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버님과 도민규 씨 아버님께서 독립운동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는 사실에 언제나 감명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 아버님의 스승이자 벗이신 도인권 어르신과 저희 아버님이 약조하신 날이 드디어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도민규 씨와 김여사님을 이렇게 사돈으로 만나 뵐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허, 허, 허. 연서는 나사 빠진 로봇마냥 삐거덕대며 억지웃음을 짓고 있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현실감도 없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늘이 네 상견례 자리였어.’
이게 말이야, 방구야? 25년을 솔로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상견례라니?
게다가...그 상대가...지금 내가 뉴스에서나 보던 세임 전자 회장의 아들이라고? 지금 우리나라 전자기기 시장점유율 50%나 차지하는 불패신화 세임 전자 회장의 아들? 세임 전자? 미국의 구글, 일본의 소니 같은 세임 전자 아들이라고오?
“저희야말로 딸을 국내 최고 기업인 세임 전자의 며느리로 보낼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엇보다, 유서 깊고 튼튼한 기업인만큼 혼인을 통해 저희 딸의 식견이 넓어질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저기요, 아빠? 도민규씨? 지금 내가...세임 전자의 며느리로 간다굽쇼?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이게 언제부터 정해져 있던 건데요? 나한테는 왜 하나도 얘기 안 한 건데요? 이 아저씨, 아줌마가! 언제 나만 빼고 이렇게 어마무시한 일을 벌이고 있었냐고요!
“저희가 워낙 사업 때문에 바쁘다 보니 이렇게 자녀를 데리고는 한 번도 뵙지 못하다가...이렇게 약조를 지킬 순간에나 만나게 되었네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서 양은 저희 아버님이 아끼던 소녀였던 만큼 선중이 최선을 다해 보필할 겁니다.”
저기요, 거기, 뉴스에 많이 나오던 아저씨. 아저씨 자산이 7조인 건 알겠는데요, 자꾸 이러면 한 대 치고 싶죠? 아저씨는 나에게 현실감 없는 재벌 중 하나일 뿐이라고요. 도대체 뭔데 나한테 손녀니 딸이니 소녀니 하면서 나의 불안감만 키우는 거냐고요?
“선중이도 아주 오래전 갓난아기 때 본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어엿한 남자가 되었군요.”
얼렐레? 김 여사? 어머니? 무슨 재벌 3세를 옆집 아들내미 얘기하듯이 얘기한답니까? 우리가 언제 그렇게 세임 전자하고 접촉이 있었죠?
아니, 그보다 왜 나만 쏙 빼고 재벌하고 이렇게 가깝게들 보여? 실화야? 실화냐고? 나는 무서워 죽겠다고 지금~!!
연서는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당최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줄을 겨우겨우 붙잡고 있다.
야속하게도 연서의 부모님은 지난 25년 동안 단 한 번도 이 상황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한 달 전부터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고 했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것도 과음의 여파로 아직까지 어질어질한 이 순간에 오늘이 ‘상견례’였다면서 국내 최고기업의 며느리로 들어가라는 말이나 하고 있다니!!
허,허,허. 어이가 없어서 자꾸 실없이 웃게 되네.
게다가…남자 이름이 뭐라고? 세임 전자 역대 회장들 이름이 좀 이상하다 싶더니 뭐, 최선중?
차암나. 세임 전자 전 회장은 최고봉, 현 회장은 최고임, 그리고…내 눈앞에 있는 이 남자… 뭐, 이름이 최선중이라고? 진심이야? 그게 최선을 다한 이름이야?
오 마이 갓… 어떻게 사람 이름이 최선을 다해서 지었는데 ‘최선중’일 수 있냐고요!! 얼굴은 최고인 거 인정해주겠는데, 이름은 왜 최선을 다하다 말았냐고요~!!
잠깐, 지금 내가 세임 전자 회장들 이름을 계속 생각한 거야? 허, 이거 지금 너무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여서 감이 안 잡히는데?
나, 어렸을 땐 만화로 된 먼나라 이웃나라도 글 많아서 안 읽던 여자라고요! 먼나라 이웃나라의 이야기엔 태어날 때부터 관심 없다고요! 앞으로도 관심 없을 거란 말이에요~!
