈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콰당!
레프리가 엄청난 소리와 함께 앞으로 꼬꾸라졌다.
툭!
넘어지던 레프리의 손이 메즈가 들고 있던 쟁반의 앞쪽을 강하게 내리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반동으로 쟁반에 놓인 청국장이 레프리에게 흩뿌려졌다.
"으악!!! 앗 뜨거!!! 으아아악!"
레프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굴렀다.
"젠장 방금 뭐였지? 바닥이 엄청 미끄러웠,,,,"
고통에 조금 익숙해지자 레프리는 자신이 넘어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다른 바닥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레프리가 발 디딘 그 발판만이 완전히 얼어붙어, 빙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프리가 보기가 무섭게 바닥의 얼음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레프리의 앞에 메즈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을 주웠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한 입 정도는 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메즈의 조롱에 레프리의 얼굴이 터져나갈 만큼 험악하게 구겨졌다.
분노에 치가 떨렸다.
고통도 부끄러움도 잊혀졌다.
"이 건방진 녀석!!! 잔재주를 부리다니, 주제를 알란 말이다!"
이성을 잃은 레프리가 야생 멧돼지마냥 메즈에게 돌진해왔다.
레프리는 다시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온몸에 끌어 넘치는 분노를 담은 한방이 메즈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 주먹은 메즈에게 닿지 못했다.
주먹이 멈춘 곳은 아까 메즈가 바닥에서 주운 숟가락 앞이었다.
"음... 미안한데 방금 너가 다 먹어서 더 줄게 없거든,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어때?"
메즈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반대로 그 싸움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심을 담은 펀치가 그저 들고 있을 뿐인 수저에 막히다니
감히 상상하기가 어려운 광경이었다.
술렁이던 학생들 사이에서 실은 레프리가 약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레프리 실은 되게 약한 거 아니야?"
"하긴 전교 10등이라 봤자. 성적순으로 따졌을때 그렇단거잖아."
"머리만 믿고, 자기보다 성적 나쁜 애들을 그렇게 무시해대더니 꼴좋네."
"큰소리 빽빽 지르면서 나댈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주먹이나 휘두르는 게, 분노조절장애라도 있는 거 아니야?"
"게다가 아리스를 좋아한다잖아 큭큭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거울도 안보나? 크크"
"우리 반 리더라는 애가 저 꼴이라니 아우~ 창피해"
"엥? 쟤가 A반 리더였어? “
"그렇다니까? 나~참 "
그리고 그 의견은 마치 사실처럼 굳어져 갔다.
당사자가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다 들으라는 식이었다.
수군거림을 듣던 레프리의 자존심은 구겨지다 못해 갈가리 찢어졌다.
"젠장! 젠장!! 젠장!!! 내 오늘의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겠어. 반드시 말이야! 기억해두라고! "
레프리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온 몸에 청국장을 뒤집어쓰고, 뛰어가는 레프리의 뒷모습에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의 수치심이 느껴졌다.
메즈는 레프리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한때 자신의 일용할 점심이었던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에휴... 오늘따라 두부가 많다 싶더라니. 왜 청국장이 나왔는데, 먹지를 못하니"
메즈의 진심어린 독백이었다.
물론 두부가 많이 들어있던 것 말고는 그닥 운수 좋은 날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메즈~ 다 끝난 거야?"
천하 태평한 목소리로 아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양 손에 들린 쟁반에는 한가득 햄버거 세트가 실려 있었다.
"너 남에 카드로 대체 몇 개를 시킨 거야..."
"음... 3개...?"
아리스가 '데헷?' 하는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에휴... 그리고 좀 도와주면 어디 덧나냐? 따지고 보면 너 때문에 맞은 거라고"
메즈 입장에서 보면 여러모로 억울한 점이 많았다.
우선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었을 뿐인데, 누군지도 모르는 학생에게 시비기 걸렸다.
또, 사실을 사실대로 털어놨을 뿐인데, 아리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카드를 강탈당한 건 덤이었다.
그 뒤엔 갑자기 멱살을 잡히고, 주먹질도 당했다.
마지막으로 기껏 나온 점심까지 뺏겨버렸다.
"음~ 그치만~ 날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싸운다니~ 꼭 만화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잖아.
그럴 때 그저 지켜보는 게 여주인공이 할 일이라고~"
메즈는 뚱한 시선으로 아리스를 노려보았다.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에휴.."
쪼그려 앉았던 무릎을 펴고, 메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국장이 쏟아진 자리에는 어느 샌가 달려온 청소로봇이 청소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건이 정리되자 주변을 메우던 구경꾼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메즈는 아리스의 쟁반에 놓인 햄버거 하나를 집어 들고는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한 야채와 바삭한 치킨패티를 씹는 소리가 맛있게 들려왔다.
"에엑~?! 무슨 짓이야 메즈! 그거 내꺼란 말이야!"
갑작스럽게 햄버거를 하나 빼앗긴 아리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양 손에 들린 쟁반 때문에 그게 아리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제스처였다.
"3개나 있잖아. 하나정도는 양보하라고,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메즈가 아직 바닥에 널브러진 청국장 용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건현장은 이제 꽤 많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거 내 카드로 긁은 거잖아. 내 허락도 없이 말이야"
메즈가 감자튀김을 집어 들었다. 3~4개 정도 되는 양이었다.
그리고는 한 입에 집어넣었다.
아리스는 그 모습이 영 탐탁찮은지 꿍한 표정이 되었다.
"우...감자튀김은 하나씩 먹어야 한단 말이야... "
아무래도 메즈가 여러 개의 감자튀김을 한 번에 먹은 게 마음에 안든 모양이었다.
"네네~ 그렇습니까~"
메즈의 목소리에는 전혀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메즈는 가장 가까운 테이블의 의자를 하나 빼고 자리에 앉았다.
곧장 따라온 아리스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3개의 햄버거 세트를 모아놓고 보니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너 정말 맨날 이런 것만 먹으면 살찔 거야. 이렇게 많이 먹으면 더더욱."
메즈가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먹으며 말했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 그러니까 괜찮아~"
행복하게 햄버거를 먹는 아리스의 모습을 메즈는 그저 바라보았다.
저렇게 먹는데 어떻게 살이 안 찌는지.. 인체의 신비란 정말 놀라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