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춘회파 카오스 체스 대회 (하)
4강 1경기. 케이타 vs 네파리안
녹발 힐러와 흑발 냉혈한의 시합.
케이타는 '실키'라는 비단옷을 입은 여자 영웅이, 네파리안은 '아그니'라는 불의 군주가 걸린다.
<파앗. 파바밧>
화려하고 유연한 실키의 기술을 잘 활용하는 케이타의 컨트롤에 경기 초반 네파리안은 꽤나 진땀을 뺀다.
그럼에도 아그니의 용암 병사들을 부려가며 상대를 압박하려 노력하는데...
체스판 중앙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펼쳐진다.
그러던 와중 네파리안이 아그니의 궁극기를 발동시킨다.
<쾅. 콰광. 콰광>
화산폭발이 작렬하자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 버린다.
계속되는 아그니의 압박에 실키는 맥을 못 추었고, 결국 이 경기는 네파리안이 가져갔다.
케이타가 GG(Good Game의 약자. 패배를 시인할 때 쓰는 말)를 선언한다.
"이야, 역시 네파리안의 아그니. 당하기가 쉽지 않네."
"실키의 움직임도 나쁘지 않았다."
네파리안도 상대의 실력을 인정해준다.
3학년으로 춘회파 최고령자인 둘은 덕담을 조금 주고받으며 경기를 복기해본다.
어쨌거나 흑발의 냉혈한이 제일 먼저 결승전에 선착했다.
2경기. 춘회 vs 윌리엄
이번에는 2학년들의 경기다.
춘회는 어둠의 진영 재간둥이 '아크마'가, 윌리엄은 빛의 진영 재주꾼 '프로도'가 나왔다.
게임 시작과 동시에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된 듯 체스판 하단으로 영웅을 이동시킨다.
둘 다 마법 영웅인 이번 대결에선 세밀한 컨트롤이 중요했다.
앞선 1경기 못지않은 막상막하의 승부가 펼쳐진다.
"마법 저항력 강화!"
"시전 해제!"
"방어 타워로 빠져야 해!"
"아오-! 졸개가 길을 막았어!"
(카오스 체스 용어들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약아빠진 운영에 능한 춘회쪽으로 승부가 기울어가기 시작한다.
우직한 스타일의 전사 영웅을 잘 다루는 윌리엄에게 프로도라는 마법 영웅은 잘 안 맞았던 것이다.
결국 춘회가 아크마의 궁극기로 프로도를 콕 찍어 잡음으로서 경기를 가져간다.
"쳇, 역시 난 전사 영웅이 어울려!"
윌리엄이 분통을 터뜨린다.
백발의 미소년도 인정한다.
"맞아. 무작위로 걸린 영웅이 너랑 안 어울렸어."
"어쨌거나 네가 이겼다 춘회. 결승전으로 가버렷!"
"아, 앗흥~ (?) 땡큐 윌리엄!"
그렇게 춘회가 마지막 결승 티켓을 거머쥐면서 4강전이 모두 끝났다.
대망의 결승전.
네파리안 vs 춘회
위쪽을 본진 삼은 네파리안의 영웅은 큰 낫을 든 검보랏빛 암살자 '사티로우'.
사티로우는 영웅끼리의 일기토에 능한 전형적인 전투 영웅이었다.
한편 아래쪽 본진이 걸린 춘회는 웬 돌덩어리같이 생긴 회색 거인 '스톤콜드'가 나왔다.
경기 초반, 네파리안은 사티로우를 체스판 위로 보내고, 춘회는 스톤콜드를 아래로 보낸다.
둘 다 중반 이후에 위력을 발휘하는 성장형 영웅이라서 일단 초반엔 조심스럽게 웅크린 채 힘을 비축해간다.
하나하나 레벨이 오르고, 궁극기를 습득할 때까지 두 영웅은 무난히 컸다.
'드디어 궁극기를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이때부터 사티로우의 진가가 드러나는 거지.'
먼저 움직인 쪽은 네파리안.
그는 사티로우를 움직여 체스판 중앙의 숲 지형으로 들어간 뒤, 몸을 숨기고 상대방에게 궁극기를 날릴 타이밍을 잰다.
'사티로우가 사라졌네.'
한편 체스판을 주시하고 있던 춘회는 상대 영웅이 사라진 것을 잽싸게 캐치했다.
'아마도 내가 진출하는 순간, 궁극기를 쓰면서 덮쳐오겠군. 그렇다면 잠시 대기하자. 방어 타워에 숨어서 아이템을 맞추는 거다. 좋은 아이템이 손에 들어오면... 히힛! 스톤콜드 타이밍인 거지!'
그는 스톤콜드를 안전한 곳에 고정시키고는 천천히 길게 보고 아이템을 조합하기 시작한다.
'저 녀석, 지금쯤이면 공성을 시작할 때도 됐는데...'