어제 그렇게 우웩을 하더니 오늘은 스웩 넘치게 속으로 우다다다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연서는 순간 선중과 눈이 마주친다.
으악!
하얀 피부에 새까만 흑발, 살짝 올라간 눈매를 가진 선중인지라 그냥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연서는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는 데만 에너지를 쓰면 안 된다.
더 중요한 일은 지금 눈앞에 자신의 남편으로 지목된 사람이 자신이 어제 저지른 만행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긴, 그런데 어제는 그렇게 밤이었고...오늘은 어제랑 다른 옷 입고 있고...어제는 술 취해서 얼굴도 말이 아니었을 텐데 설마 날 알아보겠어? 알아보겠냐고?
연서는 제에에발 어제 술 취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 못 하길 바라며 선중을 바라본다.
술 취한 와중에도 어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한숨 소리가 땅속까지 뚫고 들어갈 정도로 컸던 탓인지 ‘후, 이 여자 좀 처리해주세요.’라는 말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은 연서는 선중을 볼 때마다 몸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원래라면 이 시간에 하윤과 따로 만나 점심을 먹으며 재잘재잘 얘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첫 키스를 한 상태니까…사귀자는 고백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귀자는...고백...?
고백!
썸 타는 남자에게 고백받았을지도 모르는 타이밍에, 말도 안 되는 상견례라니? 으아아, 생각할수록 화난다. 화나!
“네, 그럼 다음 주부터 진행하도록 하죠. 최대한 속전속결로 진행하겠습니다. 저희 아들도 전무 위치다 보니 해야 하는 업무들이 많아서요. 최대한 생략하고 식만 성대하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깜빡깜빡. 차 깜빡이 켜진 것 마냥 연서의 눈이 깜빡인다.
연서가 엄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그러자 김 여사는 연서의 팔꿈치를 옆구리살로 퉁 튕겨낸다.
‘아 엄마!’
그러자 김 여사는 연서의 허벅지를 손으로 찰싹! 소리 없이 때린다.
아무도 연서의 편이 아니다.
연서를 제외한 5명은 모두 그 식을 진행하려고 한다.
연서는 그냥 잠자코 결혼을 받아들여 불쌍하게 썩어갈 인생을 선택하는 게 나을지, 지금 깽판을 부려 파혼시키고 부모님께 지옥에서도 듣지 못할 욕을 다 듣는 게 나을지 생각하다가...
결혼 상대가 결코 호락호락한 동네 아저씨, 아줌마가 아님을 자각한다.
그들은...그래,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절대 강자 최고 굴지 기업, 세임 전자였다.
지금 쓰고 있는 연서의 핸드폰도…세임 제품이었다.
스윽.
연서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짐했다. 핸드폰을 바꾸기로...
그렇게 연서의 시선이 핸드폰에 머물 때, 갑자기 이 상견례를 작당한 어르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 둘이 초면일 테니 마저 이야기를 나누게나. 저녁 호텔은 이 컨벤션 1201호로 예약해뒀고, 레저상품도 편하게 즐기다 가도록 해.”
어르신들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데 정신이 팔려있던 연서는 청천벽력같은, 가까운 미래의 시아버님의 말씀에 거의 울상이 돼버렸다.
안 그래도 지금 불편해 죽겠는데...앞에 있는 남자가 남편이 된다는 사실도 너무 현실성 없어서 어이없어 죽겠고...
그냥 너무너무 불편해 죽겠는데 이렇게 가신다고요?
차라리 내가 잘못을 했으면 나를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라고 하겠는데 아니라고요!! 나 잘 못 한 거 없다고요!!
그러다 연서는 두 눈을 꿈벅꿈벅한다.
아...아닌가?
어젯밤에...그래, 저 남자의 차에 그것(?)을 선사했으니 잘못 하나 있고...
그래, 감히 우리 학교 절세미남 하윤을 좋아하고 하윤과 키스한 잘못이 있고...아, 또 뭐 있지...
앗!
혹시 하윤과 잘 돼가고 있는 죄인가?
찰싹! 연서는 갑자기 정색하며 자기 뺨을 때린다.
도연서! 모태솔로여도 절세미남하고 썸 탈 수 있지! 무슨 이런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안 어울리게 조그만해지고 난리야?
