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도겸은 세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이 당혹스러웠다.
무슨 사이냐니.
확실히 두 사람은 어떤 사이라고 정의를 한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도겸은 좋아한다고 고백했지만, 아직 세영은 이에 답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도겸은 느낄 수 있었다.
좋아한다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세영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이다.
왜, 저번에 방송국에서 마주쳤을 땐 세영도 그가 보고 싶었다고 했다.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세영이 먼저 입을 맞춰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봐라.
먼저 포옹을 하자고 했지 않았는가.
아니 세상 누가 싫어하는 사람이랑 포옹하겠어.
하지만 그래서 도겸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지금 이 질문을 하는 걸까.
아주 험악하던 상황도 아니었건만, 도겸은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에이 설마 지금껏 내 착각이었다는 그런 말은 아니겠지.
오히려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는 걸지도 몰라.
그런데……. 정말 만약 우리는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면?
아까 호진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고 한 행동으로 오만 정이 다 떨어졌나.
그러니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라고 한다면?
도겸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건 도겸에게 있어선 재앙이었다.
애써 침착하게, 도겸이 물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야?”
목소리는 매끄러웠지만, 질문하는 도겸의 눈은 촉촉했다.
깜박이기만 해도 무언가가 떨어질 것 같았다.
“사람을 막 때리려 하고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
아니 방금 그 질문이 그렇게, 어……, 슬퍼질 질문이었나?
굉장히 침통해 하는 도겸에 이번에는 세영이 당황할 차례였다.
세영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본 도겸은 속으로 안심했다.
촉촉한 눈은 도겸의 노림수였다.
도겸은 세영에게 불쌍하게라도 보여서 그가 싫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처절했지만, 그만큼 싫었다.
그걸 모르는 세영은 도겸을 달래려고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거 아냐. 그러니까 일단 좀 진정해봐.”
“그런 거 아냐?”
피날레다. 도겸은 이젠 대놓고 울먹울먹하기 시작했다.
도겸의 생각대로 세영은 어쩔 줄을 몰랐다.
세영은 도겸에게 가까이 다가가 껴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그런 거 아냐. 네가 싫긴 왜 싫어.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나도 좋아해. 너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잖아.”
도겸이 연기하던 것도 있고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좋아한다고 했나?
자신이 정확하게 들은 게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닿아오는 온기가 현실임을 알려줬다.
세영은 도겸과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상기된 볼이 세영이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도겸은 세영에게서 몸을 빼내고 물었다.
“진짜로?”
“너 뭐야? 울먹이던 건 다 어디로 갔어?”
눈물이 쏙 들어간 도겸을 보고 세영이 따졌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정말 나 좋아해?”
“…… 좋아해.”
속은 걸 깨달은 세영은 약간 언짢았다.
그렇다고 해서 좋던 도겸이 싫어지는 건 아니기에, 솔직하게 답했다.
도겸은 기분이 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오는 걸 느꼈다.
도겸은 세영의 볼을 양손으로 깜쌌다.
그대로 입을 맞추려는지 도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세영은 다가오는 도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잠깐. 잠깐만.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아직도 할 말이 남았단 말이야?
입이 막혀 말을 할 수 없는 도겸은 눈썹을 치켜올려서 불만을 표시했다.
세영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려놓았다.
“널 좋아해. 너만 좋다면 정식으로 사귀고 싶어. 그런데…….”
“그런데?”
불안하게 세영이 말끝을 흐렸다.
도겸은 이제 그런데라는 접속어가 끔찍하게 싫어질 것 같았다.
안달이 나서 재촉하자 세영이 말했다.
“나는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나 때문에 네 일에 지장이 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
도겸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세영이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녀는 진지하게 도겸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나 때문에 네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를 수 있을 법한 일이 생기는 건 싫어.”
도겸은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 세영이 선수를 쳤다.
“너는 상관없다고 말해도 난 안 돼. 그렇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아무리 네가 좋아도 안 사귈 거야.”
인간 단호박이라도 되려는 건지.
세영은 단호했다.
아무리 그래도 안 사귀겠다고 말하다니 너무했다.
“지금 협박하는 거야?”
“나 진지해. 그만큼 싫어. 네 일에 내가 걸림돌이 되는 건.”
도겸은 답답했다.
세영은 걸림돌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은 그러면 이상한 녀석들이 세영에게 위해를 가하려 해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지.
그는 멀뚱히 보고만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세영의 말을 거스를 자신은 더욱더 없었다.