숲에서 동태를 살피고 있던 네파리안은 춘회가 중반이 넘도록 움직이지 않자 점점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다.
그는 사티로우가 숲에서 계속 썩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체스판 아래로 이동시킨다.
'상대가 몸을 사리든지 말든지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 궁극기가 작렬할 거란 사실이다!'
네파리안은 지금껏 카오스 체스를 하면서 사티로우로 이겨 왔던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상대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나약한 빛의 진영 영웅들이 어디에 있건 사티로우는 그림자를 타고 끝까지 쫓아가서 궁극기와 연격을 먹여 무참히 그들을 살해하곤 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사티로우의 궁극 타이밍이다!'
네파리안은 스톤콜드가 있는 빛의 진영 타워쪽으로 거침없이 사티로우를 돌격시킨다.
'그림자를 타고'
<스윽>
'연격부터 갈긴다.'
사티로우는 방어 타워에서 날아오는 포격을 무시한 채 스톤콜드에게 붙어서 기술을 먹인다.
<파바바바바바밧>
그다음 자신 있게 궁극기를 날린다.
'영혼 파괴!'
<슈웅 – 철컹>
초록빛 사기로 가득한 영혼의 덫이 스톤콜드를 덮친다.
"좋아, 죽였..."
하지만 네파리안은 위의 대사를 끝마치지 못한다.
춘회의 스톤콜드가 영혼 덫을 맞고도 멀쩡히 살아 있는 게 아닌가?
'제길, 돌 거인이라서 그런지 맷집은 좋구나. 그래 봤자 다음 연격으로 죽이면 돼!'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며 네파리안이 컨트롤을 해보려고 했으나, 스톤콜드의 반격이 시작될 뿐이었다.
<쿵>
스톤콜드가 던진 바위 한 덩이가 사티로우의 머리에 떨어진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쾅. 쾅>
돌 거인의 궁극기 바위 폭주와 나무 몽둥이 연타.
그야말로 '역관광'을 당해버린 사티로우는 스톤콜드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다.
"이게 뭐야?"
체스판 한구석에 실려 가 부활 대기표를 뽑은 사티로우를 바라보며 네파리안은 말문을 잃고 만다.
"우훗~ 스톤콜드 타이밍이랍니다!"
미소년 특유의 상큼한 눈웃음으로 대답해준 춘회는 손쉽게 상대 아래 진영을 초토화시킨다.
나무 몽둥이를 든 돌 거인이 건물을 깨는 속도는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정확한 컨트롤을 받은 스톤콜드는 숲을 지나 체스판 중앙에 도착한다. 그리곤 지체없이 건물을 부수는데.
<퍽퍽퍽>
네파리안이 시간이 지나 부활한 사티로우를 이끌고 왔을 때, 이미 방어 타워는 모두 부서지고 없었다.
'무슨 파괴력이 이 따위야?!'
모든 것이 그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춘회의 스톤콜드는 마치 등에 날개라도 단 것처럼 거구의 덩치에도 불구하고 신출귀몰 돌아다녔으며, 사티로우가 없는 곳의 건물들은 노출되는 순간 10초도 안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사티로우가 특기인 1:1 전투로도 스톤콜드를 이길 수 없다는 거였다.
<퍽퍽퍽 – 쿵쿵 – 쾅>
그렇게 네파리안은 30분 내내 정신없이 얻어맞다가 본진이 깨져서 지고 만다.
"말도 안 돼~!!! 이건 무슨 속임수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아닙니다."
메이드 사야가 단호하게 말해준다.
그녀는 찌질하게 아직도 패배를 승복하지 못하는 네파리안을 외면한 채 춘회의 손을 번쩍 들어준다.
"춘회님께서 정정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하셨습니다."
"아아아악~!!!"
네파리안이 절규하는 가운데, 춘회가 경쾌하게 만세를 부른다.
"야호오-! 우승이다!"
백발의 미소년이 자기가 주최한 대회에서 우승했단 기쁨에 폴짝폴짝 휴게실 안을 뛰어다닌다.
사야가 커다란 초콜릿 케익을 건네준다.
"우승자에게 드리는 특별 상품입니다."
"맛있겠다! 안 그래도 닭 한 마리로는 부족하던 참이었는데 고마워 사야, 잘 먹을게!"
메이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깃든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맘도 있었다.
만약 네파리안이 우승했다면 초콜릿 케익보다도 달콤한 키스가 특별 상품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쉽지만 흑발 주인님과의 키스는 다음 기회에...
춘회의 우승으로 끝난 카오스 체스 대회.
승패와 결과를 떠나 모두 재밌게 놀았던 좋은 시간이었다.
(네파리안만 빼고. 그는 아직도 패배를 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오늘도 춘회파 아지트의 밤은 깊어간다.
- 11장 외전 '춘회파 카오스 체스 대회' 끝 -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