하지만 어르신들과 그들을 마중하느라 연서를 보지 못한 선중은 그저 저들끼리 인사를 나누느라 바쁘다. 연서 역시 일어나서 어르신들을 마중하고 있다만, 여전히 현실감각이 없다.
어버버하는 사이에 어느새 덩그러니 두 명의 남녀만 밀실에 남게 되었다.
***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연서는 조상님들의 격언은 틀린 게 없다며 그 격언을 다시 마음에 새긴다.
그래, 그래.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댔어. 근데 좀 거대한 호랑이굴이군...거기에 사는 호랑이도 너무 막강한데...콘푸로스트를 많이 먹었나? 콘푸로스트의 호랑이기운...아! 젠장, 어렸을 때 좀 많이 먹어둘걸!!
후하, 후하. 연서는 격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상견례’라고 갑자기 재벌 도련님과 밥을 먹게 되었고 이번에는 ‘첫 만남’이라면서 친히 단둘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자신이 어제 죽을죄를 지은 남자와.
대한민국의 권력자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냥 마주하는 자리도 불편해 죽을 텐데, 곧 결혼할 사이가 되었으니 마저 이야기를 나누라며 둘만 덩그러니 남겨진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정상적인 호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메바 같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후하, 후하.
아이고, 숨 막혀라. 이 무거운 공기 어떡할 거야...안 그래도 눈빛 때문에 차가워 죽겠는데 이러다 얼어 뒤지겠어! 말주변도 없이 왜 저렇게 가만히 있는데?
그보다, 이거 뭐 몰래카메라 그런 거 아니지…? 엄마가 나 모태솔로 탈출하라고 뭐, 연애의 중요성 이런 거 가르치려고 섭외한 사람들 아닌 거지…?
눈치만 보던 연서는 아주 힐~끗 맞은편의 남자를 쳐다보다가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이내 자신의 생각을 철회한다.
그래, 저렇게 차가운 남자는…일반인일 리 없어.
그보다 어떻게 하지?
이 결혼, 진짜 진행해야 하는 거야?
안 돼, 이혼보다는 파혼이 낫다고 했어. 근데...기업인을 내가 어떻게 설득해? 저 사람들은 평생 하는 게 협상, 계약 체결 이런 거 아냐? 나보다 한 수위라고!!
그보다 여기 이 식당에…도청장치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제가 생각해 낸 ‘도청장치’에 제 발 저린 연서는 일단 잠자코 밥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앞의 남자와 할 말도 없고, 배도 나름 고팠기 때문에, 또 해장하기 좋은 한정식이었기 때문에 배부터 채우고 보자 한 것이다.
그래, 그래. 그 뭐냐, 재벌들은 고상하게 밥을 먹고 우아하게 얘기를 나누겠지? 그럼, 나도 그렇게 행동하면 되는 거야.
우~아하게!
손끝을 날렵하게! 최대한 젓가락질도 우아하게...
우...아...하...게...!
최대한 우아하게 젓가락질을 하던 연서가 콩자반을 들다가 그만 미끄덩, 콩자반을 식탁에 떨어뜨린다.
도로로로록.
야속한 콩자반이 데굴데굴 구르더니만 이내 선중의 앞에 멈춰선다.
끄아, 하고 연서는 속으로만 소리친다.
재벌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식사예절이라면서 불같이 화를 낼 선중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러나, 결과는 정적.
예상외로 선중은 떨어진 콩자반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더니만 자신도 덩달아 수저를 들어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것도 아주 잘 먹는다.
어라라? 별로 신경 안 쓰네? 우리, 사실 결혼하는 거 아닌 거 아니야?
그래, 사실 말도 안 되잖아? 내 나이 스물다섯에, 그것도 서로 평생 모르고 살던 사람이랑 갑자기 무슨 결혼이야 결혼은...암, 말도 안 되고 말고...
게다가 나는 평범한 집안의 사람이고 저 사람은 오프라인에서나 온라인에서나 시끌벅적한 세임 전자 그룹 사람이라는데 내가 어떤 연이 있다고 결혼이야...정말 말도 안 ㄷ...
“도연서 씨.”
앞에서 밥만 잘 먹던 선중이 갑자기 그 낮은 목소리로 연서를 부른다. 깊은 아이홀에서 풍기는 아우라를 한껏 내뿜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