고민해봤자 결론은 나와 있었다.
도겸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알겠어.”
“좋아. 너 약속했어.”
신나서 말하는 세영을 도겸이 다시 끌어안았다.
도겸이 있는 힘껏 끌어안은 덕분에 두 사람의 가슴과 가슴이 밀착됐다.
“그럼 우리 사귀는 거야?”
“…… 응.”
세영의 대답에 기쁘다는 듯 도겸이 낮게 웃었다.
도겸의 목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웠다.
세영은 어쩐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더 좁힐 틈도 없는데 도겸은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살짝 숨이 막히지만 세영은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도겸은 세영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세영은 도겸과 눈을 마주하게 됐다.
도겸의 갈색 눈동자는 기쁨에 반짝거렸다.
“그럼……. 나 이제 키스해도 돼?”
세영은 웃었다.
허락을 구하는 도겸이 귀여웠다.
세영은 까치발을 들어 도겸의 입에 입술을 갖다 댔다.
꾸욱, 도장을 찍듯 입술을 내리눌렀다.
말캉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순간 놀란 도겸은 웃으며 세영의 허리를 단단히 잡아줌으로써 화답했다.
몇 번 입술의 감촉을 맛본 뒤, 도겸의 혀가 세영의 입술을 두드려왔다.
거부하지 않고, 세영은 침입자를 허락했다.
그대로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혀와 혀가 얽혔다.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타액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제야 세영은 이 공간에 두 사람만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두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세영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온전히 두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이곳엔 다은 같은 방해꾼도 없었고, 도겸이 배우라는 점이나 자신의 소문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세영은 평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도겸에게 호응했다.
그런 세영이 사랑스러워 도겸은 어쩔 줄을 몰랐다.
숨이 차올라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에야 두 사람은 떨어졌다.
아직도 모자란다는 듯, 도겸은 계속해서 쪽쪽 입을 맞춰왔다.
세영도 거부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도겸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 다 행복해서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 * *
쨍그랑-.
“아아아악!”
넓은 집 안에 온통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 삼십 분째였다.
다은은 자신의 방문을 잠그고, 안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다 부수고 있었다.
또 가끔은 방금처럼 분에 차서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가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모시는 아가씨는 자신의 딸뻘 정도인 어린 여자였다.
아가씨는 아름다웠고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부자에 모든 것을 가졌지만, 자신의 감정을 잘 주체하질 못했다.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고용된 사람의 도리로는 아가씨가 다칠까 걱정이 되었다.
가정부는 또 한 번 문을 노크하고 말했다.
“아가씨, 그러다 다치셔요. 큰 상처라도 남으면 어떡하시려고요. 제가 치울게요, 얼른 나오세요.”
쾅.
“에구머니나.”
가정부는 그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라 주춤했다.
다은이 무언갈 문 쪽으로 던진 듯했다.
가정부는 다은을 멈추게 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래도 지금 다은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는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예전부터 전혀 없던 일은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 다은의 폭주가 잦아졌다.
회장님이 오시면 또 얼마나 화를 내실지, 그리고 그 뒤 다은이 또 얼마나 깽판을 부릴지 걱정이었다.
악순환도 이런 악순환이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려 애쓰며 설거지를 계속했다.
한편, 다은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 안엔 더 이상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물건이 없었다.
얼마 전에 새로 사들인 가구들과 고가의 장식품들이 모두 박살 났다.
사들이는 족족 남아나질 않았다.
잘 정돈되어 있던 다은의 손톱도 부러지고, 엉망이었다.
무슨 파편이라도 밟았는지 발에선 피가 나고 있었다.
뺨에도 무언가 스친 듯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 외로도 이곳저곳 다친 곳이 많은데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리 무언갈 던지고 부숴도, 분노가 해소되질 않았다.
방 한구석에는 남자가 가져온 세영의 신상명세서가 구겨져 있었다.
조사가 끝났다는 남자의 말에 서류를 받아 들은 다은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도겸이 최근 관심을 보인다는 여자가 지난번 방송국에서 자신의 요리 대타를 했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는데 못 알아차렸다니.
자신을 감쪽같이 속인 여자가, 그리고 도겸이 가증스러웠다.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다은을 보며 남자는 히죽거렸다.
그리곤 자신이 세영의 뒤를 밟던 도중 보게 된 일들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남자가 들려준 얘기에 다은은 눈이 돌아갔다.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그 여자는 뭐가 그렇게 특별하기에 그렇게 애지중지하는지.
혹시 또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쇼.
남자는 히죽거리며 그 말만 남기고 떠났다.
그 웃음이 못마땅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 손에 들어와야만 했다.
도겸은 그녀가 살면서 원했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갖길 원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도겸의 마음까지 온전히 가지고 싶었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억지로라도 속박해두는 수밖에.
지금까지의 경고를 무시한 건 도겸이다.
그걸 무시하고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둔 건 도겸의 잘못이다.
자신을 이렇게 아프게 했으니, 그에게 더한 아픔을 주고 싶었다.
다은의 감정은 어느새 도를 넘어 집착으로 변질하여 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땐 정상적인 반응이 아님이 분명한데, 그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도겸이 나쁜 사람이었고, 너무나 미웠다.
물건을 부수는 것으론 더 이상 분노가 해소되지 않았다.
이제는 더 큰 것을 부숴야 했다.
남자가 떠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은은 다시 남자에게 연락했다.
* * *
세영은 서울에 조금 더 머무르기로 했다.
사실 이제 세영이 서울에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운 좋게 도겸과의 오해도 풀었고, 호진과의 일도 조금이나마 해결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자 도겸은 아쉬워했다.
도겸만큼이나 그녀도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에겐 짧은 헤어짐도 길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딱 일주일만 더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덕분에 도겸은 아침부터 온종일 싱글벙글하였다.
세상 온갖 행복은 다 나의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에 민수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민수는 메이크업을 마치고 도구를 정리하고 있는 미연에게 물었다.
“쟤 왜 저렇게 기분이 좋냐.”
“음?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미연도 즐거운지 콧노래를 불렀다.
다들 저만 빼고 무슨 즐거운 경험이라도 했는지.
민수는 왠지 모를 기묘함을 느꼈다.
“이거 수상한데…….”
뜨끔한 미연은 되려 성을 냈다.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요. 도겸이 기분 좋은 게 그렇게 보기 싫어요?”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나만 나쁜 사람 같잖아.
무안해진 민수가 중얼거렸다.
뭔가 미안해진 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매니저 일로 다져진 민수의 촉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리고 그 촉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근데 정말 이상하지 않아? 하루 사이 무슨 좋은 일이 있었다고 저렇게 싱글벙글이야?”
그때 민수는 불현듯 세영이 대역으로 촬영에 왔던 것이 기억났다.
머릿속으로 희미하게, 어떤 가능성이 지나갔다.
“설마 쟤…….”
“내가 왔다!”
때마침 승완이 대기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민수가 눈치챘을까 긴장하고 있던 미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연이 평소보다 반갑게 맞이했다.
“왔어? 손에 그건 뭐냐?”
“이거? 마카롱이랑 케이크. 요즘 인기가 많다는 가게에서 한 번 사와 봤어.”
승완이 손에 들고 있는 봉투를 들어 올려 보였다.
“오, 진짜? 내가 마카롱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무슨 일이냐? 게다가 너 오늘 쉬는 날이라고 하지 않았어? 촬영 생겼냐?”
정신을 차린 도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승완이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오늘이 그의 휴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승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그냥 놀러 왔는데.”
“남의 일터에 왜 놀러오고 난리야.”
“먹을 것도 들고 왔는데 이렇게 박대하기야?”
“그러게 말이다. 넙죽 감사하다고 받을 것이지. 그리고 도겸이 넌 너무 많이 먹지 마. 배 나와.”
민수가 승완의 편을 들어줬다.
“예예, 알겠습니다. 하여튼 승완이라면 친절하게 대하지.”
도겸이 투덜거렸다.
사실이 그랬다.
승완은 다른 소속사인지라 허튼짓 하진 않을까 관리해야 하는 도겸과는 다른 태도로 대하게 되었다.
게다가 승완이 워낙 싹싹하게 굴기도 했고.
그렇게 촬영을 앞두고, 때아닌 다과회가 열렸다.
종류 다양한 조각 케이크들과 마카롱을 늘어놓고 자리를 잡았다.
먹으면서 가벼운 잡담이 오갔다.
문득, 승완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도겸을 불렀다.
“아, 맞다. 도겸아.”
“왜.”
다디단 티라미수를 삼키며 도겸이 대충 대답했다.
“너 저번에 보라(보이는 라디오) 때 양복 입고 우리 보고 있던 그 아저씨 기억나냐? 그 왜 분위기랑 엄청 안 어울려서 희한했던 아저씨. 그 아저씨 오늘도 방송국 앞에 서 있더라?”